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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그라스, " 한국의 통일의지는 부시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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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그라스, " 한국의 통일의지는 부시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

3가지 통일원칙 제시, 상호존중. 단계적통일, 문화동질성

현대독일문학을 대표하는 문호이자 '인류의 양심'이라 불리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귄터 그라스가 29일 중앙대 아트센터 대강당에서 한국이 나아가야 할 통일방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날부터 30일까지 이틀동안 중앙대 한독문화연구소(소장 전영운 독문과교수) 주최로 열리는 이번 '통일과 문화' 심포지엄에 초청강사로 나온 귄터 그라스는 독일 통일의 실패사례에 기초해 한국민이 나아가야 할 통일방향 및 원칙에 대한 3가지 조언을 했다.

첫번째는, 부유하다고 깔보지 말고 남한사람들이 북한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통일의 가능성이 열린다 하더라도 통일을 너무 서두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세번째는, 문화적 동질성을 통일의 밑거름으로 적극 활용하라는 것이었다.

귄터 그라스는 또 현재 북한의 식량난이 대단히 심각한만큼 정치적 이해관계나 타산을 떠나 북한에 대해 무조건적인 식량지원을 할 것을 조언했다.

한국에 최초로 방한한 세계적 양심 귄터 그라스의 강연 전문을 지상중계한다.

***통일은 계속 풀어나가야 할 과제**

저는 경험들이 담긴 가방을 들고 서울로 향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가방에 통일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한국에서 얻은 새로운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독일로 돌아가게 되겠지요.

"여행은 교양을 쌓게 해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작가들에게도 해당 됩니다. 작가들은 보통 과거와 과거의 파편들을 추적하곤 합니다. 제 글들이 독일의 과거와 그것이 남긴 짐을 많이 다루고 있지만, 모든 작품은 현재의 시각에서 쓰여진 것들입니다. 1995년에 나온, 이중성을 띠고 있는 소설 '광야'는 독일의 통일이라는 5년 전의 과거사가 남긴 결과 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서 1871년의 독일 민족국가 건립 시기까지 반추하고 있지만, 이 소설 또한 현재에서 출발한 작품입니다.

이 소설이 출간되자, 여기 저기서 비판이 나왔습니다. 저는 사실 이런 현상에는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엄청난 분노를 몰고 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건 제가 통일로 말미암아 혼란을 겪은 동독인의 시각에서 소설을 썼기 때문입니다.

동독인들은 40년간 일당 독재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의 실패자라거나, 서독에 진 패배자로서가 아니라 나름대로 당당하게 통일의 기쁨을 누려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동독인들은 당당한 주체로서 대우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물어본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민주주의 이해는 아직 사용되지 않은 듯 보였지만, 그 만큼 신선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형제와 자매로 불렸던 서독인들은 그들에게 너무도 자주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마치 식민지 사람들을 대하듯 동독인들을 얕잡아 보기도 했고, 파산선고를 받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재산을 압류하여 이득이나 챙기려는 것처럼 점점 더 탐욕스러워졌습니다. 여기에 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서둘러 설치한 신탁청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충분한 민주적인 감독도 없이, 오히려 가공할만한 범법 에너지까지 가끔 사용해가며, 구동독의 산업과 경제부문을 당시 표현을 따르자면 "청산"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공장장으로부터 시작하여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서독의 지도층들은 감히 자신들의 잣대로 평가하려 들었습니다. 당시 유행한 "청산"과 "평가"라는 단어는 그러나, 혹독한 현실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시 한번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올바른" 신조가 무엇인지 물어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 보겠습니다. 서독의 통화를 성급하게 도입하고 동독의 경제적인 잠재력을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새로운 주인에게 넘겨준 처사는 시간은 걸리더라도 동독이 독자적으로 자신을 추스를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였고,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무서운 실업률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몰수를 통해 생사수단의 약 90%가 서독인의 손에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제 소설에 '광야'는 이러한 발전과정의 시작단계를 펼쳐 보이면서 거기서 희비극적인 특성과 나아가 부조리를 부각시키고, 배려라는 미명을 쓴 동독의 간첩 체제와 아울러 그저 돈 밖에 모르는 서독인들의 사고를 적나라하게 들춰냈을 뿐입니다. 하지만 현실이 보여준 그 다음상황은, 공공연히 비관주의자라는 평을 듣는 저까지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서독의 헌법에는 기본법의 마지막 조항에 통일이 될 경우, 독일 국민 전체를 위한 새로운 민주 헌법을 제정의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계명을 무시함으로써 새로운 헌법제정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효력을 발생한 것은 오직 한가지, 연방가입조항이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헌법 제정을 놓고 동서독 양쪽의 시민들이 참여 할 수 있는 토론의 가능성도 막혀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의견을 하나로 통일하기도 전에, 이미 '통일'은 문서 위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통일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통일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그래서 쉬지 않고 계속 풀어나가야 할 과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독일인들은 축하를 받을 만 합니다. 우리에겐 통일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더라면, 우리는 서로를 찾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 정책과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통해 우리 독일인에게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후원해줬을 뿐 아니라 통일을 눈감아 주었습니다.

