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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5·18망언 처벌법을 찬성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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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나는 왜 5·18망언 처벌법을 찬성하는가?

[기고] <경향> "정치탄압의 위험한 전유" 칼럼에 대한 반론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특히 제7조의 이적표현죄는 표현의 자유를 정면에서 침해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우선해서 폐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최근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킨 5·18망언은 이를 처벌하는 법률을 만들어서라도 금지시켜야 한다. 그것은 표현이 아니라 폭력이며, 의견이 아니라 선동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런 이율배반의 명제를 다룬다. 물론 그 형식은 이준웅 교수의 "정치탄압의 위험한 전유"라는 경향신문의 칼럼(2019년 2월 24일자)에 대한 반론의 틀을 취한다. (☞바로 가기)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표현을 국가가 금지할 수는 없으며 그 타산지석의 예를 폴란드의 홀로코스트부정금지법에서 찾으며 의견은 어떤 경우에도 처벌할 수 없다는 "국제인권위원회"의 입장변화는 그 전범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일면 타당성을 가지지만 그럼에도 잘못된 참조와 함께 우리의 국법체계와의 부조화문제를 놓쳐버린 한계를 가진다. 물론 이 글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려 한다. 우리가 말하는 인권이라는 것이 왜 북한군의 침투라는 발언에만 적용되어 국가법이 보호하고, 죽음만큼 깊은 트라우마에 고통받는 현대사의 희생자, 유족, 관련자 혹은 "호남인들"의 목소리들은 인권의 보호대상 바깥에 놓여야 하는지도 더불어 검토하게 될 것이다.

기억은 누가 전유하는가?

이준웅 교수는 모든 권력은 역사적 사실을 정치적으로 '전유'하고자 한다는 말로 5·18망언처벌법의 위험성을 거론한다. 이렇게 한번 기억이 전유되고 나면 나중의 정권에서 천안함 폭침의 진실 혹은 대한항공기 폭발이나 6·25에 관한 기억조차도 정치적 탄압의 매개로 동원되기 십상인 위험이 야기된다고 한다. 맞다. 기억은 정치의 가장 주요한 대상이다. 권위의 획득을 위해 경쟁하는 것이 정치라고 한다면 기억은 모든 정치투쟁의 중심에 차지하며 모든 기억은 그대로 정치의 장에 편입되기 마련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억은 가장 중요한 정치의 소재가 되는 것이다. 승자는 언제나 자신의 기억을 정사라고 하며, 패자는 승자의 기억을 지워가며 후일의 전투를 위하여 자신들만의 투쟁기록을 남겨놓고자 애를 쓴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은 정치의 한 복판에 자리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 때문에 5·18망언처벌법을 제정해서는 아니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 중요한 점은 다른 곳에 있다. 그 기억을 누가 어떻게 형성하며 또 어떤 모습으로 보전하고자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준웅 교수의 칼럼이 가지는 문제지점은 기억을 전유하는 주체에 관한 서술이다. 그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천안함 폭침이나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 혹은 6·25전쟁의 사례에 대비시킨다. 역사적 사실 혹은 그에 대한 기억의 정치가 오도될 수 있는 사례이자 기억의 전유가 수시로 발생해 왔던 우리 현대사의 아픔들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유추는 올바른가?

기억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무엇을 기억하는가이며 그 중에서도 기억의 주체가 누구냐라는 것이다. 이준웅 교수가 대비시킨 사건들은 하나같이 그 역사적 구성의 주체 혹은 기억의 주체가 다름 아닌 국가 그 자체이다. 우리는 6·25전쟁의 실태를 국가가 검열하는 역사교과서의 전쟁기념관에서 목도하며, 천안함 폭침은 국가와 국군이 구성하고 주도한 진상조사단의 보고서에 기초한 것이다. 대한항공기 폭파는 안기부의 조사를 거쳐 나온 김현희의 발언이 '역사적 진실'이다. 국가의 입에 의해 확정되고 국가의 권위에 의해 확산되는 역사적 진실-보다 정확히는 '국가적' 진실-인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비판, 혹은 다른 역사의 제시는 국가의 대당점에 있는 우리 시민들의 엄연한 권리에 속한다. 물론 잘못 말했다간 국가보안법 위반죄 혹은 인사청문회에서 집중포격을 받으며 공직후보를 사퇴하여야 하는 참상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것은 민주사회에서 국가의 권위와 국가의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우리 시민들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 검증하고 비판하고 논평할 자유의 핵심영역에 속한 것임은 너무도 분명하다.


