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4강 진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모두가 입만 열면 축구 얘기다. 골목에 나가봐도 붉은악마 옷을 입고 다니는 아이들, 어른들 천지다. TV도 그렇고 신문도 그렇다. 이쯤 되면 가히 '축구공화국'이다.
그러나 소수이긴 하나 일각에선 냉소적 시각도 발견된다. "월드컵에서 4강을 했다고 뭐가 달라지냐. 설령 우승을 한다고 해도 뭐가 달라지냐. 브라질을 봐라. 축구 잘한다고 꼭 나라가 잘되는 건 아니지 않냐. 결국 쇼비니즘적 집단환상만 증폭되는 게 아니냐"는 논조의 우려섞인 반응이다.
이같은 냉소는 일면 타당성과 설득력을 갖는다. 우리 사회는 지금 수많은 난제를 안고 있다. 국내정치, 남북관계, 경제 등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고, 복잡하지 않은 게 없다. 월드컵 4강 신화, 더 나아가 월드컵 우승을 달성한다고 해도 그 여파로 풀릴 수 있는 간단한 성질의 것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4강 신화' 달성에 대한 범국민적 열광은 일각에서 우려하듯 '쇼비니즘적 집단환상'으로 폄하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4강 신화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에 부단히 표출된 정치적, 민족적, 경제적 함의를 정확히 읽을 수 있다면, 왜 이번 범국민적 열광을 함부로 매도해서는 안되는가가 분명해진다.
***선수단·응원단·국민이 하나가 돼 자생적으로 표출한 민족적 자긍심**
월드컵 개막 이래 '4강 신화'를 달성하기까지 과정에 우선 주목해야 하는 현상은 '민족 자존심'의 표출이다.
10일 미국전때 극적인 동점골을 넣은 안정환 선수는 예의 '반지 세리모니' 대신에 '오노 세리모니'를 했다. 이 세리모니는 이천수 선수가 오노 역을 맡는 등 젊은 태극전사들이 대거 동참해,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때 맺힌 김동성 선수의 한을 대신 풀어줬다. 오노 세리모니가 탄생하기까지에는 "골을 넣은 뒤 오노 세리모니를 해달라"는 많은 네티즌들의 주문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젊은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보여준 이 한편의 세리모니는 전국민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을 뿐 아니라, TV화면으로 이를 지켜본 미국 등 세계인들의 뇌리에 '한민족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가를 각인시켰다. 그동안 우리는 솔트레이크 사태를 위시해 F15K 강제구입, 부시의 '악의 축' 발언 등으로 얼마나 민족적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던가. 미국의 워싱턴포스트 등은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더이상 추해지지 않으려면 한국이 보낸 메시지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쓰기도 했다.
18일 이탈리아전때에는 대전 스타디움에 모인 붉은악마들이 일을 저질렀다. 이날 스타디움에서는 'AGAIN 1966'이라는 대형 카드섹션이 펼쳐졌다. 1966년 북한팀이 이탈리아를 깼듯, 이번에는 남한의 태극전사들이 이탈리아를 깨자는 캐치프레이즈였다. 이탈리아는 크게 발끈했으나, 우리 선수들은 한층 비장한 각오로 경기에 임해 끝내 승리를 쟁취했다. 'AGAIN 1966'이란 카드섹션은 외형상으로 일종의 심리전이기도 했으나, 남북이 하나임을 전세계에 보여준 '통일지향 메시지'이기도 했다.
22일 광주 스타디움에서 열린 스페인전때에는 'Pride of ASIA'라는 카드섹션이 펼쳐졌다. 이번 경기가 단순히 한국을 대표하는 경기가 아니라, 아시아인들을 대표해 사상최초로 4강 신화에 도전하는 경기임을 보여주는 카드섹션이었다. 결국 혈투끝에 한국은 승리, 사상최초로 아시아국가가 4강에 진출하는 신화를 만들었고 이를 지켜본 아시아인들은 모두가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동안 정치·경제·외교적으로 세계무대의 변방으로 취급받았고 특히 97년 아시아 외환·금융위기후 그 정도가 한층 심해졌던 '상처입은 아시아의 자긍심 회복'이었다.
이같이 선수단, 응원단, 국민들이 일심동체가 돼 자생적으로 표출한 자존심은 우리 대표팀의 4강 진출이 단순한 축구경기에서의 선전 이상의 '시대성'과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산 증거들이다.
***'히딩크 쇼크'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4강 신화를 달성하기까지에 가장 널리 회자된 단어가 '히딩크'이다. '히딩크 쇼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스 히딩크 감독이 보여준 리더십은 정치, 경제, 사회 각 부문에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히딩크 리더십이라는 것은 결코 새로운 게 아니다.
전문 CEO를 영입했으면 그에게 전권을 주어야 한다. CEO는 학연, 지연, 혈연이나 연공서열 같은 봉건적 질서 대신에 능력위주로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 CEO는 고압적 권위로 통치하려 하지 말고, 직접 조직원들과 땀을 함께 흘리는 '현장경영'을 통해 조직원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조직원들은 월급 몇푼 받겠다고 끌려가는 식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신명나게 즐기며 목표를 성취해 나가야 한다.
