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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진정 '경제의 암'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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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진정 '경제의 암'이 되려나

"백마 탄 왕자가 될 것인가, 마녀가 될 것인가"

미국을 위시한 서방 간판기업들의 잇따른 분식회계 사태로 세계 자본주의의 최대 화두는 다시금 '신뢰(Trust)'가 되고 있다.

일본계 미국 미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지난 95년 "국가경쟁력의 핵은 신뢰"라는 요지의 <Trust>라는 세계적 베스터셀러를 낸 지 7년만의 일이다. 단지 7년전과 달라진 점은 당시 후쿠야마가 한국, 중국, 이탈리아 등을 '저신뢰 국가'로, 미국, 일본, 독일 등을 '고신뢰 국가'로 분류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미국 등 후쿠야마의 이른바 '고신뢰 국가'들까지도 믿을 수 없는 저신뢰 국가 범주로 동반급락했다는 사실이다. '신뢰 붕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92년 동구사회주의권의 몰락을 보고 <역사의 종언>이라는 저서를 통해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내세우며 영구평화 시대의 도래 운운했다가 한차례 머쓱해졌던 서방우월주의자 후쿠야마의 두번째 '쪽팔림'이다.

문제의 핵심은 그렇게 잘난 척하던 후쿠야마의 몰락이 아니다. 이같은 '신뢰 붕괴의 시대'에 우리나라가 어떻게 대처해야 당면한 위기에서 벗어날 것인가이다.

***세계경제가 직면한 위기는 실물위기와 신뢰위기라는 '쌍둥이 위기'**

월드컵 폐막후 한때 6백대까지 폭락했다가 지난주 미국증시의 약세에도 불구하고 국내 주가가 계속 오르자, 지금 증권가 일각에서는 또다시 '한국증시와 미국증시의 차별화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우리 경제의 펀더맨탈(기초경제여건)이 미국보다 양호하고 각종 경제 실물지표도 좋으니 걱정할 것 없다. 도리어 미국에서 빠져나온 돈이 우리나라로 몰려들 테니 우리에게는 오히려 도약의 기회가 왔다"는 요지의 주장이다. 이같은 차별화론에 힘입어 8일 종합주가지수는 장중 한때 8백선을 회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분홍빛 '차별화론'은 지금 세계경제계가 직면한 위기가 단순한 '실물경제의 위기'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각도에서 볼 때 상당 부분 허구다.

지금 미국을 중심축으로 하는 세계 중심부 자본주의권은 정보통신(IT)산업에의 중복과잉투자 미해소, 신규 투자대상의 미출현, 미국의 천문학적 쌍둥이적자 등의 실물경제적 구조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직면한 위기가 분식회계 사태가 상징하듯 '도덕적 암'이라 불리는 '신뢰의 위기'이다.

이른바 '차별화론'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선 "우리 경제는 실물 위기와 신뢰 위기라는 '쌍둥이 위기'로부터 자유롭다"는 필요충분조건을 갖춰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실물 위기의 경우 미국보다는 상대적으로 여건이 나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뢰 위기의 경우는 오십보백보라는 게 지배적 평가다. 우리 역시 신뢰 부족이라는 위기에 직면해 있기란 미국등과 다를 바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정부의 국가IR, 포커스를 잘못 맞췄다"**

지난주초 전윤철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이 세계 제2의 금융센터 영국 런던에서 국가IR(투자설명회)을 했다.

정부와 언론은 IR후 "축구 4강신화로 인해 국가신인도가 크게 높아져 설명회장에 해외투자가들이 바글댔고 반응도 호의적이었다"며 "대단히 성공적인 설명회였다"고 뿌듯해 했다.

그러나 국내의 한 기관투자가 고위관계자는 다른 평가를 했다.

"전 부총리가 IR의 포커스를 잘못 맞췄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외환위기후 어떻게 성공적으로 구조조정을 했고, 우리나라의 실물경제가 얼마나 좋은가에 초점을 맞출 때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나라 기업의 투명성 제고 노력을 어떻게 해왔으며, 우리나라의 기업 투명성을 OECD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정부 등이 지금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를 집중적으로 설명해야 했다.

세계에서 가장 투명하다던 미국에서 기업분식회계 사태로 큰 손실을 입은 세계투자가들의 주된 관심사는 과연 믿고 투자할 만한 곳이 어딘가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번 IR은 포커스를 잘못 맞춘,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설명회였다."