하지만 5·18의 진실은 전혀 다른 경로를 거친다. 그것은 이준웅 교수가 중시하는 "강한 민주정"의 대표사례이다. 폭도들의 집합범죄 내지는 내란행위라는 국가의 공식 기억에 항거하여 그 피해자들이, 관련자들이 혹은 우리 국민 모두가 피와 땀으로써 밝혀낸 진실들이다. 실제 전일빌딩에서 발견한 탄흔들을 바탕으로 지금까지도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부인되고 있는 헬기의 기총사격 여부를 다시 조사하여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주체 역시 광주시민이요 우리 국민들이다. 5·18의 진실은 국가의 진실이 아니라 우리 시민의, 국민의 진실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또 다른 보호의 가치를 부여받는다. 권력을 획득하여 다른 누군가를 탄압하기 위하여 떠올려진 기억이 아니라, 권력의 억압에 시달렸고 그 폭력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밝혀진 저항의 기억이고 회복과 치유의 기억이며 민주와 평화를 위한 기억이다.


5·18의 기억은, "강한 민주정"의 자기지배가 실천되는 시공간이다. 5·18의 기억들은 민중들 혹은 데모스로서의 시민들이 피와 눈물의 투쟁을 거치며 발굴하고 증명하며 서로 공유함으로써 형성된 우리 모두의 공동의 기억이다. 마치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의 증언이, 위안부들의 증언들이 폭력의 역사, 반인도적 통치의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듯, 이 5·18의 진실을 문자 그대로 치열한 기억의 정치를 통하여 회고되고 규명되고 또 증명되어 우리 모두의 것으로 정립된 것이다.

요컨대 그 기억은 그 어떤 정당화 기제를 동원하더라도 혹은 그 어떤 수사를 동원하더라도 천안함의 "폭침"이라는 국가적 기억이나 북한간첩 김현희라는 비밀정보요원이 제시한 대한항공기 폭파에 대한 기억과 같은 것들이 도저히 가닿지 못하는 기억이다. 그래서 이준웅 교수의 걱정은 실천적인 의미를 결한다. 그것은 강하든 약하든 인권침해·반인도적 만행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불가양의 권리를 가지는 우리 시민이 주권을 가지는 "민주정" 하에서는 전혀 유비될 수 없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며 따라서 서로 다른 규범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기억의 주체가 우리 모두임은 의연히 현실이기에, 과거 권위주의 체제에서처럼 정치권력이 기억을 전유해 왔던 그 억압의 정치를 현재에 복원시키는 것은 결코 타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별가능성이 없다.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사태라든가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정치권력이 구사하는 기억의 정치는 역사적 사실을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것으로 가공하여 모든 국민들의 머릿속에 주입시키고자 하였지만, 결국은 촛불의 함성에 내몰리고 말았던 것이다.

왜 규제하여야 하는가?

천안함 침몰이나 대한항공기 폭파에 관한 국가의 공인 기억과는 달리 5·18의 기억은 그래서 별도의 보전가치를 가진다. 민주사회에서 전자는 국가가 가공하여 전유하는 기억으로 그에 대한 시민의 도전-즉, 대항기억-이 당연히 예정된 기억이다. 반면 최근 5·18망언들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는 시민들이 힘들게 발견하고 공유하는 기억을 수호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이 점에서 이준웅 교수가 5·18에 대하여 "전유"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적어도 현실 수준에서는 상당한 한계를 가진다. 수많은 지적과 반박, 분노와 응징의 열정들은 5·18에 관한 기억을 전유하고자 하는 의지에서가 아니라, 극우적 망언으로부터 혹은 그러한 망언에 기대어 과거의 영광을 다시금 되내어보려는 보수적 정치집단-정확히 말하자면 자유한국당의 일부-으로부터 5·18의 진실을 보호하고 수호하여야 한다는 처절한 함성에서 비롯한다. 그동안 무수히 왜곡해 왔으며, 틈만 있으면 공격하였고 기회만 있으면 폄하해 왔던 바로 그 세력으로부터 자신들, 자기 가족·친지들, 그리고 동료시민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의미를 온전히 지켜내고자 하는 바로 그 절규가 이 5·18망언의 대척점에 자리하는 것이다. 그러니 슬픈 역사를 떠올리며 차마 애도하며 떠나보내지 못하여 우울증에 빠지는 바로 이 통곡의 벽 앞에서 천안함과 대한항공과 6·25의 국가적 기억을 유비시키느니, 차라리 민주주의 그 자체의 중우(衆愚)화 가능성을 걱정하며 새로운 철인정치 혹은 또 다른 지도자정치를 추구함이 보다 타당한 논법일 것이다.

