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충실히 따라온 남미국가들이 자유시장경제에 따른 빈부격차 심화로 지금 반미 좌경화로 급속히 치닫는 조짐을 보이고 있어 미국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미국의 뒤뜰로 치부되어온 남미의 정치적 이탈은 미국의 패권주의에 상당한 타격으로 작용할 게 분명한 때문이다. 이같은 이탈은 최근 브라질에 대한 IMF(국제통화기금) 긴급구제금융을 둘러싼 미국과 브라질 차기대통령후보간의 갈등에서 볼 수 있듯, 앞으로 미국의 행보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할 전망이다.
***"미국은 더이상 남미의 구원자가 아니다"**
미국의 유력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7일(현지시간) "현재 남미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IMF가 권장하고 미국에서 교육받는 경제전문가와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자유시장 정책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면서 좌파의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면서 "경제정책에 대한 주권을 찾아야 한다는 좌파의 주장이 강력한 공감을 얻고 있다"고 보도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따르면, 미국은 더이상 남미의 구원자가 아니다. 지난 10년간 남미 대부분 국가들의 지도부는 미국 정부가 제시한 자유시장, 자유무역 정책에 동조했다. 남미의 각 정부들은 자본시장 개방, 긴축재정, 민영화 등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처방전을 충실히 따르면 번영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처음에는 약효가 있는 듯 보였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수그러들고, 경쟁의 원리가 도입되면서 서비스가 개선되었다. 투자가 이루어져 성장도 촉진되었다. 문제는 그러나 이같은 혜택을 누리는 계층이 소수일 뿐이라는 점이다. 대다수 국민들에게 민영화의 대가는 실업 증가와 사회안전망 축소, 물가 인상으로 나타났다.
***중산층이 신빈곤층으로 전락한 남미**
몇몇 남미 국가에서는 아예 중산층이 사라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국가 파산을 맞은 아르헨티나는 지금 실업률이 사상 최고인 21.5%에 달하고 있다. 3천6백만 인구 중 절반 가량이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한때 세계7위의 경제대국인 아르헨티나의 길거리가 이제 거지들로 넘쳐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자선단체 봉사자로 일하는 실비아 바에즈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과의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의 중산층에서 헐벗고 얼굴에 근심 가득한 새로운 집단이 형성되고 있는데, 이들을 '신빈곤층'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신빈곤층'으로 떨어진 리디아 마소네의 가슴아픈 사연을 들려준다.
그녀는 8개월전까지만 하더라도 고급 아파트와 넉넉한 저축으로 해외 여행을 즐기던 중산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르헨티나 정부의 예금계좌 동결조치로 은행에 돈이 묶여있다. 지난 1월에는 그녀의 직장이던 여행사가 문을 닫았다. 지난 3월에는 남편마저 사망해 호구지책으로 닥치는대로 가재도구를 팔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처지로 전락한 수많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지금 정부에 대해 분노와 증오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경제적 민족주의 열망의 폭발**
미국에 대한 증오심도 커져가고 있다. 지난 6일 폴 오닐 미 재무장관이 브라질과 우루과이를 거쳐 아르헨티나를 방문하자 수천명의 노조원과 퇴직자 등이 반미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흔들며 반미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지금 좌파 정당들이 급부상하면서 남미의 정치적 토양이 빠르게 바뀌고 있는 배경에는 부패한 정치인들에게 환멸을 느낀 마소네 같은 수백만명의 중산층 유권자들이 있다"고 보도했다.
일각에서는 남미의 정치적 토양이 사회주의로 회귀한다기보다는 '경제적 민족주의'를 열망하는 민심의 표출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중립적이기 힘들다. 현재 남미의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좌파들이 득세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르헨티나의 뒤를 이어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브라질에서는 오는 10월 치러질 대선에서 노조지도자 출신인 노동당의 루이즈 이나초 룰라 다 실바가 가장 강력한 대선 후보로 등장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차기 대통령에 대중선동가로 유명한 엘리사 카리오가 유력시되고 있다.
볼리비아에서는 기간산업 국유화 등 반시장주의적 정책을 내세운 에보 모랄레스가 11명의 대선 후보 중 2위를 달리고 있으며 그가 이끄는 사회주의운동당도 의회에서 상당한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페루에서는 발전소 2기를 매각하는 민영화 방침에 저항한 대중봉기가 5일간 계속되면서 3명이 죽고 1억 달러의 재산 피해가 나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자 알레한드로 톨레도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달 들어 파라과이에서도 시장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유혈폭동이 일어나 루이스 곤잘레스 마키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부패로 인한 중산층의 정치 무관심도 좌파 득세 요인**
일부 정치전문가들은 좌파의 득세보다 한때 중도우파 정당에 표를 던졌던 유권자들이 정치적 무관심에 빠져들고 있다는 점에 우려를 나타내기도 한다.
코스타리카의 정치컨설턴트 다닐로 모랄레스는 "선거정치에 관심을 가졌던 한 세대가 완전히 정치에 무관심해졌는데, 이런 현상이 남미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부패가 만연된 현실도 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환멸을 불렀다. 모랄레스는 "부패문제가 사실 핵심이라고 할 만하다"면서 "정치인 대부분이 부패의 늪에 빠져 신뢰를 잃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자유시장 정책을 추구한 남미에서 민영화와 정부기능의 민간이양 등으로 감시의 족쇄가 풀리자 소위 '정실 자본주의'가 판을 치게 된 것이다.
반부패단체인 국제투명성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2001년 남미국가들의 평균 부패지수는 10점 만점 중 3.6점으로 보츠와나, 나미비아, 불가리아보다 심했다.
국제투명성기구의 남미 담당이사 루이스 모레노 오캄포는 "정치인 한 두명 바꾼다고 될 일도 아니고 정치인 전부를 바꾼다고 해도 소용없다"면서 "정치인 매수와 거리가 먼 신경제인들을 길러내는 것이 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미의 부패가 심한 나머지 유권자는 물론 양심적인 정치인들도 선뜻 정치판에 뛰어들지 못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정치컨설턴트 후안 호세 렌돈은 "남미 정치에서 부패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개탄했다. 이 때문에 역량있는 정치지도자들의 나서지 않는다는 점도 남미의 좌경화 현상을 막기 힘들 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내년 3월 치러질 대선을 앞두고 수많은 후보들이 줄줄이 사퇴해 카리오와, 수많은 부패 스캔들에 연루된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만 남아 있는 상태다. 카리오는 덕분에 손 안대고 코 풀 입장에 서있다.
남미의 정치전문가들은 "새로운 세대의 정치인들이 유권자를 다시 불러들일 수 있는지는 지켜보자"면서도 "유권자가 외면할 경우 남미의 정치상황은 극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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