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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금융계를 암중지배해온 J.P.모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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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세계금융계를 암중지배해온 J.P.모건

<월가의 실체를 벗긴다 1> J.P.모건의 1백64년사

J.P.모건과 시티그룹이 미국기업들의 분식회계에 조직적으로 연루된 혐의가 드러나면서 미국금융자본주의의 근간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자본주의의 조종(弔鐘)이 울렸다" "제2차 세계대공황이 시작된 게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할 정도로 지금 월가의 위기감은 극심하다.

이같은 월가의 위기를 지켜보는 국내의 시각은 복합적이다. IMF사태때 우리나라를 그렇게도 경멸했던 월가의 추악한 이면이 드러나자 "고소하다"는 반응과 함께, 앞으로 세계경제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극도의 불안감도 엄존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감성적 대응보다는 역사적이면서도 거시적인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개별 나무들보다는 전체 숲을 볼 때에만 큰 흐름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프레시안은 몇 차례에 걸쳐 미국금융자본주의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주요 금융기관, 신용평가기관, 회계법인 등의 실체에 대해 힘이 닿는 선에서 집중분석 작업을 벌이기로 했다. 그 첫번째 대상은 이번 분식회계 위기의 한복판에 서있는 J.P.모건이다.

J.P.모건은 1백64년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금융의 터줏대감이자, 막후실세다. 현재 포츈이 선정한 1천대기업의 99%와 금융거래를 하고 있으며, 전세계 거래 고객숫자만 3천만명에 달한다. 2000년말에는 체이스맨해튼 은행을 흡수합병하기도 했다. 특히 J.P.모건을 첫번째 분석대상으로 삼은 것은 J.P.모건의 역사를 보면 미국 금융자본주의가 어떤 경과를 거쳐 오늘날의 아성을 구축할 수 있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으면, 미 금융사의 이면이 일반인들이 생각해왔듯 그렇게 깨끗한 게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기자가 IMF위기후 썼던 <미국의 금융파워>라는 졸저에서 상당부분을 재록한 것이다. 편집자

***IMF때 여러 국내 금융기관들을 문닫게 만든 J.P.모건**

IMF사태 발발후 우리 국민은 월가의 웬만한 큰손 이름 정도는 아는 국제 금융전문가가 되었다.

J.P.모건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J.P.모건이라는 고유명사는 IMF사태 발발이전만 해도 몇몇 국제금융 전문가나 알던 미국 투자은행의 이름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웬만큼 신문이나 방송을 관심있게 지켜보는 이들이라면 일반국민도 다 아는 낯익은 이름이 되었다.

J.P. 모건은 98년 1월의 뉴욕 단기외채 만기협상 등 우리 경제의 사활이 걸린 주요 현안이 있을 때마다 미국 금융계의 대명사인양 등장했다. J.P. 모건은 97년말 외화위기 이후 98년 상반기까지 불과 반년 사이에만 모두 12건에 이르는 정부 및 국책은행의 채권발행 주간사로 선정되어 총 40억달러의 채권을 성공적으로 발행시켰다. J.P. 모건은 특히 지난 1998년 1월에 뉴욕에서 우리나라의 단기외채 2백10여억 달러를 1~3년 만기연장하는 협상을 진행할 때 서방채권은행단의 대표로서 우리 정부와 담판을 벌여 국내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J.P. 모건이라는 이름의 실체가 우리 뇌리에 뚜렷이 각인된 것은 98년 4월 국내사상 최대규모의 '파생금융상품 사고'가 터지면서부터였다.

사건의 요지는 J.P. 모건이 97년 봄에 주택은행·보람은행·SK증권·한국투신·한남투신·제일투신·신세기투신 등 국내 굴지의 금융기관에게 친절하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면서 까지 동남아 환율연계 파생금융상품을 사도록 해 십수억 달러대의 천문학적인 손실을 입혔다는 것이다.

보람은행의 경우 97년 SK증권이 설립한 다이아몬드 펀드의 동남아 채권연계 파생금융상품 투자 때 지급보증을 잘못 섰다가 이 상품을 판 미국의 투자은행 J.P. 모건에게 1억8천9백만달러를 상환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SK증권이 설립한 역외펀드(세부담·법규제가 엄하지 않은 외국에 마련한 재외투자신탁) 가운데 하나인 다이아몬드펀드는 300억원의 자본금과 J.P모건에게서 차입한 5천3백만달러상당의 엔화를 동원해 J.P. 모건이 판매한 8천7백만달러어치의 금융상품을 사들였다. 다이아몬드 펀드가 사들인 상품은 1년 만기 인도네시아 채권에 투자하는 상품으로, 동남아의 통화가치가 엔화보다 오르면 투자이익을 거두되 하락하면 투자원금의 4배를 물어주도록 되어있다.