5·18망언처벌법은 최선의 방안이기 때문에 유효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을 조금이나마 바꾸어보자는 차악의 몸부림이기에 유효하다. 물론 그것이 가지는 남용의 가능성은 아무리 지적되어도 모자라지 않으며, 이를 방비하기 위해 아주 촘촘하게 짜여진 입법의 그물망이 정비되어야 하며, 이 법의 지향과 목적에 대한 시민사회적 합의-이것은 법남용을 차단하는 최후의 방책이 된다-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런 노력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우리 사회의 정치지형을 고려할 때 이 법의 제정은 불가피하다. 5·18망언은 다른 역사적 사건에 대한 왜곡이나 비방의 경우와는 다른, 한국현대사 특유의 억압-즉, 지역주의와 반공주의-이 중첩되기 때문이다. 보라. 우리 현대사는 수많은 사건, 사태들로 점철된다. 하지만 유독 지역주의와 반공주의 혹은 빨갱이 담론이 동시에 작동하는 것은 5·18이 유일하다. 4·19가 있었고, 6·3이 있었고 부마항쟁이나 6월항쟁도 있었으며, 최근에는 수차에 걸친 촛불시위와 용산사태와 강정기지와 밀양송전탑과 사드배치와 평택미군기지이전 등과 관련한 사건들이 속출하였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홍어"와 "북한군"이 한꺼번에 거론된 사례는 없다. 그 모든 사건도 권위주의 군사정권이 민심을 호도하고 정국을 장악하기 위하여 상용하던 지역주의와 반공주의가 동시에 작동하지는 않았다. 그 사건들이 종료된 이후에도 그러한 혐의나 음모, 왜곡·비방은 없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5·18에 대해서만큼은 내란음모라는 단죄와 함께 해방 이후 혹은 멀게는 동학 이후부터 딸려져 왔던 "호남"이라는 꼬리표가 두드러지게 언급되고 여기에 간첩이나 북한군이니 하는 일련의 음모론이 겹쳐진다.

심지어 제주 4·3항쟁조차도 지역주의는 그리 작동하지 않았다. 그 또한 "빨갱이들이 일으킨 폭동"이라는 규정이 지금까지도 지속되지만, 이 부분의 과거사는 5·18과는 다른 정치적 함의를 가진다. 4·3의 경우에는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을 이루는 권력집단들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직접적인 죄의식으로부터는 단절되거나 소격되어 있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다. 반면 5·18의 경우에는 신군부에서 민정당을 거쳐 지금의 자유한국당에 이르는, 보수적인 정치세력의 주력이 이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가진다. 5·18은 현재의 우리 정치에서 보수세력를 구성하는 정치집단의 탄생배경이자 존재기반인 것이다. 그들은 5·18을 배경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가 마련한 정치자원들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5·18로 대변되는 자유주의적 정치세력 혹은 진보적 정치세력과 대척지점에 자리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보수세력과 정치·경제적으로 이해를 같이 하는 우리나라 주류세력들의 의식구조 또한 이들과 궤를 같이 한다.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기독교근본주의라든가 여전히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보수언론, 재벌·대기업 및 그 주변의 경제적 기득권자들은 이 집단의 중심부를 구성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5·18이 호명되고 5·18망언이 동원되는 기제가 구성된다. 그들은 5·18의 진실이 규명되는 것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잠식당하는 것으로, 그리고 5·18을 공격하는 것은 지금의 여당 혹은 자유주의세력이나 진보세력에 대적하는 행위로 인식하게 된다.

5·18망언이 단순한 가짜뉴스나 모욕의 차원을 넘어 가장 적나라한 정치행위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보수세력들이 자기 권력의 부정한 원천을 세탁하거나 희석시키는 방법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지지자들을 결집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보전하기 위한 수단이다. 너무도 명백한 거짓인 북한군침투설조차도 그들은 태극기부대를 동원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며, 이를 다시 국회의 장으로 옮겨가 5·18진상조사특별법에 북한군 침투여부를 조사하는 직무를 삽입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5·18진상조사를 방해하는 한편, 5·18의 역사적 의미를 물타기하는 또 다른 음모를 진행한다.

