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를 경악시킨 9.11 테러사태가 일어난 지 벌써 1주년이 되어 간다. 최근 미국에서는 9.11 이후 1년간 국내외적으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 정리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볼 때 가장 큰 변화는 '미국의 고립'이라는 것이 외교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때마침 미국의 워싱턴포스트(WP)는 1일(현지시간) "미국과 우방국간 외교적 간극이 확대되고 있다(Diplomatic Gap Between U.S., Its Allies Widens)"는 기사를 통해 "미국이 다른 나라들과 단절되고 있다는 외부의 시각과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협조관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미국의 독선이 공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테러리즘 전쟁 명분으로 국제협약 무시**
WP는 "3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9.11테러가 미국과 다른 나라들과의 단절을 어떻게 심화시키는 작용을 했는지 이같은 극단적인 시각차이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고 전했다.
WP는 미 행정부 관계자들과의 인터뷰를 비롯해 유럽, 아시아, 남미 등의 7개 주요국에 파견된 특파원의 현지 외교관계자 인터뷰 등 광범위한 취재를 바탕으로 미국과 우방국간의 엇갈리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도했다.
대테러리즘 전쟁으로 인해 미국의 정책 우선순위가 달라지고 몇몇 국가와의 외교관계에서 변화가 초래된 것은 일반인들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멕시코와 미국간 이민규제를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9.11 이후 사실상 중단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대테러전쟁을 지원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정책을 취했으나 이러한 외교성과는 미 행정부가 이들 국가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 반민주적 행위 등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얻은 것이다.
미 행정부는 체첸 사태에서 러시아의 만행에 침묵했으며 소련 시절 독재자들이 장악한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과 유대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맺고 있다.
그러나 9.11 테러사태 이후 전세계적인 변화기류는 좀 더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다. 9.11 이후 한동안 미국의 입장을 지지했던 우방국들은 국제조약과 협약을 무시하고 오직 대테러 전쟁이라는 기준에서 모든 문제를 다루는 미국의 태도와 내부 주도권 싸움에 휘말려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연발하는 미 외교당국의 혼선 등으로 냉담해지고 있다.
정작 미국은 지구온난화 문제라든가 세계화에 따른 비용, 에이즈 등 전염병 확산과 같은, 다른 나라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해 더욱 비판받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와의 전쟁을 앞두고 전쟁범죄를 다루는 국제법정에 대해 맹렬하게 반대하고 있으며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자는 국제협약에 대해 거부하고 생물학무기금지협정의 확대를 저지하고 있다. 미국이 이처럼 거부하고 있는 국제적인 정책들은 미국의 전통적 우방국들이 지지하고 있는 것이란 점에서 이미 외교적인 마찰을 빚고 있다.
유럽의 외교관계자들은 특히 중동문제와 환경문제에 관련해 미국의 정책노선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미국과 앵글로-아메리칸의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온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조차 "부시와는 진정한 교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측근들에게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시 행정부는 수입철강에 고율의 보복관세를 매겨 영국의 수출에 타격을 주었고 중동정책과 환경문제 등에서도 블레어 총리에게 정치적인 손실을 안겨주었다. 블레어 총리가 이라크 전쟁에 관해 미국과 어떤 식으로 협조할 것인지 애매한 태도를 보이자 영국 야당들의 정치적 공세가 거세지고 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이언 던컨 스미스 영국 보수당 당수는 "영국은 사담 후세인으로부터 미사일 공격을 당할 위험이 높아졌다'며 이라크에 대한 선제공격을 촉구했다. 그는 "이제 이라크 전쟁에 개입하느냐 여부는 미국의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영국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 외교정책 혼선 심각**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국의 외교정책이 미 행정부 내부의 주도권 다툼으로 혼선을 빚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지만 외교전문가들은 국무부와 국방부, 국가안보회의 및 체니 부통령 사이에서 빚어지는 불협화음은 그 정도를 넘어섰다고 지적하고 있다.
국무부가 보증한다고 발표한 정책도 나중에는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니 이제는 믿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외교정책의 주도권 싸움으로 빚어진 혼란은 중동정책에 관한 것이 대표적이다. 부시는 처음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폭력사태가 벌어지자 지난 4월에는 이스라엘이 점령지역에서 즉각 철수하라고 요구했다가 6월에는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모든 접촉을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때문에 아랍국가들과 유럽측은 미국의 중동정책이 친이스라엘 노선으로 급격히 선회했다며 실망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남미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진 쿠데타에 대해 미국이 드러낸 외교정책의 혼선은 수준이하였다. 민주적 가치를 강조해온 미 행정부는 베네수엘라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후고 차베스 대통령이 축출되자 처음에는 '차베스 때문에 위기가 초래됐다'며 쿠데타를 지지했다가 하룻밤새 차베스가 복권되자 미 행정부는 다시 '민주적 절차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1993~95년 주미 대사를 지낸 전직 멕시코 외교관 호르헤 몬타노는 WP와의 인터뷰에서 "남미에 가보면 미국에 대한 실망감을 어디서건 느낄 수 있다"면서 "미 행정부의 정책은 정말 변덕스럽고 남미의 실상에 대한 무지가 드러난다"고 꼬집었다.
금융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남미 국가들은 미국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다고 분개하고 있다면, 일본과 한국에서는 두 나라가 미국에게 더 이상 중요시되는 국가가 아닌 것으로 취급당하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아시아에서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은 부시 행정부의 무신경한 외교정책에 반감을 갖고 있다. 한국의 경우, 부시가 이라크, 이란와 함께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무시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본도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타도대상으로 몰아가고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거론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미묘한 균형에 대해 부시행정부가 별다른 고려를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미국이 9.11 이후 가장 고무적인 외교적 진전을 보였다는 러시아와의 관계도 심드렁해지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부시가 결정한 탄도요격미사일조약(ABM)파기와 전략핵탄두 감축 등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등 친미 정책을 취해왔다. 그러나 푸틴이 기대했던 경제적 소득을 얻지 못하게 되자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
***"미국으로 인한 배신감, 모욕감, 단절감 팽배"**
미국의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의 이보 달더 연구원은 "전세계적으로 배신감, 모욕감, 단절감 등이 감지되고 있다"면서 "상당한 협력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이 있는데 미국의 일방주의적 외교정책으로 인해 협조정신이 사라지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중동문제 전문가인 시블리 텔하미 메릴랜드대 교수도 "이라크 공습 등 부시 행정부 외교 정책을 따르라고 하면 대부분의 국가들이 따르겠지만 다른 사람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이같은 방식을 필승전략이라고 고집한다면 적개심이 언젠가 폭발할 만큼 쌓이지 않겠는가"하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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