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 도지사가 비서 성폭행 혐의로 최근 법정 구속됐다. "피고인(안 전 지사)의 위력 존재 자체는 인정되나, 위력이 행사되지 않아 무죄"라던 1심 판결을, 2심 재판부가 뒤집었다. 이로써 미투 운동은 새로운 변곡점을 맞았다.
그러나 한계도 있다. 피해자가 엘리트이거나, 가해자가 유명인인 경우에 주로 공론화되는 한계다. 평범한 가해자가 보통 사람에게 일상에서 저지르는 성폭력은 대부분 그냥 묻힌다. '직장 내 성폭력'은 특히 그렇다. 직장 내 권력 관계에서 아래쪽에 있는 피해자가 성폭력 사실을 공개하기란 매우 어렵다. 생계와 경력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탓이다.
평범한 여성 노동자의 눈으로 '미투' 운동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김명희 <노동과 건강> 편집위원장이 진행한 좌담이다. 한국여성노동자회, 직장갑질 119, 시민건강연구소 등에 각각 몸담고 있는 이을, 전수경, 김성이 활동가가 참가했다. 기록 및 정리는 한지훈 노동건강연대 활동가가 맡았다. 지난해 말, 서울시 사당동 시민건강연구소에서 진행된 좌담을 소개한다.
김명희 : <노동과건강> 이 노동안전 분야나 환경보건 분야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주요 독자들이고, 주류화되지 못한 주변부 노동 이슈를 파악하는데 나름 도움이 된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희롱 문제는 이 지면에서 별로 다룬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우선 소속 단체와 각자의 활동 분야를 좀 소개해주세요. 저만 해도 여성노동자회를 노동조합으로 착각했거든요.
이을 : 여성노동자회는 노동조합은 아니고요. 여성노동자들의 문제에 천착해 활동해 온 조직입니다. 1987년도에 설립되었고 2018년이 31주년이었죠. 노동운동이 한창 거세게 일어나던 시기에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는 거기서도 부수적으로 다루어졌다고 해요. 여성 노동자들이 가진 진보적 시각을 운동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거죠. 지금은 11개 지역 지부가 있는 전국 조직이에요. 최근 저희가 가장 관심을 두고 활동하는 것은 '성별임금 격차 해소' 입니다. 최저임금이라는 단어와 비정규직이라는 말을 여성노동자회가 가장 먼저 제기했다고들 해요. 1997년 IMF 이후 여성노동자들이 엄청나게 해고되었지만, 여성노동자라는 게 그렇잖아요, 노동하고 있는데 노동하지 않는다고 여겨지고, 실업률에도 잡히지 않는 상황이 많았던 거죠. 그런데 저희가 운영하는 '평등의 전화'를 통해서 '내 임금이 너무 적다' 는 상담이 온 거에요. 최저임금을 올려야 여성노동자들의 열약한 노동환경을 개선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 운동을 계속 해왔고, 이것이 '성별임금 격차' 개념으로 이어진 거죠. 2016년부터는 '성별임금 격차 해소를 위한 '3시 STOP 조기퇴근' 캠페인을 하고 있어요.
김명희 : 저희 시민건강연구소 노동조합도 참여했습니다.
이을 : 그리고 '성별임금 격차 해소' 활동의 하나로 '임금차별 타파의 날'이라는 것도 만들었어요. 사실 한국의 성별임금격차가 OECD 국가들 중 1등이라는 것은 다 잘 알고 계시잖아요? 전체적으로 남녀 임금 비가 100대 64인데, 여성노동자의 과반수가 비정규직이고, 남성 정규직과 여성비정규직을 비교하면 100대 38 정도가 나오거든요.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거죠. 38로 임금을 계산해보면 여성노동자들은 1년 중 5월 18일까지만 일하면 되요. 나머지 날들은 무급으로 일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래서 5월 18일을 임금차별 타파의 날로 정해서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는 무급으로 일하고 있다'는 걸 알리고 있어요. 모성, 부성권 문제도 다루고 있는데요. 이건 사실 유리천장 문제와 직결되어 있어요. 임신·출산·육아 때문에 여성은 채용부터 차별을 겪고, 모성, 부성권 문제가 사회적으로 잘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여성노동자들은 고용 단절을 경험하게 되거든요. 올해 더 열심히 활동했던 것은 채용 성차별인데요. '성별임금격차'라는 큰 틀 안에서 보자면, 이것이 여성노동자가 노동 세계에서 차별받는 첫 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에 중요한 이슈라고 생각합니다.