5·18망언은 이런 맥락에서 극적인 권력성을 가진다. 그것은 단순히 5·18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재생하거나 확장한다는 의미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 강력한 정치행위로서의 권력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5·18망언들은 그것을 옹호하거나 비호하는 한국의 주류지배세력의 위력을 등에 업고 이루어진다. 그것은 태극기부대를 선동하는 수단으로 동원되며, 원내 제1야당 국회의원들의 입을 통하여 공식적인 정치의제로 설정되며, 대부분의 경우 보수언론의 기사를 타고 5·18의 역사적 가치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기획되며, 교회와 같은 종교단체의 집회들을 통해 확산된다. 이 과정에서 그 망언들이 허위라는 판정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오로지 5·18에 대한 대중들의 인상을 훼손하고 그와 연관되어 있던 자유주의자 혹은 진보세력에 대한 일반적인 신뢰만 손상시키면 충분하다. 혹은 그러한 망언을 타고 세간에 이런저런 반대의견 혹은 반대세력이 존재한다는 인상만 형성하더라도 그들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다.

5·18망언이 거짓됨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여론조작, 아젠다왜곡이 가능한 것은 그것이 다름 아닌 지역주의와 반공주의라는 해묵은 지배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망언들의 폭력성은 여기서 구체화된다. 해방 이후 최대의 정치폭력이었던 반공주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최고의 지배담론이었으며, 권위주의 군사정권 이래 구성되어 왔던 지역주의는 이와 함께 혹은 이를 증폭하는 또 다른 지배담론이었다. 그리고 그 중첩된 희생자였던 호남지역인들은 이제 그것이 덧씌워지는 5·18의 트라우마까지 감당하여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홍어"와 "북한군"의 두 단어는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폭력으로 인하여 아직도 극복되지 못한 5·18의 트라우마가 다시금 증폭된다. 마치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이 그 거짓된 발언들로 인하여 위선적인 거짓말쟁이라는 죄의식을 갖게 되고 그들의 희생에 관한 이야기들은 근거 없는 믿음에 불과해지며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한 가스실은 "마법의(magic)" 어떤 것이 되어 버리는" 상황이 여기서 재현된다. 5·18관련자들이 국가폭력 앞에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였다는 그 자부심 자체가 이렇게 위선자, 헌신이나 희생이 아닌 죄값 치루기, 항쟁이 아니라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 등의 자기부정으로 치닫는 집단심리를 야기하게끔 사실을 조작하고 퍼뜨리고 정치의제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포리송(Faurisson) 결정이 그러하였듯이 그것은 "반 유대주의적 감정을 형성하고 강화시키며, 유대인 공동체가 반 유대주의적인 분위기가 야기하는 공포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폭력이 여기서 작동한다.

결국 이 5·18망언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도전의 수준을 훨씬 초과한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의 노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5·18관련자들의 삶과 자기정체성 자체를 공격한다. 5·18관련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관련자임을 부정하거나 밝히기 주저하게 만드는 것 나아가 그들이 그토록 저항했던 국가폭력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 그 자체를 침탈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이 망언의 불법성이자 반인도적 성격이다. 더 따질 것도 없이 이 망언은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피해자가 존재하는 발언이다. 여기에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혹은 인격주의적 공동체주의 등등의 논의를 할 필요도 없다. 적어도 미국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표현의 자유 법리에 의거한다 할지라도 해악의 원리(harm principle)에 따라 그러한 망언을 규제하고 이를 통해 권리의 침해를 당하는 5·18관련자들의 존엄과 인격을 보호하는 국가적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처벌법은 위헌 아닌가?

이 지점에서 이준웅 교수가 "새로운 종류의 정치적 자살골인지, 아니면 뭐든지 처벌해야 속이 편하겠다는 심성에서 비롯한 것인지 모르겠지만"이라 한 것은 표현의 기교를 넘어 과잉이다. 그의 걱정은 "역사상 최악의 사태는 역사적 사실을 정치적 탄압의 도구로 전유할 때 발생한다"는 점이겠지만, 그 문제는 민주주의의 구조화 내지는 "강한 민주정"의 실천으로 처리할 일이지 민주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며 적지 않은 피해자를 양산하는 5·18망언을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법으로서는 상당히 부족한 주장이다. 더구나 그의 걱정은 외국사례에 대한 적확한 이해가 수반된다면 상당부분 극복될 수도 있을 듯 하다.


우선 비슷한 구조를 가지는 홀로코스트 부정에 대한 처벌의 예를 들어보자. 유럽의 경우 홀로코스트의 피해를 경험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발언이나 선동적인 혐오발언을 처벌하는 법률을 가지고 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는 과거사청산이라는 차원에서 당연히 그리 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경우에는 라이시떼 정책에서 보듯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은 너무도 엄격하다. 물론 영미나 북구의 경우에는 이런 법제가 없지만 이는 차원을 달리한다. 영미의 경우에는 전쟁당사자였지만 홀로코스트의 직접적인 피해 혹은 그 영향권에 존재하지 않았고,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의 법원리 자체가 이런 식의 국가적 규제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또한 북구의 경우에는 아예 법치의 개념이 우리와는 다르다. 그들의 경우 법의 지배보다는 교육과 합의와 통합의 원리가 더 강하게 작용한다. 법에 대한 수요가 강고하지 않은 것이다.

