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태극전사들, 정말 고약했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태극전사들, 정말 고약했다"

18일 '한밭 대승'으로 우리는 대도약했다

정말 고약했다.
4천7백만 국민을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초조하게 만들다니, 정말 고약했다.

18일 밤 한밭(대전)에서 펼쳐진 한국-이탈리아전은 한마디로 보는 이의 피와 땀을 마지막 한방울까지 증발시키려는 듯 정말 '타는 목마름'의 연속이었다.

경기 시작 직후 얻은 페널티킥은 실패했다. 이상한 페널티킥 징크스였다. 이때만 해도 "미국전에서도 페널티킥을 실패하고 16강에 오르지 않았느냐"는 위안을 스스로 했다. 하지만 당연히 마음은 편치 않았다. 쉽게 풀어갈 수 있는 길을 두고, 일부로 험난한 길을 택한 기분이었다. 선수들의 몸도 무거워진 듯 보였다. 이탈리아 선수들은 거미처럼 우리팀 공격을 맥을 끊어나갔다.

이렇게 전반이 끝났다. 후반 들어 선수들의 몸이 한결 풀린 듯 보였다. 조금씩 심리적 충격에서 벗어나는 듯 싶었다. 특유의 벌떼 공격이 시작됐다. 하지만 쉽게 골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도 믿었다. "미국전때도 후반 33분에 골을 터뜨리지 않았느냐." 그러다가 후반 33분이 지나갔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일본처럼 1대0으로 탈락하는가'라는 불안감이 들었다. 1대0으로 지는 경기처럼 보는 이를 지치게 하는 경기도 없다. 특히 전반에 한 골을 먹고 내내 공세를 펴다가 지는 경기만큼 사람 진 빠지게 만드는 경기도 따로 없다.

40분이 지났다. '아, 이제는 힘들겠구나'라는 좌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기적이 시작된 것은 이때였다. 후반 43분의 일이다. 설기현 선수의 발끝에서 기적과 같은 골이 터졌다. 기적의 시작이었다.

후반전 종료 직전에는 차두리 선수의 멋진 오버헤드킥이 나왔다. 비록 상대방 골키퍼의 선방으로 골로 연결되지는 못했으나, 세계 최고기량의 선수들만이 보여주던 오버헤드킥이었다. 선수와 국민 모두의 '기'가 살아났다.

연장전은 일방적 공세였다.
다 이긴 경기를 놓쳤다는 허탈감에 빠진 이탈리아팀은 더이상 우리의 상대가 못됐다. 무차별 폭격이 계속됐다. 마침내 연장 후반 미국전과 똑같은 장면이 재연됐다. 이영표 선수의 절묘한 센터링이 골문 앞으로 날아왔다. 안정환 선수가 치솟으며 머리를 댔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골 네트가 출렁였다. 이것으로 모든 게 끝이었다. 4천7백만 국민은 미친 듯 환호했고, 이탈리아 선수들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런 기적과도 같은 드라마는 만화가게에 꽂혀있는 '스포츠 만화'에나 나오는 것이었다. 만약 어느 PD가 이런 스토리의 드라마를 만든다면 "애들 만화같은 드라마"라는 혹평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 어떤 만화보다도, 드라마보다도 더 극적인 믿기지 않는 드라마가 우리 눈앞에서 펼쳐졌다.

이탈리아 감독이나 일부 언론은 "한국의 홈 어드벤티지 때문에 승리를 도둑 맞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패자의 변명이다. 만약 우리가 전반에 얻은 페널티킥의 도움으로 승리했다면 이런 주장도 일정 부분 설득력을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전반에 얻은 페널티킥은 분명 이탈리아의 반칙에 의한 것이었고, 게다가 우리는 다행히(?) 그 페널티킥을 넣지 않았다. 그리고 선수 모두가 마지막 순간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뛰고 또 뛰어 이날의 기적을 창출했다. 우리의 실력으로, 우리의 근성으로 당당힌 쟁취한 승리이다.

이날 게임 시작전 관중석의 붉은 악마들은 '1966 AGAIN'이라는 가슴 절절한 카드섹션을 선보였다. 지난 1966년 북한의 박두익 선수가 이룩한 이탈리아 격침의 신화를 재연해 달라는 간절한 민족적 바람이었다. 우리는 36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이 민족적 바람을 실현했다. 안정환이 박두익이 되고, 박두익이 안정환이 됐다. 비록 축구 경기를 통한 것이기는 하나 남북의 하나됨이 이룩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못할 게 없다,겁날 게 없다"는 강한 자신감을 얻었다. 어느 카리스마적인 정치지도자가 이끌어낸 이데올로기적 집단최면이 아니다. 자그마한 축구공 하나가 각자의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이끌어낸 순수한 열정이고 자신감이었다. 이것만큼 귀한 성과가 또 어디 있으랴.

이제 우리를 보는 국제사회의 눈은 180도 달라졌다. 더이상 우리를 변방으로 보는 시선은 없을 것이다. 축구 하나를 잘했다고 해서 달라진 시선이 아니다. 축구를 통해 드러난 우리 민족의 근성과 투혼, 열정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에너지를 각 부문으로 빨아들여 도약하는 일만 남았다. 이는 각부문 지도자들의 몫이다. 세계 강국의 수준에 걸맞는 지도자들의 자기변신이 필요하다. 정치계에서도 경제계에서도 학계에서도 제2, 제3의 출중한 히딩크가 나와야 한다.

입으로만 히딩크 운운하는 껍데기들이 아닌, 국민 개개인의 진정한 존경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닌 참된 지도자들이 나와야 한다. 이럴 때에만 이번에 열린 '국운'은 경제도약, 남북통일, 정치발전의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축구공 하나가 만든 기적은 이렇게도 값진 것이다. 히딩크 사단 개개인에게, 그리고 4천7백만 국민 모두에게 서로 감사할 일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