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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그 앞에 놓인 '관료적 엘리트주의'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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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그 앞에 놓인 '관료적 엘리트주의'와의 전쟁

서울대 '50대 총장시대' 개막의 의의와 과제

정부가 16일 국무회의에서 지난달 서울대 교수투표에서 선출된 정운찬(55) 사회대학장 겸 경제학과교수를 서울대총장에 임명키로 의결함에 따라 정교수는 사실상 제23대 서울대총장으로 확정됐다. 김대중대통령은 빠르면 이번 주말께 정교수를 서울대총장에 임명할 예정이다.

정교수가 서울대 총장으로 사실상 뽑힌 것은 지난달 20일 서울대 교수투표에서 최다득표를 하면서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교육인적자원부 규정에 의해 이런저런 '신원조회'를 받다보니 한 달 가까이 시간을 끌게 됐다. 지난 78년 서울대교수 부임때 이미 했던 신원조회를 다시 한 교육부의 관료주의를 보면, 국립대학 총장을 맡게 된 정교수의 앞날도 결코 간단치만은 않을 성 싶다.

***서울대 위기가 선택한 '정운찬 총장시대'**

과정이 어떠했든 간에 여하튼 '정운찬 총장시대'는 개막됐다. 정운찬 심임총장은 이번에 선거에 출마한 5명의 후보자 가운데 가장 젊은 것은 물론, 역대총장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젊다. 그 어느 대학보다 보수적 색채가 짙은 서울대에서 50대중반의 총장이 나온다는 것은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정교수는 원래 이번 선거 출마를 꺼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울대 사회대학장을 맡은 것도 올초인 지난 2월의 일이다. 그런만큼 몇달도 안지나 총장직에 출마한다는 것은 모양새도 좋지않고, 때도 이른 것 같다는 게 정교수의 판단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같은 정교수 생각을 바꾼 것은 개혁 성향의 후배교수들이었다.

서울대 총장 선거를 하게된 것은 이기준 전임총장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때문이었다. 연간 4억5천만원대의 판공비로 명절때마다 국회의원 등 유력인사들에게 선물을 보내는가 하면, 규정을 어기고 재벌 사외이사를 맡아 해마다 거액을 받아온 사실이 드러나면서 가뜩이나 위태롭던 서울대 위상이 급전직하했던 탓이다.

이에 평소 정운찬 교수의 '개혁성'을 높게 평가해온 젊은 후배교수들이 "지금 서울대에 필요한 것은 개혁"이라며 정교수를 들볶다시피 압박해 그의 출마 약속을 받아냈고, 결국 스물세번째 서울대총장직을 맡기에 이르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정운찬 교수를 서울대 총장으로 만든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서울대의 위기'인 것이다.

***'서울대 불패신화'의 붕괴**

서울대는 누가 뭐래도 분명 아직까진 국내 최고 명문대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해체론'까지 거론될 정도로 지금 서울대가 안팎으로 직면한 도전은 결코 간단치 않다. 자칫 위기에 잘못 대처하다가는 '공룡'의 퇴화과정을 밟게 되는 게 아니냐는 위기감이 서울대 안팎에 팽배하다.

서울대 위기의 징후는 오래 전부터 곳곳에서 나타났다. 2년째 서울대 모집정원 미달사태가 발생했다. 대학원생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다른 대학으로 가라"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서울대의 향후 발전방향을 둘러싼 학내 갈등도 심각하다. 더 심각한 위기징후는 사회 일반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안티 서울대' 감정이다. 이런 마당에 이기준 서울대총장 스캔들이 터지면서 불난 데 기름 붓는 꼴이 됐다.

IMF사태후 곳곳에서 목격됐던 '재벌신화''관료신화' '언론신화'의 붕괴에 이은 '서울대 불패신화'의 붕괴다.

서울대는 일개 대학이다. 그러나 한국 교육계, 더 나아가 한국 주류집단내에서 서울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분명 일개 대학이상이다. 우리나라 CEO의 40%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통계만 보아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어디 경제계뿐인가. 관료계, 법조계, 언론계, 정치권 등 주류집단의 헤게모니는 거의 모두 서울대가 틀어쥐고 있다.

서울대의 개혁 성공여부는 그런 면에서 한국 주류사회의 변화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한 바로미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무거운 짐을 지금 정운찬 신임총장이 짊어지게 된 것이다.

정운찬 신임총장이 과연 위기의 서울대를 재건할 수 있을지는 아직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정총장 개인의 개혁성 하나만 갖고서 과연 치유가능한 간단한 성질의 것인지 여부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총장에게 거는 안팎의 기대는 크다. 정총장이 우리 사회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결코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정총장의 '일관성'**

정 총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잠시 한국은행에 재직하다가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 조교수를 거쳐 지난 78년 서울대 교수로 부임한 경력의 소유자다. 경력만 보면 그다지 그렇게 특출날 게 없다. 이 정도 경력의 소유자는 찾아보면 많기 때문이다.