이런 내용의 가르침은 그동안 숱한 경영교과서에 나온 내용들이었다. 문제는 정치, 경제, 사회 각 부문의 대다수 리더들이 이를 알고도 실천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런 와중에 히딩크는 축구라는 한 분야에서 이를 '실천'했고, 그 성과물을 웅변적으로 보여줬다. 지금 국민들이 히딩크에게 열광하고 있는 것은 그가 이룩한 4강 신화라는 결과물때문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속한 각 부문에서-학생들은 학교에서, 직장인들은 직장에서, 상인들은 장사판에서, 공무원들은 관료사회에서, 교육자들은 교육계에서- 목격해온 시대착오적 '봉건성'에 대한 강한 반작용의 결과다.
지난 19일 8강 진출이 확정된 다음날 청와대에서는 김대중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들간에 오찬회동이 있었다. 이날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축구가 '8강 신화'를 이룩한 만큼 이 여세를 몰아 '경제 8강 신화'를 이룩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 모임을 보는 세간의 시선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했다. 정치권과 경제계의 '자성(自省)'이 선행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경제 8강을 가로막는 걸림돌 역할을 해온 것이 지역정치와 떼거리정치에 연연해온 정치권이었고, 전문CEO 대신에 오너들이 군림해온 재계였음을 자성하지 않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한 독자는 4강 진출이 확정된 직후 본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다.
"사실이지 '오 대한민국'의 열정이 축구 때문만도 아니고 지금 당장 외국이 침략하니 조국을 수호하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속마음은 속 시원하게 사회가 진전되기를 바라는데 정치, 교육, 가정,....등이 하도 시원챦게 굴러가는 와중에 4강 진출 같은 놀라운 성과가 나오니 열광하는 것 아닌가? 이번 월드컵의 성과가 설사 100% 운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속마음은 멋진 신화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아이디 이동인)"
우리는 이번 히딩크 신드롬을 통해 우리 사회 구성원들 마음 곳곳에 내재해 있던 갈망과 분노, 바람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실현하기 위한 진정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때로는 안에서보다 바깥에서 우리의 모습이 훨씬 객관적으로 비치는가 보다.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은 24일 한국의 4강 진출과 관련, "한국은 2002년 한일월드컵 축구대회를 통해 국민의 일체감을 높이는 데 성공, 한세기에 걸친 꿈이었던 '크고 하나된 나라'인 '대한민국'의 실현을 처음으로 맛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요미우리는 "대한(大韓)이란 국호는 19세기말 일본과 러시아의 간섭이 강화될 즈음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채택한 것으로, '크다' '하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며 "한국 국민이 선수의 모습에 국가와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함으로써, 한국사회에는 강렬한 자부심과 일체감이 확산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요미우리는 그러나 앞으로 한국이 풀어가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열광의 경기장, 흥분의 거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면 남북분단, 정당대립, 지역대립의 현실은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았다"며 "현실사회를 덮고 있는 분위기는 무거우며 이는 '대한민국'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요미우리는 이어 "한국의 승승장구가 계속되고 있으나 스포츠에 위탁한 꿈은 끝나기 마련"이라며 "한국은 월드컵 이후 국회의원 보선과 12월의 대선으로 들어간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대선에서는 21세기 한국이 분단과 대립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여부가 시험받게 될 것"이라며 "한국민이 월드컵이라는 '일장(一場)의 꿈'에서 깨어났을 때 '대한민국'을 실현하기 위한 진정한 싸움이 시작된다"고 지적했다.
***냉소하지 말자. 이는 '엘리트주의'의 또다른 표현일 뿐이다**
요미우리의 보도는 4강 신화를 통해 우리가 성취한 것이 무엇이며, 월드컵대회 폐막후 '대~한민국'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진정한 싸움'이 무엇인가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4강 신화'에 부끄럽지 않은 '정치 신화' '통일 신화' '경제 신화' '교육 신화' '언론 신화' 등 각 부문의 '신화' 달성을 위한 싸움이다.
이같은 신화는 축구에서 '4강 신화'를 달성했다고 해서 곧바로 달성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태극전사들이 히딩크 감독의 지도 아래 오랜 기간 '지옥 훈련'을 감수했듯, 각 부문에서 지난한 자기파괴, 자기개혁의 '지옥 훈련'을 거칠 때에만 비로소 하나씩 성취할 수 있는 전리품들인 것이다.
한 개혁성향의 중진 언론인은 6.13지방선거 직후 기명칼럼에서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들의 신상명세를 줄줄 외우면서도 자기 동네에 나온 후보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유권자들에게 분노를 느꼈다"고 썼다. 그러나 이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식의 지나친 논리비약이며, 국민 개개인 마음속에 내재돼 있는 에너지를 간과한 유권자 모독이다.
4강 신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에 내재돼 있는 거대한 변혁 에너지를 확인했다. 이 거대한 용암의 물꼬를 어디로 돌릴 것인가는 이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 특히 리더들의 책임이다.
냉소하지 말자. 이는 '엘리트주의'의 또다른 표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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