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휴대용 서재
원톄쥔 (김진공 역) <백년의 급진>
정위안 푸 (윤지산 윤태준 역) <법가, 절대권력의 기술>
김시종 (윤여일 역) <조선과 일본에 살다>
이태진 <조선유교사회사론>
패트릭 스미스 (노시내 역) <다른 누군가의 세기>
강상중 (이경덕 역)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을 향하여>
논픽션그룹 실록 <역사논픽션 3-1운동>
권보드래 <3월 1일의 밤>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3,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오항녕 <조선의 힘>
이노우에 스스무 (이동철 등 역) <중국 출판문화사>
리쩌허우 (뤼쉬위안 편, 이유진 역) <중국철학이 등장할 때가 되었는가?>
R Silverberg, The Longest Voyage
, Cronos
, Tom O'Bedlam
E Said, Orientalism
F Bray, The Rice Economies
K Windschuttle, The Killing of History
J Gernet, (H M Wright tr) Daily Life in China on the Eve of the Mongol Invasion
Locke, Hume, Rousseau, Social Contract
R Robertson ed, Sociology of Religion
P K Dick,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 We Can Build You
K Kesey, 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
R Davies, High Spirits
W S Maugham, The Moon and Six Pence
A N Whitehead, Science and Modern World
R Harre, The Philosophies of Science
P Feyerabend, Science in a Free Society
N Campbell, What is Science?
The History of Science, Origins and Results of the Scientific Revolution, a Symposium
T Mullaney, The Chinese Typewriter
연길에 5개월 지내러 오면서 데려온 책들이다. 공항에서 나올 때 아내가 20분가량 늦어졌다. 책이 든 가방을 끌고 나오는 것을 세관에서 붙잡고 한 권 한 권 살펴보더라고.
16년 전 연길에 처음 올 때 생각이 난다. 중국의 위상 변화가 뚜렷해지는 것을 느끼며 중국에서 길게 지내볼 마음이 들었다. 베이징으로 갈까 상하이로 갈까 저울질 하던 중에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2002년 말 잠깐 와서 둘러보고는 중국 체류를 이곳에서 시작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중국 체류의 뜻은 언론인과 학술인의 입장이 겹쳐진 것이었다. 중국사를 전공으로 하면서도 중국을 방문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지낸 것은 중국에서 볼 만한 연구 성과가 별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2000년 어림부터 소장 학자들의 흥미로운 연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 신문 칼럼을 쓰면서 국제관계에 중점을 두었고, 역시 2000년 어림부터 중국의 장래 역할에 관심이 커졌다.
중국 체류 기간을 최소 3년으로 잡고 보니 가져오고 싶은 책이 많았다. 인터넷의 효용이 아직 크지 않을 때였으므로 책을 곁에 쌓아놓지 않고는 언론인 역할도 학술인 역할도 불안하기 때문이었다. 꼭 필요한 책만이 아니라 필요할지도 모르는 책까지 총동원해서 1천여 권을 화물로 부쳤다. '자유세계'에서만 살아온 나는 중국에서 서적의 통관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결국 그 책짐은 연길세관에 몇 주일 쌓여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번에 아내가 공항에서 지체된 장면에서 16년 전 일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금할 수 없다. 습관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인터넷으로 정보의 강물이 도도하게 흐르는 지금까지 여행객의 가방에 든 책을 통제하겠다고 매달려 있으니.
그 후 연변에서 3년간 지내는 동안 책에 좀 덜 의지하고 살게 되었다. 한국 다녀올 때 십여 권씩 들고 온 것이 모두 백여 권이고 이곳 서점에서는 흥미를 끄는 책을 많이 찾을 수 없었다. 이 서적 금단현상이 당시에는 무척 괴롭게 느껴졌는데, 이제 생각하면 좋은 측면이 꽤 컸던 것 같기도 하다. 70줄 들어서면서 이만한 건강을 유지하는 데도 일조가 되지 않았던지?
지난 연말 이사를 계기로 책과의 관계를 한 차례 크게 정리했다. 연변에서 귀국한 얼마 후 자리 잡아 10년 넘게 살던 전번 집은 실면적 15평을 서재로 쓸 수 있어서 마음껏 책을 쌓아놓고 지냈다. (전세금 한 번 안 올리고 그 세월을 지내게 해준 손 사장 부부에게 고마움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노년의 안정된 거처를 찾아 LH 임대주택으로 옮기며 서재 크기가 4분의 1로 줄어들게 되었다.
몇 주일 동안 책을 정리하며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제일 먼저 사전류와 고전자료 한 짐씩을 두 개 연구소로 보내면서는 해방감을 느꼈다. 언젠가 활용할 것으로 생각하고 모아둔 자료들, 내 손아귀를 벗어나 활용의 기회를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떠나면서 얼마나 행복할까? 그 해방감이 내 마음에도 투영된 것이다. 해방은 피억압자와 억압자가 함께 겪는 것임을 절감한다.