정총장을 오늘날의 정총장으로 만든 것은 그의 '일관성'이다.

몇해전 일이다. 한국은행에서 한 때 우리나라 경제학자들의 성향을 대상으로 비밀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프로젝트의 요지는 이들 학자가 십수년간에 쓴 신문칼럼, 강연내용, 논문 등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학자별로 분류해놓는 작업이었다. '전문가 풀'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당시 작업에 참여했던 한 한은 중견간부의 증언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정교수는 논조의 일관성을 유지한 1%의 학자군에 속하는 분으로 분류됐다. 10년전이나 지금이나 그가 쓴 글의 논조나 원칙은 일관됐다. 대단히 드문 경우이다. 경제기자들도 어디 한 번 이런 기준으로 분류해보라. 몇명이나 이런 일관성을 갖는 기자가 발견되는지."

***반IMF주의자**

이 한은 관계자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정총장은 학자로서의 일관성이 분명하다. 예컨대 멀리 갈 것도 없이, IMF이후 대응을 살펴보자.

IMF로부터 긴급구제금융을 받은지 1백일이 되던 날, 정교수는 경향신문에 쓴 '위험한 고금리 정책'이라는 칼럼을 통해 IMF플랜과 이를 맹종하는 정부를 통렬히 비판했다.

"IMF 구제금융시대가 시작된 지 1백여일을 지난 지금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우리 경제가 가장 우려했던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미시적으로는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하고, 거시적으로는 무리한 긴축이 게속되는 가운데 크고작은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IMF 프로그램에서 제대로 해야할 부문, 즉 재벌개혁 등 미시적 개혁은 잘 실천되지 않고 있다. 반면 긴축적 거시정책만 현실화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경제의 끝없는 파란을 몰고올 '최악의 정책조합'이 될까 걱정스러울 뿐이다."

"고금리정책은 효과가 불확실한 반면 비용은 매우 크다. 이 정책을 무리하게 유지한다면 거시경제의 총체적 위축과 함께 기업.은행의 동반부실, 불균형 심화를 가져오고 우리경제의 취약한 구조를 더욱 취약하게 할 위험이 있다. 그 결과 대내외적으로 경제붕괴의 우려를 증폭시켜 외환 및 금융위기를 한층 심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결국 IMF의 지나치게 엄격한 거시안정 프로그램은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지 않을뿐 아니라, 경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 위기의 근본적 요인은 미시적 측면에서의 제도적 취약성이지 거시변수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긴축기조가 계속된다면 단기적으로는 실업과 사회불안 등 부작용을 낳을 수 있고 중장기적으로는 경제 전체이 마비를 초래해 궁극에는 구조조정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같은 정교수 지적은 지금 와선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보여지나, 글을 쓸 당시 분위기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당시는 김대중정부 출범초기였다. IMF프로그램을 비판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반정부, 반국가적 행위처럼 매도되던 삼엄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정부 출범직후 초대 한국은행 총재로 영입하려 할 정도로 호의적이던 김대중정부를 향해 정교수는 거침없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다.

***"망하면 절대로 안되는 기업은 없다"**

정교수의 일관성은 '재벌 문제'에 관한 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정교수는 기아차, 삼성차, 현대건설, 현대반도체 등 부실기업 처리와 관련해 일관되게 '시장의 법칙'에 따른 과감한 청산을 주장했다.

"망하면 절대로 안되는 기업은 없다.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법이다. 기업의 흥망은 어디까지나 시장이 판단할 일이다. 경제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시장원리에 합당한 것이어야 한다."(조선일보 2001.4.5에 기고한 '정부는 현대호에서 내려라'에서)

정교수는 같은 맥락에서 공적자금 투입은행의 민영화와 관련, 정부 일각에서 추진해온 은행소유 상한완화에도 단호히 반대했다.

"정부는 또다시 슬며시 은행의 동일인 소유한도 제한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중략)

재벌들에 은행을 소유하게 하되 경영에 간섭 못하게 하여 사금고화를 막겠다는 발상은 은행에 주인을 찾아주어야 경영이 효율화된다는 정부 스스로의 논리와 정면으로 충돌할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에서도 20년 또는 30년간 경제부처에서 일한 사람들의 견해치고는 참으로 순진하다 못해 유치한 것이다.(중략)

은행소유 상한 완화 후에 나타날지도 모를 은행의 재벌 사금고화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알지도 못하면서 행함은 알고도 행하지 않음보다 더 나쁘다. 아니면 알고서 행하고 있는 것인가?"(한겨레신문 2001.7.4에 기고한 '은행소유 상한완화 안돼'에서)

***정교수의 지지자들**

정교수의 이같은 일관성은 지지자와 동시에 적을 양산했다.

정교수의 지지자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김종인 전 청와대경제수석이다. DJ정부 출범후 정교수가 자신에게 온 한은총재, 금감위원장, 경제수석 등 각종 제안을 고사하면서도 유독 김 전수석에 대해선 DJ정부에게 재경부장관으로 추대할만큼 두사람 사이의 신뢰는 두텁다.