요컨대 유럽의 경우 나치군의 점령을 당하거나 그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 있어 홀로코스트의 피해를 경험한 국가에서는 하나같이 법률로써 그를 부정하는 발언을 처벌한다. 물론 EU 또한 그 지침에서 이를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국가의 법제를 두고 "정치적 자살골"이거나 "뭐든지 처벌해야 속이 편하겠다"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 국가에서는 이러한 처벌법의 존재야 말로 아리안이든 유대인이든 관계 없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사회로 통합되고 그 속에서 평화롭게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여건을 조성하는 토대가 된다고 인식한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있고 마음대로 발언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된다 하더라도 이렇게 반인도적이고 폭력적인 과거사를 맘대로 규정하는 것은 '도덕의 입법자로서의 인격'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 본다. 소위 "인격주의"의 법원리가 여기서 작동하는 것이다.

5·18망언처벌법이 타당할 수 있는 규범적 근거는 바로 이 "인격주의"다. 우리 헌법은 홀로코스트부정행위를 처벌하는 유럽과 마찬가지로 인격주의에 터잡아 구성된다. 헌법재판소는 우리 헌법이 예정하는 인간이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사회관을 바탕으로 사회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생활을 자신의 책임 아래 스스로 결정하고 형성하는 성숙한 민주시민"이며, 이러한 인간은 "사회와 고립된 주관적 개인이나 공동체의 단순한 구성분자가 아니"다. 로크식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라든지 혹은 나치식의 전체주의는 우리 헌법이 취할 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 헌법의 인간은 "공동체에 관련되고 공동체에 구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로 인하여 자신의 고유가치를 훼손당하지 아니하고 개인과 공동체의 상호연관 속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인격체"로 규정된다. 자기지배의 틀에 따라 스스로의 생활을 주체적으로 운영해 나가되, 공동체의 일반적 가치 혹은 공동선에 맞추어 자신의 생활원리을 구성하고 이에 따라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조정하고 통제하는 인간이 우리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인간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법체계는 이런 인간상에 따라 구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준웅 교수가 생각하는 표현의 자유는 미국식의 개인주의에 터 잡아 그 무한한 보장을 전제로 한다. 국가는 매우 한정된 사유(예컨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가 있는 경우에만 이를 규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표현의 자유를 무한대로 보장하기 위하여 음란물이나 타인의 권리를 훼손하는 발언 같은 것들은 아예 수정헌법 제1조 즉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헌법조항의 보호대상이 아니라고 제쳐버린다. 보기 나름으로는 All or Nothing방식의 틀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헌법은 그렇지 아니하다. 미국과는 달리 우리 헌법은 모든 표현을 헌법 제21조 제1항에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범주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는 헌법 제21조 제4항(타인의 명예·권리, 공중도덕, 사회윤리 침해금지)이나 헌법 제37조 제2항(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안보, 질서, 복리를 위하여 법률로써 제한가능함)에 의거하여 다른 사람의 권리나 공공의 이익과 이 표현의 자유를 조정하고 조율하는 방식을 취한다.

바로 이 점이 미국의 법리와 우리의 법리가 다른 지점이다. 미국에서는 거의 절대적으로 보호되는 표현의 자유(사실 미국도 표현의 자유를 이렇게 강력하게 보장한 것은 불과 반세기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위세 높던 매카시즘을 생각해보라)가, 우리 헌법체제하에서는 경우에 따라 축소되고 제한되며 또 다른 이익에 그 행사를 양보하여야 하는 '보다 덜' 우선적인 기본권이 되어 있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우리 헌법은 표현의 자유를 다른 중차대한 이익과 이익형량 내지는 조화적 해석이 요구되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이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이 제정된다고 해서 그것을 "정치적 자살골"이나 "뭐든지 처벌해야 속이 편하겠다"는 식의 비아냥은 하지 않으며, 그렇게 하여서도 아니된다.

그래도 우리 헌법상 의견표현의 자유만큼은 보장되어야 하는 건 아닌가?


맞다. 의견표현의 자유는 우리의 경우에도 최우선적으로 그리고 최대한의 수준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글쓴이가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부정처벌법이나 5·18망언처벌법은 이런 논의의 바깥에 있다. 그것은 국가보안법처럼 자유로운 의견의 표명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종류의 사실주장이 야기하는 위험들-타인의 권리 침해, 공공의 평온 침해, 사회통합 저해 등-을 예방하기 위한 처벌법인 것이다.