돌봄노동 문제도 주요 활동 영역이에요. 가사관리사, 요양보호사, 장애인활동보조인 같은 돌봄 노동을 여성들이 많이 하잖아요. 성별분업에 해당하죠. 국가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지만 수가를 떼고 하면 돌봄 노동자의 임금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있어서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요. 가사관리사는 법적으로 노동자성이 인정되고 있지 않아요. 근로기준법이 만들어진지 62년이 지났지만 가사관리는 제외한다는 조항이 아직도 남아 있고, 고용보험 등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거든요.
김명희 : 민주노총이 있고 민주노총 안에도 여성분과가 있는데, 활동에서는 어떤 부분이 다른 건가요?
이을 : 저는 민주노총에서 활동을 안 하고 조합원도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노동안전보건 활동 고민과 비슷할 거라 생각해요. 조합원 숫자가 얼마인데 노동안전보건 담당자는 달랑 몇 명. 민주노총에도 여성 부서가 있고, 사업장에도 여성 담당자가 있지만 총무국장 플러스 여성, 이런 식으로 겸하는 것 같아요. 역사 속에서 여성들이 노동을 안 한 것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임금노동 시장 안에서 남성노동자들이 훨씬 많고 먼저 조직된 사람 중심이니까 후발주자였던 여성의 이야기는 작게 들리는 것 같아요. 민주노총에서 최근에 여성노동자 토크쇼를 하는데, 성별분리가 심한 곳에서 일하는 여성들, 철도기관사, 비행기조종사. 이런 분들이 공통적으로 여성이 너무 소수다, 더 많은 여성이 들어오면 좋겠다 하더라고요.
김명희 : 보건의료 부문처럼 여성노동자가 많다고 해서 이들의 목소리가 다수파인 것도 아니에요. 존재 이유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필요한, 직장갑질119도 간략하게 소개해주시죠.
전수경 : 저는 노동건강연대 소속이라 월급은 노동건강연대에서 받고요. 노동 영역에서 활동가, 법률가들이 뜻을 모아 직장갑질119를 만들었어요. '노동조합' '노동문제' 이렇게 이야기하면 외부로 확장되기 어려운 것 같아서 처음부터 '직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어요.
직장갑질119는 노동조합 조끼를 입은 사람과 입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되는 노동운동의 경계를 흐리고 싶었어요. 누구라도 말할 수 있게 하는 방식, 노동자 계급 의식을 갖지 않아도 자기 문제를 말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도록 직장갑질119를 만들었죠. 1년 정도 활동했는데 확실히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자기문제를 말할 곳이 생겼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공이라는 것도 사실, 직장갑질119에 대해서 워낙 기자들이 기사도 많이 내주고 우리가 인터뷰도 많이 하고 해서 나름 성공했다고 생각하기는 하는데. 최근에 제가 한 학회가 주최한 '직장 내 괴롭힘의 쟁점과 과제 공동정책세미나' 라는 곳에 청중으로(웃음) 참여한 적이 있는데요. 토론회장이 국회였는데 학회 회장이 사회를 보고 노동부, 경총, 법무법인 김앤장, 태평양, 그리고 서울대 박사가 앉아 있어요. 그런데 경총이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오늘 노동계가 안 와서 말 편하게 하겠다"(웃음) 그들이 만든 직장 내 괴롭힘 관련 각국의 입법동향 등, 두꺼운 토론회 자료집을 훑어 봤는데 자료집 어디에도 직장갑질119 이야기가 안 나오더라구요. 직장갑질119 이름이 꼭 나와야 하는 건 아니지만, 발표와 토론 내용을 보니 약간 문화충격, 법학 교수인 좌장이 김앤장 변호사를 토론자로 소개하면서 '바쁘신 와중에 기회비용을 포기하고 나와 주셔서 감사하다', 자기 일도 아닌데 와줘서 고맙다 이런 식이더라구요. 김앤장 변호사가 소송 준비도 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라 기회비용이 아깝지 않다고 말하는 거예요. 이미 전담팀이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는 직장갑질119나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확산된다고 생각하지만, 주류 집단은 그들만의 리그로 가는 거예요. 노동부도 직장갑질119 자문 한 번 없이 이미 사업주를 위한 갑질예방 매뉴얼을 발주했더군요. 제가 직장갑질119가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주류는 그들만의 리그로 간다고 했더니 다들 풀이 죽었어요.