그런데 97년 7월 타이 바트화 폭락사태를 시작으로 인도네시아 루피화, 말레이시아 링기트화 등 동남아 통화의 값어치가 무더기로 폭락하면서 다이아몬드 펀드는 차입금과 투자손실금 1억 8천9백만 달러를 J.P. 모건에게 물어주어야 할 처지가 되었고, 결국 다이아몬드 펀드에 지급보증을 선 보람은행에까지 그 책임이 고스란히 돌아오게 된 것이다.

주택은행은 SK증권의 다이아몬드 펀드에 1억6천7백만달러, 신세기 투신이 설립한 역외 펀드의 파생금융상품 거래에 1억4천2백만달러 등 도합 3억9백만달러의 지급보증을 섰다가 이들 펀드가 나가 떨어지는 바람에 이 거금을 J.P. 모건 측에 고스란히 물어주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두 은행과 SK증권외에도 한국투신·대한투신·한남투신·제일투신·신세기투신 등 투신사와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증권사·종합금융사·생명보험사 등 여타 제2금융권 기관들이 J.P. 모건이 판매한 파생금융상품을 샀다가 예외없이 손해를 보아 국내금융기관들이 입은 전체적인 피해액은 자그마치 16억 달러, 우리돈으로 2조원 가까이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피해를 입은 해당기관들은 "J.P. 모건에게 사기를 당했다"며 소송을 내는 등 부산을 떨었으나 이미 차는 떠나 버린 뒤였다.

이 사건의 여파로 한남투신과 신세기투신등은 결국 문을 닫아야 했고, 문제상품의 판매간사를 맡았던 SK증권 또한 자본이 완전 잠식 되면서 모그룹인 SK그룹의 자금난마저 야기할 정도로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잘 나가던 보람은행도 1998년 9월8일 라이벌이던 하나은행에 사실상 피합병을 당해야 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의 문어발 재벌**

J.P. 모건은 이처럼 1997년 말 외화위기 이래 주요 현안이 터져나올 때마다 우리 금융계를 밑둥째 뒤흔들었던 미국 금융자본의 대표주자이자 실세이다. 하지만 J.P.모건의 숨겨진 파워를 아는 이는 아직 우리나라에 그리 많지 않다.

국제금융계에서는 흔히 "J.P 모건의 지난 1백60년사를 알면 미국금융과 미국 경제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J.P. 모건이야말로 지난 1백60년 동안 미국 금융계를 지배해온 최대 실력자이자, 금융 이외의 철도. 철강. 통신. 영화 등 미국의 핵심 기간산업 부문에서도 독점적 지위를 행사해온 실물경제계의 막후실세였기 때문이다. J.P. 모건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막후에서 역대 백악관의 주인을 위시해 BIS 등 국제경제기구를 쥐락펴락해온 '울트라 정치 파워'이기도 했다.

요컨대 J.P. 모건의 지난 역사는 곧 미국 금융자본의 성장사이자, 미국의 세계금융시장 점령사인 것이다.

J.P. 모건이라는 은행의 명칭은 창업자인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1913)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J.P. 모건은 창업 후 몇 차례의 인수합병 과정을 거쳤는데도 1백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이름을 계속 고수하고 있다. 미국 금융계에 끼친 존 피어폰트 모건의 영향력이 얼마나 절대적인가를 보여주는 한 증거이기도 하다.

J.P. 모건의 창업주인 존 피어폰트 모건은 1837년 뉴욕 인근의 코네티컷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직계 선조인 마일스 모건은 2백년 전인 1636년 영국 웨일스 지방에서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베이 콜로니로 옮겨 온 이주민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에 이르러 모건 집안은 '애트나 생명'을 필두로 한 보험업과 부동산 투자, 고리대금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특히 그의 부친인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J.S Morgan)은 모건이 미국 금융계의 대부로서 군림하는 데 필요한 고등교육과 실전교육,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물적 토대를 제공해주었다.

