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증시가 1929년 세계대공황을 연상시키는 폭락장을 연출, 투자자들의 넋을 빼놓고 있는 가운데 이들을 인도할 '월가의 모세'로 급부상하는 인물이 있다. 다름 아닌 워렌 버핏이다.
'투자가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버핏은 지금 미경제가 당면한 최대위기는 '신뢰 신화의 붕괴'로 규정, 스톡옵션(주식매입청구권)의 비용처리 등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개혁을 선도하고 있다. 당면한 위기는 시장 스스로의 힘으로 타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버핏의 개혁 작업에 코카콜라, 제너럴모터스(GM), 포드, 뱅크원, 워싱턴포스트 등 미경제를 대표하는 '전통적 기업'들이 대거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마이크로소프트, 선마이크로시스템 등 미국의 이른바 '신경제 기업'들은 격렬히 저항하고 있다. 이른바 '전통적 기업'과 '신경제 기업' 사이에 대립전선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목격되는 것인가. 또한 이같은 전선이 향후 세계경제에 미칠 영향은 무엇인가.
***버핏, "10년이상 묻어둬도 좋은 기업에만 투자해야"**
버핏은 90년대말 기술주를 중심으로 한 나스닥 붐이 거셀 때만 해도 '존경은 하지만 믿지는 않는' 시대착오적 인물로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은 다 기술주에 투자해 큰 수익을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핏은 '가치투자만이 살길'이라는 신념을 고집, 기술주가 폭등할 때 굴뚝기업에만 투자하느라 99년의 경우 최악의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핏은 나스닥 붐이 절정에 달했던 2000년 3월 "기술주 가운데 지속적인 참된 경쟁력을 가진 기업이 어느 것인지 알아보는 통찰력이 없다는 게 우리들이 안고 있는 최대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며칠은커녕 1, 2년안에 특정기업의 주가가 어떻게 될지 난 모른다"며 "10년 이상은 묻어둬도 좋다고 판단한 몇몇 기업에만 투자해야 한다"는 '가치투자'론을 설파해왔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19일(현지시간) " '굴뚝경제'기업에 대한 존경을 의미하는 '가치투자와 투기회피' 철학이 부활하고 있다"면서 "워렌 버핏의 투자철학이 권위를 되찾았다"고 보도했다.
<최고경영자 워렌 버핏>의 저자 로버트 마일스는 FT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버핏이 주장하는 스톡옵션 비용처리와 관련, "버핏은 기업들이 막대한 스톡옵션을 비용으로 처리하지 않고 있는 문제점을 지난 15년동안 줄기차게 비판해 왔다"고 지적했다.
요컨대 버핏의 개혁 노선은 일관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결코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는 주장이다. 단지 투자가나 애널리스트들이 그동안 신경제 환상에 매몰돼 간과했던 '상식'이라는 것이다. 지금 버핏이 주장하는 것은 "상식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신경제 기업들이 버핏의 개혁에 격렬히 저항하는 속내는?**
블룸버그통신은 19일 기술주들의 주가폭락 소식을 전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 등 기술주 기업들이 버핏이 제안한 스톡옵션의 비용처리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하는 이유를 'CEO들의 이기심'과 '신경제기업의 거품' 때문으로 분석했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스톡옵션을 비용으로 처리할 경우 인텔이나 시스코시스템스 같은 대형 첨단기술기업들은 엄청나게 순익이 격감한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이들 기업들이 결코 스톡옵션을 비용으로 처리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예컨대 세계 최대 반도체메이커인 인텔이 지난해 이 제도를 시행했다고 가정할 경우 이익은 무려 80%가 줄어든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도 이익이 무려 44%나 줄어드는 것으로 추정됐다.
반면 굴뚝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스톡옵션이 비용으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코카콜라에 이어 지난 18일 스톡옵션을 비용으로 계상하겠다고 발표한 세계최대 과일 및 야채 생산업체인 돌은 지난해에 그같은 제도를 시행했을 경우 이익이 줄어드는 폭이 1.6% 밖에 되지 않는다. 코카콜라 역시 지난해 순익이 2억달러정도만 줄어들어 37억7천만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톡옵션 비용처리 계획을 밝힌 미국의 여섯번째 은행 뱅크원의 경우도 지난해 순익이 7.1% 감소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이른바 신경제 기업들이 회사이익의 엄청난 부분을 CEO등 임원들이 가로채왔으며, 이 과정에 회계장부는 거품으로 가득차게 됐다는 얘기에 다름아니다. 요컨대 빌 게이츠 등 신경제 CEO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회사의 거품을 은폐하기 위해 버핏의 개혁에 격렬히 저항하고 있는 셈이다.