김명희 : 남들 힘 빼 놓는 데 일가견이.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네요. 김성이 선생님도 소개 짧게 부탁드릴게요.
김성이 : 시민건강연구소는 '모두가 건강한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보건의료 정책을 평가하고 대안적 담론을 모색하는 민간연구단체입니다. 건강불평등, 대안적 보건의료체계, 지역사회와 시민참여 등에 대해 분석하고 대안을 검토하여 논평, 이슈페이퍼, 연구보고서를 발표하고 있어요. 진보적인 연구자와 활동가를 배출하고, 지식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서리풀학당과 월례세미나 등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어요.
미투운동 때문에 그래도 살만해졌다
김명희 : 온라인 상의 성폭력 해시태그나 미투 운동이 활발한데, 이렇게 사회적 의제로 부각되기 전에도 이미 일터 성폭력이나 성희롱 문제는 많았잖아요. 여성노동자회에서 임금, 고용불평등 문제를 다루었지만 성폭력 문제도 많이 관여했을 것 같거든요. 사례나 활동 경험이 있으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이을 : 여성노동자회 중앙은 정책, 이슈파이팅을 하고 지역지부는 '평등의 전화'를 운영하고 있어요. 평등의 전화는 89년 시작해서, 10개 지역에서 운영해요. 매년 상담통계를 내고 사례집을 발간하고 있어요. 1년에 약 3천 건 정도 상담하는데. 임금체불, 근로조건, 모성, 성희롱, 성차별, 괴롭힘 등이 많죠. 미투 운동 이후 변화라면, 직장 내 성희롱과 성폭력 상담이 5년 동안 세 배 정도, 올해 특히 많이 늘어났어요. 서울여성노동자회는 상담 1위가 직장 내 성희롱이었구요. 10개 지부 전체를 보면 근로조건 상담이 아직 많지만, 올해 미투 운동이 한창일때 전년도 같은 기간을 비교하니 227건, 1.5배였어요.
직장 내 성희롱은 낮은 지위에 있는 경우가 특별히 많아요. 나이가 젊고 근속연수 3년 미만이 73%, 고용형태도 비정규직, 근데 규모로 보면 2~300인, 규모가 큰 사업장이 많아요. 상대적으로 고용이 안정되고 모성권도 지켜지니까 직장 내 성희롱 상담이 많아진 거죠. 30인 미만의 작은 사업장은 성희롱이 없다기보다 문제제기 자체가 어려운 거 아닐까 생각해요. 문제를 공론화하면 생존권이 박탈될 수도 있잖아요. 통계에 안 잡히는 직장 내 성희롱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죠. 생각나는 사례가 있는데, 가전제품 방문관리 해주는 분들 있잖아요. 정수기. 이 분들이 중년여성, 혼자 다녀요. 어느 가정을 방문했는데, 중년 남자 혼자 있고 그 사람이 여자 혼자 다니면 위험하지 않냐, 남자 혼자 있는 집에 오면 안 무섭냐, 그 남자가 성추행을 한 거죠. 심각한. 성추행은 흔하게 벌어지는 것이라 경험자체가 특별했다고 볼 수는 없어요. 그런데 이 여성노동자의 인식이 기억에 남아요. 그런 일을 당하면서도 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계속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대요.