이준웅 교수는 이 처벌법들이 의견을 처벌하는 것이어서 "정치적 자살골"이 된다고 하면서 그 근거 중의 하나로 "국제인권위원회"가 2011년의 표현의 자유에 관한 논평을 통하여 1996년의 포리송(Faurisson v. France) 결정을 실질적으로 번복한 것을 들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국제인권이사회"는 과거의 결정을 번복한 적이 없다.

2011년의 논평은 제49절에서 의견의 자유는 민주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요소이기 때문에 기억법(memory laws)에 의해서라도 의견을 제한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저 포리송(Faurisson) 결정 또한 의견을 제한하거나 처벌하는 것을 허용한 결정이 아니다. 그 결정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한 전 소르본느대 교수를 처벌한 프랑스정부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그의 표현행위가 유대인들 혹은 유대인 공동체의 명예를 훼손하였고 이런 경우에는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 제19조 제3항에 의하여 얼마든지 규제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처벌의 대상이 된 발언을 보자. "나는 유대인 말살 정책 혹은 마법의(magic) 가스실 정책을 믿지 않을 탁월한 근거(excellent reasons)를 가지고 있다... 나는 프랑스 시민의 100퍼센트가 가스실이라는 신화(myth)가 부정직한 허구(dishonest fabrication)라는 점을 알아차리기를 기대한다." 여기서 "마법"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꾸미는 것을 말하며, "신화"는 맹신이나 무지의 결과로 유지되는 믿음을 의미한다.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라는 사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일관한다. 그것은 의견이 아니라 사실의 부정, 즉 또 다른 사실명제일 따름이다. 요컨대, 저 사건에서 프랑스는 의견을 처벌한 적이 없다. 의견의 형식으로 피고인이 다른 사람-유대인 혹은 유대인공동체-의 권리를 침해한 행위를 처벌한 것이다.


실제 프랑스에서 신문자유법에 홀로코스트부정처벌조항-일명 게소법(Gayssot Law)-을 만들어 삽입한 이유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발언들이 금지사항이 되자 일부 극우세력들이 학자나 연구자의 외관을 쓰고 역사학 등의 학술연구의 결과라는 형식으로 가스실의 존재나 유대인에 대한 인종말살 등을 부정하고 나섰던 데에 있다. 물론 포리송(Faurisson) 결정에서 두 명의 보충의견(E. Evatt, D, Kretzmer. E. Klein은 별도 의견진술 없이 이 보충의견에 동조함)은 이 게소법 자체가 비례의 원칙을 위반하는 등 위헌의 소지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가 게소법에 따라 포리송(Faurisson)을 처벌한 것이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 제19조를 위반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요컨대 이준웅 교수는 "국제인권위원회는 1996년 나치의 유대인 학살 부정을 처벌한 프랑스의 결정이 인권규약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판단했지만, 2011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의견표명을 처벌하는 법은 인권규약이 부과하는 의무와 양립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전향적으로 발표했다. 늦었지만 현명한 결정이라 하겠다."고 하지만, 이 "국제인권위원회"는 1996년이나 2011년이나 일관되게 의견은 처벌할 수 없다는 기본원칙을 준수함에는 변함이 없다.

역사상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지 않겠는가?

이준웅 교수는 "역사상 최악의 사태는 역사적 사실을 정치적 탄압의 도구로 전유할 때 발생한다"고 하면서 그 사례로 폴란드의 홀로코스트부정방지법을 든다. 하지만, 폴란드의 그것은 기억의 정치라기보다는 현재의 정치를 기억의 틀로 포장함에 불과하기에 그리고 그것도 '미수'에 그쳤기에, 기억법의 남용사례로서는 그리 적절하지 않다.


폴란드는 2018년초 "누구든지 공연히 사실에 반하여 폴란드민족 또는 폴란드국가(the Polish nation, or the Polish state)가 독일 제3제국이 자행한 나치범죄에 책임이 있다거나 그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를 제기한(accuse) 자는 벌금형 또는 3년 이하의 구금형에 처한다"라는 법을 제정하였다가(물론 예술적·학술적 활동의 과정에서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은 면책된다) 그에 대한 비판여론-특히 미국과 이스라엘의 비판-이 드높아지자 5개월 후 이를 개정하여 형사책임부분을 삭제하고 민사적인 규율로 전환하였다. 물론 그 개정의 가장 큰 이유는 내부적 비판이 아니라 미국과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손상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