J.P. 모건은 자행의 설립연도를 1838년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유는 이 해에 미국인 피바디(J.Peabody)가 미국의 주정부 채권을 런던 투자가들에게 판매하기 위해 런던에 설립한 상업은행을 1854년에 J.S. 모건이 공동경영자로 참여하는 형태로 사들였고, 다시 이를 1864년에 아들인 모건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J.S. 모건은 그 무렵 국제 금융센터였던 런던에 본거지를 두고서, 미국의 최대 토목사업이었던 대륙간 횡단철도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유럽시장에서 조달하는 채권 중개사업을 통해 은행의 부를 크게 늘릴 수 있었다.

아버지 일을 돕기 위해 1856년 금융계에 진출한 모건은 얼마 뒤인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본능적으로 돈냄새를 맡았다. 이에 그는 그해에 즉각 아버지 곁을 떠나 뉴욕으로 진출해 오늘날의 투자은행 기능을 하는 'J.P 모건 상사(J.P Morgan & Co.)'을 독자적으로 설립했다. 그리고 화약 생산을 독점하고 있던 미국 최대의 무기상 '뒤퐁(Dupont)'과 손잡고 총기류와 군화 등을 취급하는 무기 중개업자로 나서서 큰돈을 벌 수 있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군산복합체'의 등장이었다. 뒤퐁은 그뒤 J.P 모건과 함께 '제너럴 모터스(GM)'의 주식을 공유하는가 하면,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 때 모건과 손잡고 대량으로 무기를 공급하는 등 모건과 충실한 동반자 관계를 이어갔다.

***미국 최초의 군산복합체**

모건은 그러나 남북전쟁 과정에서 격발사고가 잦은 불량 총기류와, 새로 배급받아 갈아 신고서 반나절도 행군하지 않아 밑창이 떨어지는 불량군화 등을 비싼 값에 군납해 장관이 경질되는 등 커다란 사회적 물의를 빚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국회의 진상조사를 받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쟁 과정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이를 밑천으로 1864년에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은행까지 J.P 모건 상사에 합병시켜 오늘날과 같은 대형 투자은행의 토대를 단단히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J.P 모건 시대가 본격 개막하였다.

남북전쟁이 끝나면서 '전쟁특수'가 사라지자 모건이 눈을 돌린 곳은 철도.통신사업이었다. 40년에 걸친 난공사 끝에 대륙간 횡단철도가 개통된 1869년 이후 철도사업은 각종 파생적인 부가가치를 낳는 고수익 사업으로 급신장하는 중이었다. 특히 철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것이 통신망이었다. 아직 전화가 개발되기 전이 그 무렵의 주된 통신망은 전신이었다.

그런데 서부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듯 이 전신소가 위치한 곳은 다름아닌 전국의 철도망에 점점이 박혀 있는 철도 역사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금융인에게는 빠른 정보가 곧 돈을 의미했다. 때문에 은행이 철도업을 장악하면 자동적으로 전신망도 장악해 생생한 정보를 가장 빨리 얻을 수 있었고, 이같은 정보는 곧 돈으로 이어졌다. 동물적인 감각의 소유자 모건이 주목한 대목은 바로 이것이었다.

공격방향을 잡은 모건은 곧바로 철도업에 뛰어들어 2백여개나 난립하던 철도회사 가운데 소규모 회사를 매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철도회사들을 상대로 기업 인수합병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1890년에 이르러 모건의 철도재산은 30억 달러로 부풀었고, 그는 미국의 4대 철도업자 가운데 하나로 급부상햇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철도왕'이라 일컬어지던 미국 최대의 철도업자 윌리엄 밴더빌트와 힘을 합쳐 미국 굴지의 전기회사이던 '웨스턴 유니언'사를 집어 삼키는데 성공했다. 철도사업에 뛰어든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에디슨의 주인, J.P.모건**

그런데 웨스턴 유니언사를 사들인 모건에게 생각지도 않았던 호박이 넝쿨채로 굴러 들어왔다. 무명의 전신기사에 불과하던 토머스 에디슨이라는 젊은이가 이 회사에 입사한 것이다. 에디슨은 훗날 '발명왕'이라 불리게 된 바로 그 인물이었다. 에디슨은 입사 후 자신의 발명품을 잇달아 회사에 쏟아내놓기 시작했다.