김명희 : 추행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을 : 일을 다 마치고 나왔대요, 결국. 왜 그랬을까, 이 분이 특수고용 노동자고, 성희롱에 대한 고충상담을 하거나 구제 받을 방법이 없고. 고용 때문에, 대피해야 하는 상황에서 하지 못한 것이죠.
김명희 : 본인은 아예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네요.
이을 : 미투 운동이 일어난 3~4월에 있던 일이거든요. 이 사례를 들으면서 작업중지권에 대해 생각했어요. 전국여성노동조합이라고 자매 조직이 있어요, 골프장 경기보조원, 캐디가 많이 조직되어 있어요. 성희롱이 많고, 그 이야기를 회사에 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특수고용이니까. 말하는 순간 너 나가라고 할 수 있죠. 동료나 관리자에게 말하면 "서비스직인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이런 식이래요. 미투 운동 후에 성희롱이 좀 줄기는 했대요. 골프장 사장이 회식하자는 일도 줄었다고 들었어요. 조합원 간담회에서 이 분들이 미투 운동 때문에 살만해졌다고 이야기해요. 세 번째는 네 명이 일하는 작은 사업장에서 일어났던 일인데요. 사장이 "다리 보이니까 흥분 된다" 이런 성희롱을 계속 하니까 직원들이 아예 대꾸를 안했대요. 사장이 업무를 트집 잡아 소리 지르고 서류 던지고, 결국 해고했어요. 이 사례도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여성의 상당수가 30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해요. 두 명도 있고, 네 명도 있고, 가해자가 사장인 경우가 많아요. 성희롱에 대해서 말하는 순간 잘리는 거죠.
김명희 : 상담이 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법적으로 대응하거나 노동청에 고발하거나, 함께 해주나요? 고용이 걸려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기도 어렵지 않나요?
이을 : 그렇게 적극적으로 가는 분들, 공론화까지 가는 분들은 적고, 단순 문의가 많아요. '내가 이런 일을 당했는데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냐' 물어보고 중단되기도 하고, 어떻게 회사에 문제제기 할지 법률자문도 하구요. 하지만 이런 경우는 굉장히 적어요.
김명희 : 직장갑질119에도 파란만장한 사연들이 많은 것 같은데, 전형적인 패턴이 있나요?
전수경 : 직장갑질119가 언론에 발표하는 것은 전형적이고 엽기적 사례도 있지만, 상담들 중에서 약한 사례를 내보내는 경우도 있어요. 당사자도 보호해야 하고, 법적 대응도 해야 하니까 오히려 공개를 잘 안하죠. 성희롱 사례는 언론에 거의 알린 적이 없는데 상담이 많기는 해요. 미투 이후 심각한 성폭행 상담들이 들어오기도 하는데 이런 것은 변호사에게 알리고 지원하는 식으로 해요.
직장갑질119는 오픈채팅방에서 기본 상담이 되니까 아무나 들어올 수 있거든요. 물론 심각한 상담을 하는 분들은 이메일로 하니까 일대일 관계이기는 한데, 제보자가 보기에 직장갑질119는 굉장히 큰 네트워크니까 내용이 혹시라도 퍼져나가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죠. 심각한 사례가 아주 많지는 않고 성추행에 대한 상담이 굉장히 많은데 유형이 대체로 비슷해요. 남성이 많은 집단에서 여성 직장인이 혼자 있을 때, 큰 기업들에서, 여성 직장인에게 어떤 부장은 어깨를 주무르고, 어떤 부장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허리를 흔들고, 어떤 과장은 은근히 귀여운 데가 있다 그러고 어떤 관리자는 노래방에 가서 어떻게 하고,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희롱은 조직적으로 일어나고, 이게 바로 남성들의 카르텔이구나 느낄 수 있어요. 어떤 회사에서는 한 명의 상사가 네 명의 여성노동자에게 각각 키스를 요구한 사례가 있어요.
김명희 : 미친 것 아니에요? 어디서요?
전수경 : 눈치를 안 보는 것이겠죠. 회식장이든 노래방이든.
이을 : 다른 사람들 보는 데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거예요.