실제 이 폴란드의 처벌법은 남용의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 법이 추구하는 것은 홀로코스트라는 반인도주의적 만행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악행에 폴란드라는 국가가 혹은 폴란드의 국민이 관여하였다는 표현을 규제하는 것 뿐이다. 즉 홀로코스트가 없었다라는 주장을 처벌하기 보다는(이는 현행법의 규정에 있다.), 그 인류적 범죄인 홀로코스트로써 폴란드라는 국가의 명예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방지함에 있다. 그래서 이런 법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의 기억법(memory law)에 해당되겠지만 그 실질에 있어서는 과거 권위주의 시절 우리 형법에 자리했던 국가모독죄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실제, 보도에 의하면 이 법이 가장 신경을 쓴 표현은 "the polish death camp(폴란드의 죽음의 수용소)"였다고 한다. 폴란드가 나치와 소련에 의하여 점령당한 시기 동안 폴란드인은 300만명의 유대인을 포함하여 500만명이 살해 당하였는데, 그리고 이 시기동안 폴란드는 독일에 점령되어 국가적 정체성 자체가 사라져버리고 없었는데 아직도 그 학살의 서사는 폴란드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이 이 법의 교정대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를 두고 "역사적 사실을 정치적 탄압의 도구로 전유"한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어폐가 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 그 자체를 전유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죄악의 역사적 사실로 인하여 폴란드라는 현재의 국민적 정체성이 훼손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이 폴란드 법안은 홀로코스트부정처벌법이 아니다. 오히려 홀로코스트의 죄악을 널리 인정하면서 폴란드라는 국가 그 자체는 결코 이 반인도적, 반인류적 참상의 공범이 아니며 또 그리 여겨져서는 아니됨을 선언한 매우 단선적인 법안이다. 또는 이 과정을 지배하였던 폴란드 집권극우파들의 극단적 국가중심주의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5·18망언처벌법에 비유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국가모독죄를 폐지하면서 혹은 국기에 대한 맹세와 같은 극우적 상징과 의례에 대한 반발 등을 통하여 이런 법동원의 방식을 극복한 바 있다.

사실 모든 법은 오남용의 가능성을 가진다. 처벌법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기에 죄형법정주의는 법의 자의적 해석을 막기 위해 명확성의 원칙을 최우선에 둔다. 더욱이 기억에 입각하여 재구성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은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저 프랑스의 게소법조차도 위헌의 가능성이 있느냐의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을 보면, 그리고 포리송(Faurisson) 사건에서 이런 위헌의 여지를 법원의 판단과정에서 얼마나 해소되었는가가 검토대상이 되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명확히 할 부분이 있다. 5·18의 진실이나 그 처벌법의 논의가 누구에 의해서 "전유"되고 있는가? 폴란드의 처법법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국가·민족정체성을 유지하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그러한 법이 우파 정권의 독단에 의하여 추진되었다는 데에 있다. 기억법이든 국가명예법이든 그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이 시민적 통제 바깥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오남용된다. 입법과 집행의 민주화는 이 지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우리의 현대사는 이런 민주화를 위한 피와 땀의 역사였다.

이런 맥락에서 이준웅 교수의 저 명제는 잘못되었다. 그것은 잘못된 예시에 의해 잘못된 오해를 야기하며, 전유될 수 없는 것을 전유할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혼동을 야기한다. 입법은 국가의 전유물이며 시민사회의 통제권 바깥에서 행사되고 또 집행된다는 권위주의적 국가중심주의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형사처벌인가?