모건이 이 기회를 놓칠 리 만무였다. 에디슨의 높은 상품가치에 주목한 모건은 비밀리에 거금을 투자해 '에디슨 전등'이라는 회사를 설립한 다음 J.P 모건사를 대주주 겸 주거래은행으로 만들어버렸다. 모건의 예상대로 얼마 뒤 에디슨은 세기적 발명품인 전등을 발명해 냈고, 미리 대주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모건은 엄청난 돈방석 위에 앉게 되었다.

모건은 또 벨이 발명하고 에디슨이 실용화시킨 전화사업에도 재빨리 손을 대 '제너럴 일렉트릭'을 설립하여 전화시장마저 삼켜버리는 등 평생 동안 1천여개의 발명품을 쏟아낸 에디슨을 철저하게 활용하여 부를 부풀려나갔다. 모건은 '세계 최초의 영악한 벤처 캐피털리스트'였던 셈이다.

모건의 확장욕은 끝이 없었다. 그는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의 소유이던 '카네기 제강'을 그때로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던 5억 달러에 군말 없이 사들인 다음 이를 다시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페더럴제강.내셔널제강.아메리카제강 등과 합병시켜 'U.S 스틸'이라는 미국 최대의 '철강공룡'을 만들어 순식간에 미국 철강업계를 장악했다. 미국 철강시장을 완전 독식하다시피한 U.S 스틸의 주가는 모건이 카네기제강을 매입했을 시점보다 몇 배나 폭등해 모건은 며칠 만에 매입가격의 배에 달하는 시세차익을 거둘 수 있었다. 모건은 기업 인수합병의 귀재이기도 했다.

***1907년 공황때 혼자서 중앙은행 구실을 해낸 사나이**

1907년 미국에서 대규모 금융공황이 발생했다. 이해 들어 9개월 동안에 자그마치 8천여개의 기업이 쓰러지고, 주가는 대폭락하였다. 이것은 그때부터 20여년 뒤에 발생한 1929년 세계대공황과는 비교가 안될 '일국(一國)차원의 공황'이었다. 그러나 '천민 금융자본주의' 수준에 머물고 있던 미국의 금융산업이 받은 충격은 붕괴 직전의 엄청난 것이었다.

그 무렵의 미국 금융산업은 전당포 수준이었다. '금융기관=은행'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금융의 1차 산업'격인 은행이 여수신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기 이전 미국 전역에는 크고 작은 2만 5천여개의 은행이 난립하고 있었다. 또한 통화와 신용의 유통량을 조절할 수 있는 중앙은행이나 은행의 건전성을 상시적으로 감시.감독할 수 있는 금융감독 당국도 존재하지 않아 경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사전에 경보를 울리거나 유동성을 조절할 수 없었다.

금융기법도 형편없어서 모든 대출이 담보대출이었지 신용대출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고, 오늘날과 같은 30년 만기 주택할부금융도 존재하지 않았다. 담보 없이 급전을 빌리려는 개인은 살인적인 고금리를 요구하는 전당포로 가야 했다. 또 오늘날과 같은 예금보험제도도 전혀 없었고 증권 등에 대한 건전성 규제도 없었다.

1907년 연초부터 위태롭던 뉴욕 금융시장은 마침내 10월에 들어 주가가 폭락하면서 대폭발했다. 주가 폭락의 여파로 머컨다일 내셔널 은행이 문을 닫는 것을 시작으로 도산하는 부실 은행이 속출하면서 모든 은행의 존립이 위태로워지고, 고객 돈을 갖고 주식투자를 하던 투자신탁회사들이 무더기 도산 위기에 직면했다.

당연히 예금자들이 은행과 투신사 앞에 장사진을 치는 인출사태가 벌어졌고,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조차 돈이 떨어져 주식거래를 중단해야 할 궁지에 몰렸다. 돈 많은 갑부나 은행 소유자들은 비상대책회의를 갖고 "우리만이라도 은행에서 돈을 빼지 말자"고 결의했으나, 회의가 끝난 뒤 한두 시간도 채 안되어 서로 앞다투어 돈을 빼내가는 극도의 혼란상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무능한 정부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허둥댔다.

