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의 본래 취지는 '지역 일꾼'을 뽑는 것이다. 그러나 역대 선거가 그러했듯, 이번 6.13선거도 기존 정치세력간 대결로 치뤄졌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본질이 훼손된 것이다.
이같은 와중에도 전국 곳곳에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적지 않은 무소속 후보들과 시민단체 후보들이 이번 선거에 외로이 출마, 선전했다. 또한 부패 혐의를 받고 있는 자치단체장들은 어김없이 낙선했다. '풀뿌리의 승리'이다.
이는 숱한 시행착오와 좌절 속에서 그래도 우리나라의 지방자치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가운 증거들이다.
***<'풀뿌리 승리' 1> 명암 엇갈린 미 문화원 동지, 신정훈과 김민석**
무소속으로 인구 10만명의 전남 나주의 시장 선거에 출마, 현시장인 김대동 민주당 후보를 물리친 신정훈(38) 당선자가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신 당선자는 광주와 전남·북을 통틀어 역대 최연소 민선 단체장 당선자이다.
그러나 신 당선자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이런 연령상의 이유때문이 아니다. 그가 말없이 걸어온 인생역정이 한 시대의 정신과 순수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신정훈 당선자는 '전형적인 투사'다.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 재학중이던 그는 지난 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으로 3년형을 살아야 했다. 같이 미문화원 점거에 관여했던 김민석은 그후 중앙 정치권으로 진출, 화려한 정치경력을 쌓아 나갔다. 그러나 신 당선자는 '반대의 길'을 택했다. 농부의 길이었다.
그는 고향 나주로 내려왔다.
고향에 내려와 2천여평의 배농사를 직접 지으면서 그가 한 일은 힘없는 고향의 어른과 친구들을 대변하는 농민운동이었다. 그는 나주농민회를 결성해 사무국장을 맡으며, 수세(水稅) 거부투쟁을 주도하다가 또 다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수세 거부운동으로 전국의 농민들은 연간 1천여억원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출옥후 나주농민회를 전국 최대규모의 농민회로 키워냈다.
나주지역 농민들은 그의 헌신적이며 열정적인 자세에 매료됐다. 95년 제1회 민선 지방선거가 시작되자, 농민들은 그를 '농민후보'로 등 떠밀었다. 그는 농민들의 전폭적 지지에 힘입어 32세의 나이로 최연소 도의원으로 지방의회에 진출했다.
그는 황색바람이 호남을 강타했던 98년 제2회 지방선거에서도 도의원에 재선되는 등 7년여에 걸친 도정활동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나주시장 선거에 첫 도전해 뜻을 이뤘다.
그가 나주시장에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헌신적인 농민운동외에 올곧은 도의회에서의 의정활동 때문이었다는 게 지역구민들의 전언이다. 그는 민주당 일색인 도의회에서 말 많은 '도청 이전'을 결의했을 때에도 외롭게 광주·전남 통합을 외치며 반대했다.
신 당선자는 당선 소감을 묻은 기자들에게 "깨끗한 시장이 돼 신바람 나는 나주를 이룩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왜 여지껏 화려한 투사 경력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텃밭인 이 지역에서 민주당 공천이 아닌 '무소속'을 고집했는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의 학생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지난 68년 도쿄대 점거사건이 있은 뒤 상당수 도쿄대 학생들은 고향으로 내려갔다. 반미자주운동을 펼치다 좌절감을 맛보았던 이들 도쿄대생이 선택한 것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이었다. 그후 일본의 지방자치는 비약적 발전을 보았다는 게 일본전문가들의 전언이다.
신정훈 당선자가 택한 길은 도쿄대 학생들과 일정 부분 맥을 같이 한다 할 수 있다. 중앙을 바꾸기 위해선 밑으로부터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 당선자는 중앙정치권을 택했다가 이번에 큰 좌절을 맛본 민주당의 김민석 서울시장 후보 등 미 문화원 동료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하겠다.
신 당선자의 '작은 승리'가 크게 비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풀뿌리 승리' 2> 1천만원 쓰고 당선된 25살의 '젊은 시민후보'**
이번 선거의 또다른 관심사중 하나는 시민·환경단체들의 선전 여부였다.