정말 의미심장한 질문이다. 헌법의 원칙을 들 것도 없이, 형사처벌은 개개인의 삶에 대한 국가폭력을 그대로 남아낸다는 점에서 민주사회에서는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더구나 역사적 기억에 관한 진술을 그 처벌의 대상으로 삼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기억의 정치가 현재의 권력구조를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자의적으로 행사될 경우 우리들의 머릿속을 통제할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민주적 기본질서 그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부정 행위나 5·18망언의 경우 이미 이러한 논의는 이준웅 교수가 제시하는 관용의 수준을 넘어서 버렸다. 이준웅 교수에 따르면 "다원적 가치를 신봉하는 시민들이 공존하는 가운데 발언의 자유를 통해 서로 관용을 극한까지 시험할 수밖에 없다"는 불린저의 관찰을 배경으로 "강건한 민주정의 관점에서 발언의 자유의 현실적 조건을 검토"해야 한다고 하면서 "시민적 관용을 함양"하기를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5·18망언은 민주정을 유지하고 강건하게 만드는 관용을 포함한 시민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비용 정도의 수준에서 규정된다. 이런 주장은 원론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이 옳다. 하지만, 그런 관용으로부터 시민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이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실질은 맹목에 가까울 정도로 공허하다. "관대함의 문화"는 중요하지만 그것은 그 어떤 주장도 거침없이 횡행하도록 방치하겠다는 무책임함의 수사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완전히 무가치하고 불쾌한 표현이라도 허용하자는 논의가 허구적인 사실조작에 의한 집단적 권리침해까지도 방치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져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혹은 그러한 침해적 표현을 사회·문화적으로 순치하여 그 해악을 제거하기 위한 제반의 제도적·관행적·문화적 틀을 마련하고 모색하여야 할 국가의 의무 또는 시민사회의 의무까지 방치하여서는 아니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5·18망언은 5·18 피해자, 관련자 뿐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의 권리를 침해한다. 1996년의 루이 주아네 유엔인권특별보좌관은 '인권침해자의 불처벌에 대한 투쟁을 통해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하기 위한 일련의 원칙"이라는 50개 항목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이에 의하면 과거사에 대하여 그 국민들은 크게 진실을 알 권리와 정의를 실현할 권리, 피해자 배상권 등 세 가지의 권리를 가진다.

진실에 대한 불가양의 권리(원칙1), 기억할 의무(원칙2), 그리고 이런 알 권리를 실효성있게 확보하기 위하여 국가가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야 할 의무(원칙4), 그리고 사법적 처리에 관한 요구(제4장) 등은 그 세목이다. 여기서 국가의 조치는 "역사적 사건이 잊혀지는 것으로부터 집단적인 기억을 보전할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하며, 특히 수정주의적 입장 및 소극적인 입장을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한걸음 나아가 적극적으로 보호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한다.(원칙2)

이 보고서가 이준웅 교수가 말하는 관용의 원칙이나 "강한 민주정"의 요청을 몰라서 이런 원칙들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관용에도 불구하고 혹은 민주정의 구성원리에도 불구하고 불관용되어야 할 대상이 존재함을 인정한 것이며, 바로 그러한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이 제대로 자리할 때 진정한 민주사회-우리 헌법재판소는 이를 "입헌적 민주주의"로 표현한다-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5·18을 향한 우리 국민의 권리는 이 점에서 새로운 기반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진실을 알고 정보를 요구하고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집단적·정치적 권리로서의 권리, 민주시민으로서의 역량을 확보하고 발현해 나갈 수 있는 권리가 바로 여기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주어진" 천부의 인권뿐 아니라 우리가 주체가 되어 스스로를 만들어나가는 혹은 스스로의 삶을 일구어나가는 집단적·집합적 권리이자 윤리로서의 인권 말이다.

실제 5·18망언은 그것이 그냥 하나의 정치적 의견 혹은 자기실현의 발화 수준에서만 제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정치화하여 하나의 뚜렷한 정치세력이 되어 있거나 혹은 그러한 표현을 계기로 스스로의 권력를 확장하거나 공고히 하기를 바라는 정치집단이 우리 사회의 민주적 역량을 잠식하고 시민사회를 탈정치화하는, 일종의 우파 포퓰리즘의 한 전술로서 동원되고 있다. 그것은 시민사회내의 한 발언이 아니라, 이미 정치화하여 권력성을 확보한 일종의 집단적 위력이다. 진실에 대한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폭력인 동시에 5·18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집단들을 타자화하여 억압하고 배제하는 또 다른 통치술로서 작동한다.

물론 교육과 토론에 의한 혹은 사상의 자유시장에 의한 여과 혹은 교육과 계몽에 의한 치유의 전략은 매우 중요하고 또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달린다. 토론은 기득권을 확보한 보수진영에 의한 우파 포퓰리즘식의 동원체제에서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며, 사상의 자유시장은 이미 그 독점적 위력을 확보한 보수매체의 지배력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교육과 계몽 또한 검인정교과서 작성기준 등에서 보듯, "빨갱이" 좌파 낙인이 내려지는 순간 전사회적 혼란에 시달린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토론을 위한 언론매체에 대한 접근권을 갖지 못한 서민들이나, 이미 타자화되고 정치·사회의 변방으로 내몰려 더 이상의 관용할 능력조차도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1:99의 자유시장을 향유하라는 요청은 그 자체 폭력일 수밖에 없다. 5·18망언처벌법은 그래서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필요악으로 다가온다. 우리 사회가 관용과 다원성이 가득한 민주사회로 되기 위해 입 앙다물며 겪어야 할 뼈아픈 자해조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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