상황이 이처럼 무정부 상태로 치닫자 '금융계의 황제'로 군림하던 모건이 직접 사태수습에 나섰다. 그는 평소 "나는 대중에게 아무런 빚도 진 게 없다"고 공언하고 다닐 만큼 철저한 '샤일록의 후예'였다. "은행은 철저한 상업적 집단인 만큼 은행에게 공익성을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런 그가 자발적을 사태수습에 나선 것은 가만 있다가는 자신이 평생에 걸쳐 구축한 모건 왕국이 붕괴될 것이라는 위기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내로라 하는 뉴욕 금융가들을 모아놓고 모건이 맨 처음 착수한 작업은 투신사와 영세은행의 구제였다. 그는 어려움에 처한 투신사와 영세은행들로 하여금 담보를 내놓게 하고, 그대신 대형은행들에게는 투신사에 대한 대출을 지시했다. 동시에 정부에 압박을 가하여 국립은행과 거래 은행에 대해 구제금융을 지원하도록 했다.

자금부족으로 영업중단 위기에 처한 뉴욕증권거래소에 대해서도 지원사격에 나섰다. 증권거래소의 딜러와 증권사들은 평소 연리 6%의 조건으로 하루짜리 콜자금을 써왔으나, 금융 경색이 극심해지자 100% 금리로도 자금을 빌릴 수 없었다. 모건은 여러 은행에서 105 금리 조건으로 긴급자금을 모아 제공함으로써 주식거래가 중단되는 사태를 막았다.

공무원들에게 줄 자금이 떨어진 뉴욕시도 모건에게 SOS를 긴급 타전했다. 미국 최대의 도시가 파산하면 금융시장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한 모건은 뉴욕시 당국으로 하여금 연리 6%의 수익채권을 발행하게 하고, 이를 은행이 사들이게 했다. 이밖에 각각 이해관계가 다를 투신사들을 설득하여, 이들이 공동출자해 구제기금을 만들도록 하는 등 동분서주했다.

이처럼 모건이 정부를 대신해 한 달여동안 불철주야로 금융계를 재조직해낸 결과, 11월 들어 파국 일보직전까지 갔던 금융위기가 비로소 진정되어싿. 모건은 혼자 힘으로 '중앙은행' 구실을 해낸 것이다. 이로써 금융계에서 차지하는 모건의 영향력이 얼마나 절대적인가가 만천하에 입증되었으며, 모건의 위상은 더욱 반석같아졌다.

1907년 금융공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은 금융위기 이후 "모건이 우리의 금융위기를 영원회 막아주지는 않을 것"이라며 국내은행들이 재무부 지시에 따라 채권을 발행하여 현금부족을 막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제안해 통과시켰고, 의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913년 연방준비제도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서 미국은 비로소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를 비롯해 12개 연방은행(FRB)을 주축으로 하는 중앙은행 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 때돈 번 전쟁상인**

1913년 존 피어퐅트 모건이 이빚트에서 얻은 병이 악화되어, 요양중이던 로마에서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뒤를 이어 세계의 금융센터였던 런던에서 금융수업을 받고 있던 잭 모건이 급거 귀국해 J.P 모건의 새 주인이 되었다. 그는 1943년 병으로 죽을 때까지 31년 동안 모건 왕국을 확장시켜나갔다.

존 피어폰트 모건은 매우 카리스마가 강한 인물로, 남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일 없이 세세한 부문까지 일일이 챙기는 스타일이었다. 번잡한 사교생활을 싫어했고 생활도 검소한 편이었다. 그러나 아들 잭 모건은 반대였다. 그는 연일 호사스런 파티를 즐기는 등 사교생활을 좋아했고, 자기의 사교친구들 가운데 아이비 리그 출신을 파트너로 끌어들여 경영에 참여시켰다. 잭 모건이 끌어들이 파트너들은 아이비 리그 출신이라는 점 외에 백인, 남성, 공화당, 친영파, 감독교 회원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잭 모건은 또 담보를 중시했던 선친과는 달리 대출해 줄 때 상대방의 신용과 성격을 가장 중시했다. 그는 대출기준이 무엇이냐는 언론의 질문에 "믿지 못할 사람이라면 어떤 담보물을 가져온다 해도 한푼도 빌려주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잭 모건이 선친의 사업을 물려받은 다음해인 1914년 J.P. 모건에게 또다시 대도약의 계기가 왔다. 7월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자본에게 '위기는 곧 기회'였다. 잭 모건도 선친 못지 않은 동물적 후각의 소유자였다. 그의 선친이 남북전쟁 과정에서 떼돈을 벌었듯, 잭 모건도 제1차 세계대전을 축재의 기회로 최대한 활용했다.