뒤이어 버릴 책을 버리는데, 일단 고서점을 불러 가져가게 했다. 책값을 바라서보다도 다른 주인 찾을 가치가 있는 책들에게 최대한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다. 그런데 출판도시의 이가고서점에서 찾아와 한 짐 꾸려가며 예상 밖의 큰 액수를 매겨주는 것이었다. 그 자세가 너무 반가워서 이사 후에도 그 집에서 반길 만한 책을 골라 한 보따리 가져갔다. 책값을 또 매겨주려 하기에 말렸다. 돈으로 더 받기는 마음이 불편하니 대신 이 집에서 욕심나는 책이 있으면 더러 가져가겠다고. 이가고서점에 넘겨준 책 중에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고서적이 많다. 내 일을 위해 필요한 책이 아니라도 기념으로 지켜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고서점의 이 선생처럼 그 가치를 나보다 잘 헤아려 잘 대접해 줄 사람이 있다면 넘겨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되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책은 이가고서점 덕분에 한 고비를 넘겼는데,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책은 아직도 숙제로 남아있다. 노환으로 쓰러지실 때 계시던 절에서 가져온 것인데, 국어학 방면은 많지 않고 불교와 영성 관계가 대부분이다. (아마 전공서적은 절에 들어가기 전에 지내시던 형네 집에 남겨두셨을 듯) 이 책들은 어머니가 노년에 관심을 기울이던 방면에 적합한 기관(절이나 연구소)이라면 하나의 유용한 '컬렉션'으로 받아줄 것 같은데 천천히 알아보려 한다.
어머니 책을 뒤져보며 자책감을 느꼈다. 그분을 알뜰하게 살펴드리는 척하면서 쓴 글을 책으로 묶어내기까지 하면서 (<아흔 개의 봄>, 서해문집 2011) 정작 그분 삶의 큰 부분을 담고 있던 책들은 서재 구석에 쌓아둔 채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 스스로 한심스러웠다. 근년 관심을 모아 온 주제 '소유'에 관한 생각도 뒤따른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았으니 내 '소유'로 여기고 그 책에 대한 내 권리만 생각할 뿐 아무런 의무감도 느끼지 않고 지내다니, 이 얼마나 '근대인'스러운 놈인가!
책 정리 과정에서 뜻밖의 소득 하나는 학교 떠난 후 근 30년 만에 제자 하나를 얻은 것이다. 제자로 여기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내 생각의 한 토막이라도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주는 분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제자로 여긴다. 그러나 '기명(記名)' 제자라 할 만큼 관계를 분명히 할 사람은 없었다.
고교 시절 S. 모옴과 G. B. 쇼 작품에 맛을 들인 이래 문학작품을 영문으로 감상하는 취미를 갖고 책을 꽤 모아 왔다. 실버버그와 P. K. 딕의 책은 이번에도 몇 권 가져왔다. 그런데 근년 각별히 공들여 모아놓은 R. 데이비스와 K. 보네거트의 책은 누구든 관심 가진 이에게 몽땅 넘겨주고 싶어서 블로그에 그 뜻을 적어놓았다. 이것을 보고 30세 청년 조마우로 군이 메일을 보내왔고, 몇 차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사제관계로 야합을 맺게 되었다.
"야합"이라 함은 의지하는 제도적 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제" 관계를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이수과목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과목이 "신영복 번역"이다. 2년 전부터 짤막한 신 선생 글을 매주 한 꼭지씩 영어로 번역해 왔는데, 내 손으로 책 한 권이라도 완성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다음 세대에는 우리보다 번역에 좋은 역량을 가진 인재들이 많은데, 그들에게 이런 좋은 번역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을 내 역할로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에 조 군이 걸려든 것이다.
조 군이 내게 배우고자 하는 것이 "신영복 번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내가 그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 역시 그렇다. 그러나 그 과목에는 많은 것이 투영될 수 있다. 마침 조 군이 그 과목에 적합한 기능적 특성을 잘 갖추고 있기에 내가 바라는 모습의 학인(學人)으로 그를 키우는 데 그 과목을 활용하려 한다. 사단법인 더불어숲 소식지에 싣는 번역을 몇 달 동안 조 군과 함께 해왔는데, 이제 번역자 표시를 "tr. by Orun Kim"에서 "tr. by Orun Kim & Mauro Cho"로 바꾸려 한다.
블로그에 "퇴각일기"란 카테고리를 만들어놓고 간간이 글을 올려 온 지 2년이 되어 간다. 앞으로 할 일이 지금까지 한 일보다 적을 것을 생각하며, 이제 새로운 일을 향해 진격해 나가는 자세를 거두고 이미 벌여놓은 일을 마무리하는 데 애써야겠다는 깨달음에서 시작한 일이다.
그런 자세로 생각을 적으며 지내다 보니 퇴각으로의 전환 필요성이 갈수록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물러설 자리에 이르렀으면 서슴없이 물러서야 한다. 관성에 떠밀려 억지로 버티다가는 패망을 피할 수 없다. 물러서면서 수습을 잘해야 이 삶에서 뭐든 제대로 남길 수 있다. 내 손으로 이루는 것에 한계가 있더라도 내 뜻을 뒤에 남겨 다른 이들 손으로 이뤄질 것을 기약할 수 있다.
얼마 전부터 퇴각일기를 더 공들여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에 주변의 권유로 다른 신문에 연재를 시작한 일이 있다. 그러나 몇 차례 올리다 보니, 내밀한 생각을 솔직하게 적는 글을 낯선 곳에 올리기가 불편하게 느껴져 바로 그만뒀다. 창간 때부터 꾸준히 글을 올려 온 프레시안이 그리워 다시 문을 두드렸고, 이곳 여러분들이 이 자리를 마련해 준 데 감사드린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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