***정부, "억울하다. 우리가 아닌 정치권이 개혁의 걸림돌이다"**

이같은 혹평에 대해 재경부의 한 관계자는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맞는 지적이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모두 정부에게 돌린다면 억울하다. 정부도 기업의 투명성, 시장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한 예로 월드컵 폐막직전 주가가 장중 한때 6백대로 폭락하자 정부는 금융정책협의회를 열어 증권의 투명성과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선 지난해 정부가 안을 제출했던 증권집단소송제를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고 정치권에 재차 촉구했다. 그러나 국회 반응은 마이동풍이었다.

이처럼 정치권이 대기업 편에 서서 시장의 투명성을 높이려는 경제 개혁입법을 가로 막고 있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정부로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아니냐."

***정치권이 주술에 걸려 '잠자는 공주' 집단소송제**

한달여 동안 국회 감투를 둘러싸고 공전을 거듭해던 국회가 8일 원 구성에 합의했다. 이들은 국회가 문을 열면 그동안 처리못한 각종 민생관련 안건들부터 서둘러 처리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단하나, 증권 집단소송제만은 이번 국회 회기내는커녕 연내에 처리되기 힘들어보인다는 게 지배적 전망이다.

정부는 지난해 2월 국회 법사위에 증권 집단소송제 관련법안을 상정했었다. 이에 앞서 2000년 10월에는 여야 국회의원 34명과 참여연대가 공동으로 별도의 집단소송제 법안을 법사위에 제출했었다.

집단소송제란 분식회계, 주가조작, 허위공시 등의 오너 및 경영진의 '경제범죄' 행위에 대해 일반 투자가들이 집단소송을 낼 수 있는 길을 열어줌으로써 시장의 투명성을 한단계 높이기 위한 장치였다. 이미 미국 등 서방국가에서는 일반화된 제도였다. 정부는 이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 4월부터 시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법안이 상정된지 1년 5개월이 지나도록 이 법안은 해당위원회인 재경위에 상정되지도 못한 채, 법안의 적법성을 가리는 법사위에서 잠자고 있다. 법사위는 지난해 2월 공청회를 열기로 결정하고도 지금까지 공청회 날짜조차 잡지 않고 있다. 법안 제출직후 국회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대기업들의 민원을 받아들여 즉각 반대입장을 밝혔고, 여타 정당들도 입법에 적극적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대다수 의원들이 '집단주술'을 걸어 집단소송제를 '잠자는 공주'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집단소송제를 둘러싼 대치전선**

집단소송제 도입에 관한 한 지금 정부,시장,시민단체는 보기 드물게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정부측에서는 재정경제부,금융감독원, 증권거래소, 코스닥시장, 부산선물거래소 등 유관부처 모두가 조속한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

시민단체에서는 참여연대를 필두로 대다수 경제관련단체들이 이를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흥미로운 대목은 시장의 반응이다. 지난 3월13일 참여연대가 집단소송법 조기제정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을 때 팍스넷, 씽크풀, 개미군단클럽, 슈어넷, Vip스탁컴 등 5개 증권전문사이트가 참여했다. 이들 온라인 사이트들이 참여한 것은 이같은 제도가 도입될 때에만 주식을 믿고 투자하는 개인투자가들이 늘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다른 오프라인 증권사들은 침묵했다. 이들 증권사의 최대주주가 대부분 재벌기업이라는 대목과 무관치 않아 보였다.

단지 재벌기업들과, 연말 대선을 앞두고 이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정치권만이 집단소송제 도입에 반대하고 있는 형국이다.

***백마 탄 왕자가 될 것인가, 마녀가 될 것인가**

정치권에서는 지난주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시민단체들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획기적 내용의 '부패척결특별입법'의 연내 제정을 제안함으로써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가 이를 수용할 것인가 여부가 핵심이슈가 되고 있다. 이후보의 대응 여부에 따라선 반부패 입법을 둘러싼 대치전선 구축이 예견되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앞으로 집단소송제 도입 여부를 둘러싼 '경제개혁 전선' 구축 여부도 주목거리다.

지금 집단소송제 도입에 대다수 의원들은 침묵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이미 지난해 12월 자기당의 재경위 및 법사위 의원 연석회의를 통해 '도입 불가' 방침을 굳힌 상태다. 친기업적 성향이 짙은 자민련은 당연히 재계 편에 서 있다. 민주당도 재계를 의식해서인지 머뭇거리는 분위기가 완연하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경제개혁을 둘러싼 대치전선은 구축되지 못할 것이다. 이럴 경우 정치권은 정치적 불신의 증폭 및 시장 불투명성 존속에 따른 외국인 자금 이탈, 이에 따른 경제불황 도래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정파가 경제개혁 입법의 편에 선다면, 연말 대선을 앞두고 또하나의 중요한 전선이 구축될 것이다.

과연 잠자는 공주를 깨우는 백마 탄 왕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집단주술을 가한 마녀가 될 것인지, 정치권 스스로가 판단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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