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쇠창살로
햇살이 숨어든다
어느 날 빨갱이 기집이라고 느닷없이 잡혀갔을 때 내 등엔 세 살짜리 딸이 업혀 있었고, 새 생명 하나 움트고 있었지. 이유도 물을 새 없이 몽둥이찜질 당했지. 비바람치던 어느 겨울 밤 난생 처음 배를 타 봤어. 어디로 가는 건지 왜 나를 끌고 가는지,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어. 죽음보다 더한 공포, 물을 수가 없었어. 동물적 본능이었을까 시퍼렇게 참던 아이. 맞은 다리 찢기어 썩어들고 진물 나고 흰 뼈가 다 드러나도록 신음 한 번 안낸 거야. 어미라는 작자가 제 세끼 아픈 것도 모른 거야. 마지막 의식인 듯 어미젖 부여잡고 싸늘한 입맞춤으로 작별인사 하고 갔어. 전주형무소 공동묘지, 거기가 어디였을까? 묻어두고 안동으로 이감되는 날, 벚꽃 핀 걸 보았어.
딸아이
옹알이처럼
내려앉고
있었어
- 벚꽃이 피면 (김영란作)
4.3생존수형인 송순희(95) 할머니와 마주 앉은 김영란 시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예순을 훌쩍 넘긴 딸들의 얼굴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70년 전 엄마 모습이었다.
인천에서 만난 송 할머니는 아흔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굴곡진 인생사를 쏟아냈다. 4.3의 광풍 속에서 한 여자가 겪은 기구한 이야기다.
송 할머니는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출신이다. 열일곱 살이던 1941년 제주에 주둔한 일본군들이 마을 처녀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다. 체력이 좋은 송 할머니는 그때도 돋보였다.
군사훈련 1년 후 청년들은 일본 북해도로 보내졌다. 이후 살아 돌아오는 이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결혼한 여성은 차출에서 열외 시킨다는 소문에 송 할머니도 서둘러 짝을 만났다.
남편은 옆 동네인 의귀리 출신 훈남이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뒷날 학업을 마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졸업 후 1년이 지나서야 새색시 앞에 나타났다. 당시 송 할머니는 19살이었다.
애처가인 남편과 두 딸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4.3의 광풍은 피해가지 못했다. 1948년 10월 출장을 간다던 남편이 자취를 감췄다. 시집을 찾아가도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우는 이른바 초토화작전이 시작되면서 조용했던 마을은 불바다로 변했다. 총칼을 피해 사람들은 숲과 궤(바위동굴)로 몸을 숨겼다.
첫째 딸은 할머니 손에 이끌렸다. 송 할머니는 세 살배기 둘째딸을 등에 업고 중산간 내창(하천) 옆 궤로 몸을 피했다. 해가 지면 마을로 돌아가 남편을 수소문했다.
며칠 후 마을 아낙들이 숨어 지내던 산 중턱에 총을 든 군인과 경찰들이 나타났다. 닥치는 대로 대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노인, 여성도 가리지 않았다.
"내 옆에 세 살짜리를 업은 여자가 또 있었어. 군인이 대검으로 허벅지를 찌르더라고. 피가 쏟아지고 끌고 갈 수 없으니 총으로 쏴 죽였어. 애기는 데려가다 다른 사람에게 줘버렸어."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송 할머니는 토평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끌려갔다. 구경 나온듯한 사람들이 세 살배기를 등에 업은 송 할머니를 향해 '빨갱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송된 서귀포경찰서에서는 매질이 기다리고 있었다. 산으로 쌀을 몇 가마니 올렸냐는 추궁이 이어졌다. '먹을 쌀도 없는데 뭘 올리냐' 싶었다. 순간 몽둥이가 쉴 새 없이 온몸을 강타했다.
어깨를 패더니 분에 안 찬 듯 허리를 마구 두들겼다. 매질을 당할 때 등에 업은 둘째 딸의 다리가 난타를 당했다. 어린 아이의 다리 살이 뜯기고 하얀 뼈가 훤히 드러났다.
다시 제주경찰서로 끌려갔다. 몸이 이상했다. 그제서야 뱃 속에 셋째가 꿈틀 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피멍이 든 엄마 몸뚱이에, 다리에, 피범벅이 된 딸까지 앞날이 캄캄했다.
불법적인 군법회의를 거쳐 송 할머니는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전주형무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자신의 죄명과 형량을 정확히 알려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주형무소에 도착하니 둘째 딸이 점차 의식을 잃어갔다. 살이 썩어 곪아들어갔지만 형무소에서 치료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입소 20일 후 그렇게 둘째는 차디찬 주검으로 엄마 품을 떠났다.
이듬해 3월 송 할머니는 동료들과 안동형무소로 이감됐다. 화차를 타고 가는 길, 차창 밖으로 벚꽃이 눈에 들어왔다. 먼저 떠나보낸 둘째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산에서 교도소로 끌려 올 때까지 제대로 먹이지도 못했지. 간수도 살이 썩어가는 아이를 보면서 울었어. 불쌍하다고. 그리고 죽은 아이를 데리고 갔지. 거기가 형무소 공동묘지였어."
송 할머니는 그해 여름 안동형무소에서 셋째 딸을 낳았다. 함께 수감됐던 제주 출신의 한 50대 아주머니가 아이를 받았다. 출산 소식에 교도소에서 미역으로 채워진 국을 내놓았다.
둘째를 떠나보내고 셋째를 품에 안은 형무소 생활은 형량보다 두 달 빠른 1949년 10월 끝이 났다. 기차를 타고 목포를 거쳐 목선에 올랐다. 고향 제주로 가는 길이었다.
가슴이 턱턱 막히던 순간, 이번에는 셋째 딸이었다. 엄마 뱃속에서 고문과 폭행을 함께 견뎌냈지만 거기까지였다. 결국 세상에 나온지 7개월만에 둘째 언니를 따라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가족과 남편, 아이 셋까지 잃고 홀로 된 송 할머니를 향해 시삼촌은 재가를 권유했다. 1남 2녀를 둔 제주 출신 남자와 만나 인천에서 살기로 약조했다.
6.25가 터지고 몇 달 뒤 아이가 들어섰다. 새 가정을 꾸려 인천으로 향하려던 찰나, 재가를 권했던 시삼촌이 남편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순간 하늘이 노래졌다.
먹먹한 가슴을 두드리며 제주를 떠났다. 1959년 동생 결혼식 참석차 제주를 찾은 그때, 전 남편과 조우했다. 오매불망 찾아나선지 11년, 재혼과 함께 제주를 떠난지 8년이 지난 때였다.
"다시 만났는데 말이 안 나오더라고. 남편은 술을 먹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지. 남편도 재혼해서 애를 낳았어. 우리가 시국을 잘못 만난거지. 그 사람, 결국 얼마 못가 죽었어."
"참 기구하지. 마지막 소원? 소원이 뭐 있나. 4.3같은 세상이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4.3으로 내 인생을 다 버렸어. 내 세상을 모두 다 버렸어. 그게 억울하지. 억울해."
프레시안=제주의소리 교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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