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역사 문제를 다루다보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과거를 다양한 방법으로 기억하는 것을 넘어, 현실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좀 더 쉽고 자극적인 방법으로 역사를 동원하고 싶다는 유혹이 그것이다. 이것은 역사를 정치적 편익 아래 굴복시키는 것이다.
'역사를 선과 악으로 깔끔하게 구분하고, 경쟁자들이나 이견을 악의 편에 몰아넣어 한 방에 제거하고 싶다. 그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며, 우리를 정화하는 것이다'라는 민족적이며 종교적이기까지 한 신념의 정당화가 그 유혹의 뒤를 잇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주장은 확신이 되고, 상대에 대한 불편한 심정은 불구대천의 적대감으로 편향성을 강화한다.
역사에 정의는 없다
인간의 유적 본질과 변화를 탐구함으로써 큰 지적 반향을 일으킨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는 40대 중반의 비교적 젊은 역사학자이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나고 자랐으며 현재도 히브리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이스라엘인이다. 유발 하라리가 속해 있는 이스라엘, 즉 유태인 공동체는 전 세계 어느 민족보다 강대국과 제국주의로부터 피해를 많이 받았다.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디아스포라(離散), 홀로코스트, 그리고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참혹한 압제와 탄압…. 그들이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피해자 기억'은 아마도 그 공동체 구성원에게 DNA처럼 각인되어 있을 터다.
강대국 역사 문제에 예민할 법도 하지만, 유발 하라리는 "역사에 정의는 없다"고 단언한다. <사피엔스>에서 그는 "세상에는 인간의 문화에서 제국주의를 제거하고 죄에 더렵혀지지 않은 소위 순수하고 진정한 문명만을 남기자는 취지의 학파와 정치운동이 있다"며 "이런 이데올로기는 잘해봐야 순진할 따름이고, 나쁜 경우에는 노골적인 민족주의와 편견을 가리려는 표리부동한 눈속임으로 기능한다"고 쓰고 있다. 그는 인류 문화의 복잡성을 감안할 때, "어떤 학술적, 정치적 외과수술을 한다 하더라도" 제국의 유산만을 도려낼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친일파', '친일 청산'이라는 낙인의 언어
600페이지가 넘는 <사피엔스>의 방대한 내용 가운데, 유독 이 대목이 눈과 가슴에 와 닿은 것은 최근 상황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해 우리 정치지도자들에게서 '친일 잔재 청산', '친일파', '빨갱이' 같은, 1945년 해방 전후 시기라면 합당했을 정치언어들이 한 세기가 다돼가는 이 시점에서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대통령은 지난 2월, 검찰과 경찰 등 현 권력기관의 문제가 일제 식민 통치의 유산임을 강조하기 위해 "칼 찬 (일제) 순사"를 불러냈다. 대통령의 발언은 권력기관을 개혁해야 한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 믿고 싶지만, 해방 이후 74년이 지난 마당에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과거 식민지 경찰을 끌어 오는 것은 아무래도 부적절했다. 지난 70여 년 간 우리에겐 권위주의 시기도 있었지만, 민주화 된 지 30년이 넘었으며 두 차례의 민주파 정부 집권기도 있었다. 우리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우리의 문제'를 지금에 와서 친일의 유산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다.
또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을 말했다. 대통령의 언어는 맥락과 개념에서 혼란이 없도록 가능한 적확해야 할 터다. '친일 잔재'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불분명하거니와 잔재를 청산한다는 것이 현실에서 어떤 것이며 무슨 의미가 있는지 대통령은 말하지 않았다. 다만 대통령은 "친일 잔재 청산은 너무나 오래 미뤄둔 숙제"라며 "민족정기 확립은 국가의 책임이자 임무"라고 강조했고, 이어 '친일잔재 청산'이란 "친일은 반성해야 할 일이고, 독립운동은 예우 받아야 할 일이란 단순한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74년이 지난 오늘, 누가, 어떤 친일을 반성해야 할까? 거의 한 세기 전의 일에 대해 우리는 선조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라도 해야 할까? 아니면, 그 후손들에게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연좌의 책임과 반성을 요구해야 할까? 그러나 정작 기념사 어디에도 누가 친일파이고 반성의 주체인지, 친일 잔재 청산이나 민족정기확립의 구체적 내용과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볼 수 없었다.
대통령이 명시적으로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대통령이 '친일 잔재'라는 말을 통해 끌어 오고 싶은 것은 자신이 싫어하는 정치적 이견에 대한 경멸과 증오였다고 생각한다. 보수세력을 친일파의 후예이자 악으로, 그리고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 친일청산이고 적폐청산이며, 민족정기 회복이라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사회 일부에서 품어왔던 적대적 프레임이 그의 언어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다.
대통령은 "빨갱이"라는 모욕적 언어가 일제가 민족을 갈라놓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말에 공감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문 대통령이 말한 '친일파',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낙인의 언어 역시, 이견을 허용하지 않고 서로를 증오하는 정치 문화를 은연중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짜 '친일파'와 '빨갱이'가 싸웠던 해방 직후가 아니라, 오늘 21세기 우리 사회에서 말이다.
"신념정치가 열 중 아홉은 허풍선이"
대통령도 사람이고 내면화된 기질이나 편견, 혹은 민족주의적 신념을 가질 수 있다. 만약 대통령이 아니라 개인이라면 타인을 위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를 표현하는 것도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은 권력을 다루는 정치지도자이다. 대통령이 책임성의 여과 없이 자신의 민족주의적 신념과 편견을 날것 그대로 표출하고 이를 통해 동료 시민을 '친일파와 애국자' 같은 양극화된 도식으로 동원‧배제한다면 그 정치적 결과는 참혹한 내전일 뿐이다.
100년 전 막스 베버는 '세상은 어리석고 비열하며 내가 이들을 뿌리 뽑고자 한다'는 말로 내면의 신념과 편견을 거침없이 표출하는, "신념정치가 열 중 아홉은 허풍선이(Gesinnungspolitiker in 9 von 10 Fällen Windbeutel)"라고 말했다. '청산', '척결' 등을 통해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정치가는 실제로는 자신이 정작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게다. 베버의 기준에서, 친일파와 친일 잔재를 깨끗이 청산함으로써 민족정기를 확립하겠다고 말하는 문재인 대통령은 분명 자신이 하는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신념 정치가로 보일 것이다.
정치는 역사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그러나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베버가 허풍선이로 지목하지 않은 열 중 하나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신뢰의 근거는 없다. 대통령이 단순히 내지르는 것 이상으로 그 일을 책임성을 통해 진짜로 하고자 한다면 과거의 유산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단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 일의 첫걸음은 우리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는 없으며, 언제나 과거와 연결된 시민들의 협력을 통해 삶과 역사를 이어갈 수 있을 뿐이라는 것, 무엇보다 역사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해 선과 악으로 나누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미래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대통령이 인정하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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