미국은 전쟁 초기에 국내 반발여론을 명분으로 직접 참전하지 않고, 대신 후방기지로서 무기 공급을 맡았다. 몸은 다치지 않고 부수익만 챙기겠다는 '엉클 톰'의 약은 상술이었다. 그러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영국 정부는 1915년 초 월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던 J.P 모건사를 전시자금 조달 및 무기매입 대리인으로 지정했고, 5월에는 프랑스가 그뒤를 따랐다. 잭 모건은 남북전쟁 때부터 무기공급 사업을 같이했던 미국 최대의 화학독점기업 뒤퐁과 손잡고 미국 전역에 다이너마이트 공장을 세우고 화약류를 대량생산해 유럽에 공급했다. 유럽연합군이 대부분의 탄약을 미국에서 공급받은 까닭에 뒤퐁의 화약 생산량은 자그마치 전쟁 전의 26배로 뛰어올랐다.

이같은 과정에서 J.P. 모건은 전시공채 판매를 통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 무렵 영국과 프랑스 등 연방국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전쟁비용을 조달할 길이 없었다. 이 전시자금 조달을 자임하고 나선 이가 바로 잭 모건이었다.

그는 '자유채권'이라 이름붙여진 전시공채를 개발해, 평소 영화제작비를 공급해주던 까닭에 평소 자신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던 할리우드의 찰리 채플린 등 유명 배우들을 선전요원으로 총동원해 국내외에 매각했다. 제1차 세계대전 5년 동안 모건이 이런 식으로 조성해 연합군에 빌려준 돈을 10억 달러의 거금이었다.

연합국의 무기매입 대리인기도 했던 모건은 또한 이 기간중에 뒤퐁 등에서 사들인 군수물자 30억 달러어치를 연합국에 공급했다.

J.P 모건사는 이 과정에 전시공채 판매를 통해 높은 수수료를 챙기는 동시에, 자신이 조성한 자금으로 동업자인 뒤퐁과 계열사였던 U.S 스틸 등에게서 화약과 대포 등 각종 군수물자를 독점가격으로 비싸게 사들이는 수법으로 이중삼중으로 부를 불려나갔다.

전쟁과정에서 큰 이익을 올린 J.P 모건은 그뒤 전세계를 상대로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 공신력의 은행으로서 전시공채 등 위험성이 큰 '정크 본드(junk bond:투자 적격 신용등급 이하의 채권)' 판매 중개에 적극 나섰고, 그러는 과정에 개발도상국이던 일본.이탈리아.벨기에 등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98년초 외환위기로 신용도가 급락한 우리나라 정부 및 국영기업이 발행한 총 40억 달러의 국공채의 판매 주간사를 J.P 모건이 맡아 짭짭한 수수료 수입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역사적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공황은 더 큰 공룡을 낳았다**

1929년 10월24일 뉴욕증시의 주가폭락을 시작으로 세계 대공황이 일어났다. U.S 스틸, 제너럴 일렉트릭, ATT 등 J.P. 모건을 중심축으로 하는 모건 그룹도 주가가 폭락하고 내수경제가 침몰하면서 공황 발발후 3년 동안 법인세를 납부하지 못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공황이 가장 극심했던 1929년부터 1933년까지 4년 사이에 2만5천개의 은행 가운데 9천개가 도산했으며, 이 와중에 예금을 보호받지 못하던 많은 예금자들이 알거지가 되었고, 도산하지 않은 은행의 고객들은 앞다투어 은행에서 예금을 빼내 장롱 속에 숨겨두는 이른바 '현금퇴장(Bank Run)' 사태가 일어났다. 은행도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해 기업과 개인에 대한 대출을 중단했다.

이같은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제조업의 양대축으로 고용효과가 가장 큰 건설업과 자동차 업계의 가동률이 50% 이하로 떨어지면서 공황 전에는 2백60여만명이던 실업자 수가 공황이 정점에 달했던 1933년에는 1천3백만명으로 급증했다.

그러나 대공황은 결과적으로 미국금융을 한 단계 높게 도약시키는 '입에 쓴 보약'으로 작용했다. 대공황이라는 호된 시련을 겪은 금융당국이 금융산업과 경제 전반의 건전성을 강화하는 다양한 건전성 규제방안을 마련해, '20세기 금융정책 모델'을 창출해 냈기 때문이다.

20세기 금융정책의 골간이 된 대공황 이후 금융개혁의 골간은 한마디로 '경쟁의 제한'이었다. 과도한 부의 집중에 따른 과잉생산과 일반 소비력 감퇴, 그리고 몇몇 재벌의 과당경쟁에 따른 시장질서 혼란이 복합되어 대공황이 일어났다는 판단에서였다.