고양 환경운동연합, 고양 여성민우회 등 고양 지역 시민·환경단체들은 이번 지방선거에 '고양시민행동'이라는 연대 단체를 구성, 시장을 포함해 도의원 1명, 시의원 14명 등 모두 16명을 출마시켜 시의원 8명이 당선되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선거운동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선거운동기간에 기존정당 출신이 아닌 깨끗한 '시민후보'라는 점을 부각시켰지만 유권자들의 무관심 속에 "시민운동이나 잘하지. 너희들은 다를 게 뭐냐"는 냉소적 반응마저 나왔다.
그러나 이들 후보는 좌절하지 않았다. 이들은 운동기간에 선거 사무실을 재활용품으로 꾸미는가 하면 바람개비 자전거 유세, 풍력발전기가 설치된 저공해 유세차량 등 튀는 환경적 아이디어로 한 걸음씩 유권자들에게 다가갔다.
그 결과 이치범(47) 고양시장 후보는 비록 4위에 그쳤지만 일반의 예상보다 높은 11%대의 높은 득표를 했다. 또한 시의원 출마자 14명 가운데에서는 8명이 당선되는 쾌거를 올렸다. 특히 이들 당선자는 부의장 출신이나 전직 시·도의원을 당당히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고, 일부 낙선 후보도 선전 끝에 간발의 표차로 아깝게 떨어졌다.
고양환경운동연합의 이태일 국장은 이번 선거결과와 관련, "도지사 선거에서 손학규 한나라당 후보 바람이 일자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를 찍는 것이 지역발전에 유리하다는 대세론이 불어 단체장 선거에서 고전했다"고 말했다. 그는 "선진국 자치단체장은 70%가 무소속이라는 점을 감안해 정당추천제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이번 선거의 제도적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환경연합은 이번 선거에서 8명의 시의원 당선자를 냄으로써 귀중한 진전을 이룩했다. 특히 고양 환경운동연합의 사업부장인 김혜련씨가 25세의 나이로 당선돼 최연소 시의원 당선의 영광을 안은 점은 적잖은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김 당선자는 내세운 공약은 "화정 전철역 주변에 우후죽순으로 들어서 있는 나이트클럽, 안마시술소, 유리방 등 퇴폐향락업소를 추방하고 불법 주차를 뿌리뽑는 것"이었다. 고양시가 환락의 장으로 타락하고 있는 데 대한 지역구민의 불만을 정확히 대변해 젊은 나이에도 시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다.
김 당선자는 지난 2000년 단국대 정외과를 졸업한 뒤 잠깐 백화점 프로그램 기획 일을 하다가 그후 줄곧 환경운동연합에서 시민운동을 해 온 미혼의 경상도 여성이다. 그는 부산에서 올라오신 부모님과 함께 지난 3월 고양시 화정지구로 이사오면서, 고양 환경운동연합 사업부장과 주거환경개선을 위한 화정동 공동대책협의회 사무국장을 맡는 등 지역 환경운동을 벌이다가 이번에 출마해 당당히 당선될 수 있었다.
김 당선자는 이번 선거 기간중 알뜰하게 선거를 치른 점도 '시민후보'답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선관위가 정해준 시의회 출마자의 선거비용 상한액은 2천8백만원. 김 당선자는 그러나 "1천만원으로 너끈히 선거를 치렀다"며 돈 안쓰는 깨끗한 선거운동이 가능함을 몸으로 보여줬다.
***<'풀뿌리 승리' 3> 부패시장 물리친 '돌아온 성남 터줏대감' 이대엽**
이번 6.13 선거의 또다른 관심사중 하나는 과연 부패혐의를 받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물갈이 여부였다. 선거에는 '심판' 기능도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상한 관심을 끈 선거구가 경기도 성남이었다.
개표 직전까지도 민주당은 물론 한나라당 도지부조차 현 성남시장인 김병량 민주당 후보의 압도적 우세를 예상했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당선자는 영화배우 출신으로 3선 국회의원을 지낸 한나라당 이대엽(67) 후보였다.