그 첫 번째 계기는 60년대 중반 장갑차공산주의에 억눌린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개혁 시도 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있었던 폴란드의 자유노조운동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동독인들도 시위를 벌이며 적극성을 보였습니다. 서독인들은 이러한 발전과정을 지켜만 보고 있다가, 동쪽의 집권 세력이 무너지자 그제야 나섰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예외사항도 있습니다. 만일 서독이 긴장완화정책에 기여하지 않았더라면 통일의 전제조건이 형성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소련 정부와 모스크바에서 최초의 협정을 맺은 사람은 사민당 당수 빌리 브란트였습니다. 빌리 브란트와 자민당 출신의 부수상 발터 쉬일은 야당인 기민당의 저항을 무릅쓰고 '오더-나이쎄'선을 독일과 폴란드를 가르는 최종적인 국경으로 인정해 줌으로써 독일인과 폴란드인 사이에 깊이 패인 골 위로 다리를 놓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 뿐 아니라 전 유럽을 갈라 놓은 '철의 장막'이 역사의 폐물로 처분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삼십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시치푸스의 과제처럼 보여집니다. 말하자면 미완성 작업으로 보이는 것 들입니다. 바위는 꼭대기에 머물러 있는 법이 없습니다. 바위는 항상 골짜기에 굴러 떨어진채 다시 꼭대기로 밀어 올려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남한과 북한의 앞에 놓여있는 것 또한 바로 이와같은 시치푸스의 과제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저는 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봅니다. 과연 아직 끝나지 않은 독일 통일의 과정을, 이제 막 통일로 나아가려는 한국의 그것과 비교 할 수 있을까?

물론 공통점도 있긴 합니다. 우선 한국과 독일의 분단은 똑같이 2차대전과 이데올로기에 채색된 냉전의 결과라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중요한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유럽과 그곳에 있는 독일에서는 냉전이 뜨거운 격전을 낳은 적이 단 한번도 없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냉전은 아마도 더없이 뜨거운, 격렬한 전쟁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3백만 명의 사망자가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 바깥에 이 나라의 시민들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과정을 장려해줄 강대국이 과연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쉽게 답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독일인들에게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도움이 되었듯이, 한국인들이 원하는 통일을 장려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눈감아주는 것은 이제 미국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태로 봐서는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미스터 부시'는 다른 국가들외에 북한까지 깡패국가라고 천명했습니다.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하는 한 나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자신의 위력과 전권을 확인하기 위해서 늘 새로운 적을 만들어내야 하는가 봅니다. 그렇지만 독일에서 얻은 제 경험에 비춰 말씀드리자면, 통일을 위한 염원과 의지는 그것이 살아있는 한 어느 미국대통령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며, 언젠가는 통일된 한국의 시민들에게 통일에 대한 잠깐 동안의 기쁨과 함께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겨줄 것입니다.

오늘 저희가 이 자리에서 나눌 대화와 의견 교환이 바로 그 고민거리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경험이라는 것이 다른이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지만, 상호 중개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이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틀림없이 힘겨울 그 노정에서 마찬가지로 힘겨운 통일과정에서 독일이 겪었던 실수를 꼭 반복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몇 가지 말씀만 드려보고자 합니다.

1. 서독인에게는 동독인들에 대한 존경심이 결여돼 있었습니다.

서독인들은 40년 동안 권위적인 일당체제의 지배를 받으며 외국의 원조도 받지 않고-예를 들면 서독은 마샬 정책의 덕을 많이 보았습니다- 냉전의 후유증을 치러야 했던 동독인들의 삶을 그다지 존중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존경심 결여는 오로지 '가난한 독일인'과 '부유한 독일인'만 있다는 식의 근시안적인 평가를 낳았습니다. 말하자면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을 늘 징징거리는, 그래서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가난한 친척 쯤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 결과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서, 대부분의 동독인들이 자신들을 '독일의 2등시민'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문제는 한국에서도 등장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국이 독일과 유사한 형태의 통일을 하게 되어 부유한 남한이 가난한 북한에게 승자의 입장을 취한다면 그렇게 되기 십상입니다.

2. 통일의 가능성이 열린다 해도 한국에서는 통일을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독일에서도 단숨에 통일을 하지 않고 두 국가의 연합체제(연방제)라는 과도기를 거쳐야 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서독 통화의 성급한 도입은 많은 것을 파괴했고, 행복한 순간은 잠깐이었습니다. 일단 연합체제 안에서 남한이 북한에 경제적인 지원을 해준다면, 훗날 두 국가가 완전히 하나로 통일될 때 북한인들은 남한인들과 어느 정도 대등한 파트너로 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 서독의 빌리 브란트 수상은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준비하면서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구호를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사려 깊은 행동방식은 훗날 무시되고 말았습니다.

3. 두 국가로 분단된 한 민족의 문화적 토대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독일의 경우 동서독이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수준이 서로 다르고, 상호대립된 블록에 군사력을 지원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실체만은 결코 나뉘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990년 저희 독일에 통일의 종이 울렸을 때 서쪽에서는 문학까지 포함하여 동독의 예술을 '어용 예술'이라고 비방하며 역사의 쓰레기장에 던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서쪽의 이러한 검열은 관철될 수 없었습니다. 동독과 서독의 펜클럽까지도 오랜 논쟁 끝에 결국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남한과 북한의 예술가와 작가들도, 아직은 나뉘어져 있는 같은 나라의 유대를 강조하며, 비판은 하더라도 상대방의 예술을 존중해주고 제대로 평가하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문화는 이데올로기와 경제에서 비롯된 제약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특히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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