정부와 의회는 먼저 1933년에 글래스와 스티걸 의원이 공동발의한 일종의 금융독점 방지법인 '글래스-스티걸법(Glass-Steagall Act)'이라는 칸막이법을 제정해, 은행.증권업이 서로 상대방의 영역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겸업을 금지하고 또한 겸업을 하고 있던 기존의 금융기관은 강제분리시켰다. 이와 함께 같은해에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만들어 은행이 파산하더라도 1계좌당 2천5백달러까지 원리금을 보장해주었다(1980년 개정법에 따라 현재는 1계좌당 10만 달러까지 보장해주고 있다).

금융감독도 크게 강화해 1934년 증권거래위원회(SEC)를 창설, 주가조작과 허위정보의 유포를 감시하고 정보공개를 의무화했다.

금융계의 대표적인 공룡이던 J.P 모건은 당연히 금융개혁의 최우선 대상이 되었다.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잭 모건이 여러 차례 괴한의 습격을 받고 J.P 모건사에 폭탄이 투입될 정도로, 미국 최대의 금융-산업 복합재벌인 J.P 모건사에 대한 사회적 증오는 대단했다.

이같은 여론에 따라 정보는 글래스-스티걸법에 의거해 J.P.모건에서 증권 등에 대한 투자업무를 맡고 있던 부서를 '모건 스탠리(Morgan Stanley)사'라는 이름으로 강제 분리시켰다. 남아있는 J.P. 모건은 주식.채권 등 유가증권 투자를 전혀 할 수 없고 여수신 업무 등 상업은행 영업만 해야 했다. 외형상 J.P. 모건의 일대위기였다.

***공황을 거치며 미국 양대 재벌로 성장**

그러나 J.P. 모건은 제도적인 제약을 가볍게 무력화시켰다. J.P. 모건은 상업은행이 된 다음에도 다른 상업은행과는 달리 지점을 내지 않고 광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정부와 은행, 대기업, 소수의 부유층 백인고객만 상대하는 종전의 '귀족주의 영업전략'을 구사, 변함없는 금융파워를 과시했다. J.P. 모건은 핵심 고객에게는 자사 주식을 시세 이하로 살 수 있도록 특혜를 부여하는 'J.P 모건사 특권자 명부'를 만들어 고객을 관리해 나갔다.

그 결과 글래스 스티걸법 제정 이후 다른 일반 상업은행은 예대마진(예금금리와 대출금리간의 금리차)을 주된 수입원으로 하는 영업행위에 만족해야 했던 것과 달리, J.P. 모건은 수익의 대부분을 정부와 우량 대기업 및 은행에 대한 대규모 대출, 증권발행 주선, 외환이나 기타 금융상품의 거래업무 등에서 얻었다.

이처럼 제도적인 압박이 가해지면서 적잖은 손실이 생겼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 장부상 손실에 불과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IMF 사태 이후 재벌 비판여론이 비등하는데도 실제 금융시장에서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높은 5대 재벌에게 자금 및 경제력 집중현상이 심화되어 "기업은 사라지고 재벌만 남았다"는 탄식을 낳고 있듯, 미국의 1930년대 대공황은 록펠러가와 함께 미국 경제를 양분하고 있던 모건그룹에게로 경제력이 더욱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실제로 어느 정도 공황이 가라앉은 1930년대 중반 모건의 지배 아래로 들어온 기업으로는 자산규모가 1억 달러 이상이던 대형기업만 해도 J.P. 모건과 퍼스트 내셔널 뱅크 등 은행 14개, 생명보험회사 4개, 제너럴 일렉트릭과 아메리카 전신전화 같은 전기.전화.가스 등 공기업 8개, 철도회사 4개, U.S 스틸 등 자동차.철강제조업체 12개 사에 이르렀다. 여기에 중견기업까지 합하면 모건 산하의 기업체 수는 4백40개사였으며, 자산총액은 7백70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미국 상장기업 2백개사의 자산총액 가운데 40%에 가까운 엄청난 액수였다.

