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1일(음력 3월1일). 이날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장터에 모인 약 3000여 명은 목청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3.1절 만세운동이라고 기록 된 이날 시위는 일제의 강제진압으로 19명의 사망했으며 다수가 부상을 입고 일제경찰에 끌려가 투옥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3.1 만세운동의 표상인 유관순도 이 곳에서 체포 돼 투옥, 옥중에서 순국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항거:유관순이야기' 에서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유관순이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으로 체포 된 후 옥중 행적을 담고 있다.
영화 속 인물 중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감옥에 같이 수감됐지만 유관순의 독립운동을 비난하는 노인이 한명 등장한다. 영화의 극적요소를 위해 등장시킨 허구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 노인은 독립운동 기록에 남아 있는 실존 인물이다.
유관순과 함께 아우내장터에서 체포돼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던 '신씨(申氏)'가 바로 이 사람으로 추정된다. 국가기록원이 보존하고 있는 독립운동 관련 1919년 6월30일 판결문에 따르면 '신씨'는 유관순과 같이 체포 돼 투옥됐다가 경성복심법원에서 유죄부분 취소, 무죄가 선고 된 사람으로 기록 돼 있다.
병천에서는 그를 '신씨 할머니'라고 불렀다. '아무개'나 '언년이' 등으로 불리며 제대로 된 이름도 없었다. 그 시대 여자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호적에도 그저 신(申)이라는 성만 올라있어 판결문에서도 이름 대신 '신씨'라고만 기록했다.
아우내장터에서 유관순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다 체포 된 '신씨 할머니'. 그는 왜 옥중에서 유관순에게 가시 돋친 말을 했을까.
당시 3.1 만세운동으로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19명으로 이 중 유관순과 함께 시위를 주도했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같은 고향에서 얼굴을 맞대며 가족처럼 지내던 사람이었다.
향토사학자 임명순씨는 "촌에 살던 할머니가 나라를 위해 태극기를 들었다지만 눈 앞에서 가족처럼 지내오던 마을 사람들이 총에 맞아 숨지는 모습을 지켜봤어야 했다. 게다가 자신도 일제경찰에 체포되는데 남겨질 가족들 걱정에 두렵지 않았겠느냐"며 "나라를 잃은 슬픔에 앞서 그저 늙은 노인의 마음으로는 만세운동을 계획한 유관순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일제경찰에 체포돼 끌려가면서 오열했다는 '신씨'는 서대문형무소 출소 후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신씨'의 이웃 대부분이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하다 죽거나 고초를 겪었다. 그들 중 일부는 병천면 유관순 열사 추모각 곁에 마련 된 순국자 명단에 기록 돼 그 넋을 기리고 있지만 그 곳에서도 '신씨'는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아무런 서훈없이 등재 된 한 여성 '신휴(申休)'라는 인물이 '신씨' 일 것이라 추정 할 뿐이다. '신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는데다가 살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과 기록 일부가 신씨와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정부가 독립유공자와 순국자를 조사하며 아우내 만세운동 관련자들의 기록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재판에 남아 있던 신씨의 이름 한자 씨(氏)를 얼핏 비슷한 휴(休)로 기록해 '신휴'라는 이름으로 순국자 명단에 올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향토사학자들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독립운동가의 발굴과 시대상황 연구에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아우내 만세운동의 본거지인 천안시도 2000년대 초반 이후 독립운동 관련한 연구는 사실상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기존 독립유공자에 대한 공적조사와 인물 확인 작업은 물론 아직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독립운동가 발굴 작업도 더디게 진행 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역사적으로 기록 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기리며 추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국의 독립은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의 힘으로만 이뤄낸 것이 아니다. 당시 독립운동에 나섰던 사람들은 마을의 이웃이고, 친구이며, 가족이던 평범한 민초(民草)들"이라며 "역사에 잘못 기록 된 부분은 바로잡고, 알려지지 않았던 기록을 찾아가며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어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신씨처럼 '이름이 없는' 사람도, 또 이름 석자 있어도 '이름도 없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던졌던 사람들을 찾아내 그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남겨진 우리의 몫이며 그들을 위로하는 길"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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