전수경 : 각각 충성도를 실험하는 것이래요. 그게
이을 : 아시아나 회장이 그랬잖아요. 불러다 앉혀가지고 허그하고 뽀뽀 시키고.
전수경 : 저희가 언론에 발표할 때는 수위조절을 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엽기적인 것들이 많아요. 근데 충성도를 실험한다고 키스를 요구받아서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을 : 인사고과 반영될까봐, 트라우마가 얼마나 컸을까요.
전수경 : 남성들의 카르텔 때문에 문제 해결이 안 된다고 느낀 사례가 또 있는데, 한 여성 노동자가 다른 사람 전부 1년이 지나 호봉이 오르는데 자기 혼자만 급여가 1원도 안 오른 거예요. 이해가 안 돼서 인사평가 내용을 보니, 이름도 이상한 '피플 평가' 이런 게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내린 평판이 안 좋아서 그렇게 된 거라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서 보니까 1-2년 전에 성희롱 문제제기를 한 적이 있대요. 당시 주변 남성 동료들도 도와준다고 해서 문제제기한 건데요, 그 때 도와줬던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더니 다들 처음 듣는 것처럼 말을 하더래요. 남성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은폐하고 덮어주기 때문에 뚫고 들어가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심각한 성폭력 문제는 직장갑질119에서 다루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에요. 미투 이후에 직장 내 성폭력을 다루는 별도의 창구를 열까 잠시 고민했는데. 우리 역량으로 감당하기 어렵고 한 명 한 명을 케어할 수 없어서 포기했어요.
김명희 : 김성이 선생님, 최근 젠더 폭력 관련해서 정부가 정책도 내고 그러는데 특별히 일하는 여성, 여성 노동자와 관련된 부분이 있나요?
김성이 : 노동현장의 성차별 및 젠더폭력 예방과 피해자 보호에 관한 대표적인 법제도는 남녀고용평등법이나 양성평등기본계획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직장내 성희롱 성폭력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이용할 수 있는 신고센터가 고용노동부와 교육부, 여성가족부 등에 마련되어 있고요. 양성평등기본법에 따라 처음으로 여성가족부에서 2015년에 성희롱 실태조사를 거의 만 명 가까운 인원에 대해 실시했습니다. 안전보건공단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도 근로환경 실태조사를 하는데 규모가 꽤 커요. 2014년 조사에 5만 명 정도 참여해요. 일정 규모 이상 사업장의 경우 성희롱 예방교육도 하고 있고, 실태조사, 보호센터, 신고센터 같은 기본 틀은 일단 갖추게 된 것 같아요.
김명희 : 근로환경조사에서는 성희롱 비율이 굉장히 낮게 나오던데.
김성이 : 맞아요. 조사결과를 보면 2% 나와요. 여성가족부 실태조사는 성희롱 경험률이 6.3%였거든요. 그런데 최근 형사정책연구원 조사(<성희롱 실태분석과 형사정책적 대응방안연구>, 2017)에서는 성희롱을 경험했다는 여성의 비율이 52%가 나왔어요.
김명희 : 52%요?
김성이 : 실태조사를 누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성희롱 빈도의 편차가 너무 커서 우리나라 상황이 어떻다고 평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에요.
김명희 :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야 대답도 할 수 있잖아요. 저도 자료를 분석해보면 여성 성별 때문에 차별받았다는 사람은 대개 대학졸업해서 대기업 다니는 이들이에요. 고용시장에서 구조적으로 차별받는 분들은, 그것을 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노동시장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니 말이죠.
성적 괴롭힘의 본질은 구조적 성차별
김명희 : 일터 내 성폭력이나 성적 괴롭힘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을 : 미투 국면에서도 이야기했는데, 본질은 성차별이라고 생각해요. 일터 내에서 여성을 동료로 보지 않고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거죠. 다 연결되어 있어요. 성별분업, 성별분리직무, 이런 것이 너무 심각하고 업무도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만 여성에게 주거나, 비정규직으로 외주화해서 빼내는 식의 차별. 여성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인 거죠. 이번에 젠더 갑질 실태조사라는 것을 했는데, 한 사례를 보면 교육공무직으로 학교에서 업무 보조 역할을 맡았는데 모든 선생님들 차 심부름, 개인보조, 학교에서 김장을 담그라고.
