설상가상으로 문재인 정부의 '중재자' 역할도 시험대에 올랐다. 정부는 2차 북미정상회담이 사실상 결렬된 이후에도 북미대화를 촉진하고 작년 남북정상회담 합의 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금강산 관광 및 개성공단 재개를 검토하고 있다. 대북 제재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말이다. 그러자 트럼프 행정부의 한 고위 관료는 반대 입장을 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와중에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15일 기자회견을 통해 문재인 정부의 중재자 역할에 의문을 표했다. 현장에 있었던 <에이피> 통신에 따르면 최선희는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이기 때문에 "중재자가 아니라 선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청와대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17일 청와대 관계자는 "남북 간 대화 차례가 아닌가 보여진다"며, "우리에게 넘겨진 바통을 어떻게 하느냐가 고민"이라고 말했다. 또한 "일시에 완전한 비핵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며, "북한이 포괄적 로드맵에 합의토록 견인을 하고 그 바탕 위에 스몰딜을 만들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비핵화 혹은 '비핵화+슈퍼 알파'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게 있다. 북한과 미국의 정확한 입장을 파악하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비핵화에 관한 트럼프 행정부의 입장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트럼프의 핵심 참모들은 비핵화에 핵 포기뿐만 아니라 탄도 미사일과 생화학무기 폐기까지 포함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공개적인 발언은 달랐다. 그는 2월 28일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비핵화에 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었다.
"비핵화는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아주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에겐 매우 분명하다. 핵무기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답변은 폼페이오나 볼턴이 주장해온 비핵화, 즉 탄도미사일과 생화학무기 폐기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입장과는 분명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트럼프 본인의 생각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그도 폼페이오나 볼턴과 같은 입장인지, 아니면 북핵 폐기로 한정하고 있는지를 아는 게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트럼프 행정부가 '비핵화+슈퍼 알파'를 반드시 관철시키려고 하는 목표로 삼고 있다면, 비핵화 자체도 무산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러한 입장은 미국이 사실상 북한의 무장해제를 추구한다는 인식을 북한에 심어줄 수 있다. 더구나 북한은 이와 관련해 강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에는 탄도미사일이나 생화학무기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합의 체결 이후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문제를 제기하면서 북미관계 개선을 이 문제와 연계시켰다.
어렵게 미사일 회담이 열려 상당한 성과가 나왔지만, 뒤이어 집권한 부시 행정부는 미사일 협상을 중단하고는 북한의 생화학무기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북한이 이들 무기를 테러집단이나 테러지원국에게 판매할 가능성이 있다며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지목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전례에 비춰볼 때, 북한은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비핵화에는 미사일과 생화학무기 폐기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품었을 것이다. 최선희 부상이 15일 기자회견에서 2차 정상회담 당시 미국의 입장을 "강도적 요구"라고 비난한 것도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해준다.
비핵화에 집중하라
이에 따라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택과 집중이다. 그 출발점은 트럼프 행정부가 본래 의미의 비핵화에 충실해져야 한다는 데에 있다. 비핵화 자체도 쉽지 않은데, 자꾸 여기에 이것저것 얹다보면 과유불급의 우를 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대화에 앞서 미국의 진위부터 정확히 파악하고, 미국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때라는 점을 설득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북한을 설득하면서 포괄적 로드맵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렇다고 북한의 미사일 및 생화학무기 문제를 외면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들 문제는 "단계적 군축"에 합의한 남북한의 판문점 선언과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통한 평화체제 완성 단계에서 다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를 설득할 수 있는 포인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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