두 사람의 신뢰는 지난 86년 쌓여진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의 정권말기적 반동화 움직임이 극에 할했던 시대였다. 당시 전두환정권은 학원안정법 등을 제정, 폭발하는 민의를 진압하려 했다. 이때 민정당 소속이던 김종인 의원이 나서 학원안정법 제정에 반대해 이를 무력화시켰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김종인 의원은 당시 교수 등 양심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시작된 개헌서명운동 등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다. 특히 김 의원은 평소 주목하고 있던 정운찬 교수가 서울대 교수들의 개헌서명운동을 주도하다 해직될 위기에 처하자 적극 나서 구명운동을 펼쳤고, 그후 두 사람의 우정은 지금까지 변함없다.

정교수 제자들 사이에서도 그에 대한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다. 서울대 78학번인 한미은행 김광채 홍보실장의 증언이다.

"84년도에 정교수 강의 두 개를 들었다. 그때 정교수가 학생들에게 한 얘기가 '기업은 상당히 발전했는데 금융은 그렇지 못하다. 기업과 금융이 고르게 발전해야 나라가 산다. 한국은행은 내가 있어봐서 아는데 인재들이 가득하니 굳이 갈 필요없다. 사회에 나가 나라 발전에 기여하려거든 가능한 한 금융부문으로 가라'였다.
내가 금융부문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이었고, 나 외에도 많은 친구들이 정교수 조언에 따라 금융부문으로 진출했다."

재야경제학계에도 정운찬 사단은 즐비하다. 한 예로 현재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를 책임맡고 있는 김상조 소장(한성대 교수)은 정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은 수제자중 한명이다.

금융계에서도 정교수에 대한 신뢰는 대단하다. 지난 3월 한은노조와 경실련이 경제연구소, 국회의원, 언론인 2백10명을 대상으로 차기한은총재로 누가 바람직하냐는 여론조사를 한 결과, 정교수가 단연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포섭 0순위**

이렇듯 워낙 성향이 뚜렷하다 보니, '적'도 많다. 정교수의 적은 대부분 재벌이나 정부내에 많다. 워낙 신랄하게 정부실정을 비판하다 보니, 때로는 정부 고위관계자가 직접 나서 반론권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정교수를 '포섭(?)'하는 쪽으로 작전을 펴는 이들이 많다.

99년 7월의 일이다. 대우재단 이사회는 정운찬 교수를 신임이사로 선출했다. 외형상으로는 "기초학술 부문의 서적발간 사업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혔으나, 당시 부도위기에 직면한 대우의 실제 속셈은 지명도가 높은 정교수를 끌어들여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교수는 대우의 제안을 일축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다. 모재벌그룹 고위직 임원과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술이 몇잔 오가자 느닷없이 자신들이 강남에 짓고 있던 모고급 아파트 입주를 제안하는 게 아닌가. "따로 몇개 빼놓은 게 있다"는 식이었다. 모른 채 입주하면 몇억원을 그냥 챙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정교수는 그러나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다.

정교수는 DJ정부 출범직후 한은총재직을 제안했으나 이를 고사했던 까닭에 일각에선 그를 친여권인사로 분류해왔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지난해 5월 집권후를 대비한 '국가혁신위' 명단을 작성하면서 정교수를 영입대상 0순위로 꼽은 사실이 드러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서로가 그를 끌어당기고 싶어하는 셈이다.

***'관료적 엘리트주의'와의 싸움**

정운찬 총장의 절친한 대학동기중 한명이 김정태 국민은행장이다. 흔히들 김정태 행장을 'IMF 스타'라 부른다. IMF사태라는 극한위기가 도래하지 않았다면 증권계 출신인 그가 은행장이 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오늘날같이 한국 금융계를 대표하는 국제적 스타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정운찬 교수도 위기의 서울대라는 위기상황이 아니었다면, 50대중반에 서울대총장이 되기란 쉽지 않았을 듯싶다. 그런 면에서 정총장 앞에는 기회와 위기가 공존한다 할 것이다.

경제학자 정운찬은 이미 확실한 검증을 받았다. 그러나 서울대총장 정운찬은 이제부터 검증을 받아야 한다.

서울대가 풀어가야 할 과제는 첩첩이 쌓여있다. 서울대가 당면한 가장 큰 위기는 '관료적 엘리트주의'라는 지적이 많다. 독점공기업이 안고 있는 문제가 서울대에서도 그대로 목격된다는 이유에서다.

과연 개혁가 정운찬 총장이 어떤 결단과 선택으로 서울대의 위기를 풀어나갈지 주목할 일이다. 만약 서울대가 관료적 엘리트주의의 낡은 틀을 혁파한다면, 그 여파는 서울대 한곳에 그치지 않고 각 대학, 더 나아가 우리 사회 주류집단에 미치는 파장이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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