***국제결제은행의 창시자**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대공황의 필연적인 귀착점이었다. 세계대공황은 전세계의 수요를 일시에 몰살시켰다. 세계경제가 공황에서 완전히 탈출하려면 세계적인 규모의 새로운 수요 창출이 필요했다. 미국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비록 루즈벨트 대통령이 테네시 개발 계획 등 뉴딜 정책을 통해 인위적인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위기의 강도를 약화시키는 데 성공하기는 했으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세계가 이처럼 대규모 신규수요 창출을 갈망하던 시점에 독일의 유럽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앞서 제1차 세계대전 때 엄청난 재미를 보았던 J.P. 모건 등이 내심 쾌재를 불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J.P. 모건은 또다시 전시공채 판매 등을 통해 부를 증폭시킬 수 있었다.

미국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쏟아부은 전비는 모두 2천4백50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는 전쟁 전 미국 정부의 50년 예산과 맞먹는 액수였다. 전비는 대부분 전시공채 판매를 통해 조달되었는데, 미국이 발행한 전시공채의 절반 이상을 J.P. 모건이 판매하면서 그 대가로 엄청나 액수의 수수료를 챙겼다.

그런데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J.P. 모건은 심각한 내부위기에 직면했다. 그해 3월12일 잭 모건이 숨을 거둔 것이다.

그의 뒤를 이어 모건 3세인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이 등장했다. 주니어스는 이미 모건그룹의 자회사인 제너럴 모터스와 U.S 스틸의 이사를 거치면서 후계자 수업을 단단히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후 국제금융계에서 모건이라는 사람의 고유 명사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외형상으로는 주니어스의 여략이 조부나 부친보다 떨어져 모건 일가의 시대가 끝난 것으로 비쳤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번거로운 노출을 피해 좀더 깊숙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을 뿐, 그 영향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국제금융계의 전언이다. 이같은 안전장치는이미 1930년 대공황 때 잭 모건에 의해 마련되었다.

그해 5월에 미국.영국. 프랑스. 이탈이아. 독일. 벨기에 등 6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스위스 바젤에서 BIS(국제결제은행)가 설립되었다. 이 기구의 목적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에게서 전쟁배상금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맨 처음 BIS 설립 구상을 내놓고 이를 조직한 막후세력이 다름아닌 잭 모건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자유채권 판매를 대행해 영국. 프랑스의 전비 조달 업무를 맡았던 잭 모건은 미국 대통령이던 후버와 함께 미국측 협상대표로 직접 독일배상회의에 참석, 독일이 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할 2천2백60억 달러를 1천억 마르크로 대폭 삭감하고 지불시한도 59년 동안으로 늘려주는 등 전쟁 뒷마무리 협상을 깔끔히 매듭짓는 수완을 발휘했다. 독일은 잭 모건의 배려를 매우 고마워했다.

***세계금융계를 지배하는 암(暗)장군**

그런데 설립 목적인 배상협상이 끝난 뒤에도 BIS는 그대로 존속되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터져 독일의 나치가 유럽 전역을 휩쓸었는데도 유독 스위스만은 손대지 않았다. 스위스는 그뒤 전세계의 블랙 머니가 모여드는 국제금융의 파워센터가 되었으며, BIS가 소재한 스위스 바젤은 '국제금융계의 크레믈린'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지금도 매달 첫째주 일요일 저녁에는 앨런 그린스펀 미연준의장을 비롯한 G-10의 중앙은행 총재들이 바젤에 모여 계속 비밀회합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국제금융계에서는 BIS의 막후에서 J.P. 모건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으로 파악하고 있다. 1930년 BIS 설립 당시 J.P. 모건은 미국에서 큰 수난을 당하고 있었다. 대공황에 분노한 군중은 금융-산업공룡인 J.P. 모건을 적대시했다. 잭 모건은 수차례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J.P 모건사에는 폭탄이 투척되었다.

더 이상 표면에 나서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J.P. 모건이 서둘러 베일을 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물이 바로 서방중앙은행들의 결집체이자 최고의결기구인 BIS라는 것이다.

과연 이같은 국제금융계의 추정이 얼마나 정화한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국제금융계의 크레믈린이라 불릴 만큼 BIS 건물안에서 이루어지는 내밀한 작업은 외부에 전혀 공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J.P. 모건은 지금도 변함없이 미국금융계를 대표하는 가공스런 힘이라는 사실이다.

이번 분식회계 연루 의혹으로 J.P.모건은 1939년 회사창립후 최대위기를 맞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과연 J.P.모건이 작금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아니면 미국금융자본주의와 함께 몰락할 것인지, 주목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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