***기술주가 주도하는 미주가 폭락**
이처럼 기술주의 허상이 드러나면서 마이크로소프트는 2분기에 기대 이상의 실적을 기록했다고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19일 3% 이상 밀렸다. 선마이크로시스템스도 향후 시장상황이 어둡다는 투자자들의 전망에 따라 26.73%나 폭락했다.
블루칩 30대 기업 중심의 다우지수가 폭락세를 보인 것도 이들 기술주 투매가 한몫 했다. 일각에서는 다우지수의 7000선 붕괴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있다. 앞으로 상당기간 기술주들이 맥을 못추리라는 이유에서다.
S&P 500지수까지 포함한 3대 지수는 올들어 하락률이 모두 20%를 넘었다. 다우지수의 연초대비 하락률은 20.1%, 나스닥은 32.4%, S&P 500 지수는 26.2%에 이른다. 이에 따라 1941년 이후 처음으로 3년 연속 침체장에 들어섰다. 경제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는 '공황 수준'을 의미한다. 그동안 웬만한 침체장도 2년 후면 상승세로 돌아섰다는 통계치를 들이대며 곧 바닥을 치며 반등할 것이라던 애널리스트들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메릴린치의 투자전략가 리처드 번스타인은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며 "사람들이 바닥이 어디냐고 묻지 않게 될 때가 바닥"이라며 '이제 곧 바닥치고 반등할 것'이라는 일부 애널리스트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항복성 투매와 바닥론이 최고 화제가 되고 있는 한, 아직 바닥은 멀었다는 것이다.
지난 12개월간 시장의 추세 전환 타이밍을 가장 잘 맞춘 5명 중 하나로 선정된 투자정보지 타이머 다이제스트의 이케 아이오시프 사장은 "중기적으로 바닥이 형성됐다는 신호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현재 주식 투자에서 위험은 너무 오랫동안 비관적인 것이 아니라 너무 빨리 낙관적으로 선회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CNNfn의 수석 기자인 저스틴 라하트는 "28개월간 계속되는 현재같은 약세장에서는 매도세가 그치는 바닥을 인지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꾸준한 매수세가 형성돼 지수가 상승세를 이어갈 때까지 매수를 자제하라"고 경고했다.
***AOL타임워너, 1.4분기에만 72조원 적자 발생**
세계최대 미디어그룹인 AOL타임워너가 분식회계 의혹에다가 설상가상으로 경영진의 분열상까지 가세하면서 위기에 몰리고 있다는 소식도 '굴뚝산업 대 기술산업'의 명암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0년 1월 '굴뚝기업' 타임워너와 '기술주' AOL의 환상적인 결합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사상 최대 규모(1천35억달러)의 기업합병을 주도했던 AOL타임워너의 2인 자 로버트 피트먼 최고운용책임자(COO·48)가 퇴진하고 AOL 출신들이 AOL과 타임워너간 권력 싸움에서 대거 밀려났다.
전문가들은 이 사건에 대해 신경제를 대표하는 AOL의 인터넷서비스와 구경제에 속하는 타임워너의 미디어. 오락산업을 통합해 상승효과를 극대화한다는 합병목적이 사실상 실패했다는 진단을 내렸다.
합병 당시 AOL 인터넷망을 통해 타임워너의 콘텐츠를 공급한다는 신미디어산업이 AOL타임워너의 최대 성장엔진이 될 것으로 전망됐던 온라인사업의 광고시장 침체로 실적을 갉아먹는 애물단지가 됐기 때문이다. 올 1분기 AOL 온라인광고 판매액은 전년 동기 대비 31%나 급감했다.
합병으로 인한 타임워너의 피해는 엄청났다. 이 회사는 AOL 인수가격과 실제 가치 차이만큼 자산가치가 부풀려졌던 것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지난 1.4분기에 미국기업사상 가장 큰 5백42억4천만달러(약 72조원)의 적자를 냈다.
게다가 AOL이 약식거래를 통해 매출을 과다계상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주가가 급락해 합병 발표때 55달러선을 웃돌던 주가가 현재 12.45달러 선으로 72%나 폭락했다. '기술주의 경쟁력이 언제까지 갈지 의심스럽다'는 버핏의 무서운 예언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FT는 "버핏의 포트폴리오가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 지수와 반대로 가는 고통스런 시간이 지나자 투자자들이 다시 버핏의 가치투자 전략을 신봉하게 되었다"고 최근의 투자분위기를 전했다.
문제는 이같은 미 신경제의 거품을 제거하는 작업이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신경제의 거품이 제거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세계경제가 당면한 최대 불확실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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