김병량 후보는 파크뷰 아파트 특혜분양 스캔들과 함께 선거 직전 다시 불붙은 백궁·정자지구 용도변경 특혜의혹에 깊숙이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성남 일대 시민단체들은 몇년 전부터 김 후보의 부패 의혹을 제기하며, 김 후보의 재선 여부를 이 지역의 '시민의식'을 잴 수 있는 바로미터로 여겨왔었다. 김 후보가 낙선하자 시민단체들은 '시민의 승리'라며 환호했다.
그러나 이번 승리가 가능했던 데에는 김병량 후보의 맞은 편에 섰던 이대엽 한나라당 후보의 '경쟁력'도 큰 작용을 했다는 게 지역주민들의 주장이다.
젊은 유권자들에게는 이대엽이란 인물은 낯선 존재다. 그러나 성남지역 토박이들은 아직도 '이대엽 신화'를 잊지 않고 있다.
이대엽은 60~70년대 한국영화계의 스타중 한명으로 '돌아오지 않는 해병' 등 숱한 히트작에 출연했었다. 그러다가 정치권에 들어온 것은 80년대초. 그는 81~92년간 내리 3대에 걸쳐 이 지역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신영균, 신성일 등 동료 연예인들이 모두 지역구에서 단명했던 것과는 달랐다.
요즘은 분당 등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크게 바뀌었으나, 80년대만 해도 성남시는 가난한 도시빈민들이 모여살던 가난한 도시였고 수도권 일대에서 호남출신 비율이 가장 높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대엽 의원은 85년 2.12 총선 돌풍이 전국을 강타했을 때에도 이 곳에서 의원직을 고수했다.
이유는 단하나였다. 이대엽 의원은 12년간의 의원 재직기간중 성남을 비우지 않았다. 대다수 지역구 의원들이 선거철이 다가와야만 지역구에 얼굴을 비치는 것과는 달리 그는 거의 모든 시간을 지역에서 보냈다.
이대엽 의원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성남 달동네를 누비며, 아무런 집이나 "밥 한끼 같이 먹읍시다"라며 밀고 들어갔다. 본인의 표현을 빌면 "이렇게 12년을 누비다 보니 나와 밥 한번 같이 안 먹은 주민이 없고 조금 과장하면 누구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를 알 정도"로 시민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됐다. 요즘 경영계를 휩쓸고 있는 표현을 빌면 'CEO 현장경영'에 충실했던 셈이다.
그러나 13대 의원을 마지막으로 90년대 들어 이 지역에 중산층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이대엽이란 이름은 빠르게 잊혀져 갔다. 그 결과 그는 지난 10년간 자민련 등을 전전하며 퇴물 대접을 받아왔다.
그러던 중 지난 3월 더이상 의원에 대한 미련을 접고 눈을 지방선거로 돌렸다. 그는 당적변경 파동을 딛고 자민련 탈당 3개월만에 한나라당 경선에서 시장후보로 선출됐다. 이 당선자는 당시 경선 1차 투표에서 2위로 결선에 올라, 이관용 후보를 9% 포인트 차로 뒤집어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가 과연 성남시장에 당선될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 시선이 일반적이었다. 지난 92년 국회의원 낙선후 10년간의 정치공백과 고령이 약점으로 지적됐다.
그러나 때마침 폭발한 파크뷰 아파트 의혹에다가 그 특유의 현장 친화력으로 그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 놓았다. 그는 선거운동 기간중 개인유세와 토론회 참가를 거부하는 대신, 맨몸으로 골목골목을 누비는 예의 전략으로 바닥표를 공략했다. 아직도 성남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가난한 유권자들은 '돌아온 성남 터줏대감'을 반갑게 맞았고, 그 결과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성남시장에 당선될 수 있었다.
이대엽 당선자가 앞으로 성남시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갈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전임 시장이 부패 혐의로 낙마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며, 그를 선택한 유권자들이 예의 가난한 성남 시민들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성남시가 더이상 스캔들에 휘말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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