김명희 : 아휴, 한국에서 김장을 없애야.
이을 : 돌봄과 관련한 모든 일을 다 여성에게, 비정규직노동자에게 시키는 거죠. 중요한 것은 직장 성희롱은 특정 개인의 일탈 행위가 아니고 구조, 문화, 조직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인데 자꾸 피해자-가해자 구도로 가는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 차별의 반대인 평등 관점에서 사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명희 : 직장갑질119 활동 경험을 보자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나요?
전수경 : 하나는 한국사회 가부장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게 기업의 조직문화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가령 김장이나 장기자랑 있잖아요.
김명희 : 장기자랑하면 이제 한국의 고유한 문화 아닙니까(웃음)
전수경 : 네네 한국의 고유한 전통문화잖아요. 여성이 직장에 없었으면 김장봉사를 생각해냈을까? 여성이 직장에 없었으면 송년회에 장기자랑이 있을까? 그래서 사회학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젠더나 여성운동과 대립각을 세울 필요는 없지만 굳이 각을 세워 말하자면, 이것을 노동문제로 볼 때 직장 내 권력이나 위계의 문제인데 이것을 계속 젠더문제로 몰고 가면 직장 내에서 해결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어떤 경우든 폭력, 폭행은 위계나 권력 때문에 일어난다는 관점이 먼저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성 상사나 남성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의 관계에서 사회적 권력, 조직 내 권력이 작동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남성들에게 뿌리 깊은 가부장적 사고방식은 이제 치유가 불가능한 것 같아요
김명희 : 못 풀어간다는 것입니까?
전수경 : 치유가 안 돼요. 우리 세대에 해결이 안 됩니다. 상담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어요. 성희롱을 일상적으로 하던 상사가 회식 자리에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기상캐스터가 나오니까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말했대요. 날씨를 보면 되지. 그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회사에서도 그러는 것이고, TV화면에 대고도 그러는 걸 보면, 남성이 가진 시선의 권력은 치유가 불가능한 것인가.
김명희 : 슬픕니다. 치유가 불가능하다니.
전수경 : 직장 안에서 임금, 승진 문제 같은 인사권한 누가 가지고 있는가, 이러한 직장 내 권력 문제가 결합해서 여성들이 실제 받고 있는 압박은 여전히 우리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또 한국 남성들의 상태가 어느 정도 심각한지도 잘 모른다고 생각해요. 저는 볼 때마다 놀라는데, 오픈 채팅방 상담은 일부이고, 이메일 상담의 경우 글로 상담해야 하는 특성 상 꽤나 논리적이에요. 이 분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곱씹고 정리해서 보내기 때문에 감정적이거나 거짓말이 거의 없어요. 아주 고민해서, 마지막까지도 보낼까 말까 판단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쓰는 거죠. 체계적이고 구조적 문제가 담겨있는 이메일이 많거든요. 그걸 보면 일반적인 여성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우리가 잘 모르고, 남성들이 얼마나 심각한 폭력을 휘두르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김명희 : 예전에 대학에 근무할 때, 대학 평가를 한다고 외부 기관에서 나오는데 학장이 저한테 '여자교수가 꽃다발을 전달하는 것 어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밥 먹다가 제 정신이냐고, 이거 성희롱인지 아냐고 했거든요. 그런데 옆의 남자교수들이 가만히 있어요. 그래서 제가 여기 계신 선생님들 다 똑같은 사람들이라고 왜 아무 말씀을 안 하시냐고 하는데 그냥 '갑분싸' 분위기로 끝이 났어요. 나중에 식사자리 다 끝나고 나서 남자교수들이 저한테 와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잘 했어 잘 했어' 그러는 거예요. 그게 더 꼴보기 싫더라고요.
전수경 : 남성지식인들의 생존법이라고 생각해요. 앞에서는 말 못하고 눈치보고 여성들에게 '내가 네 편인 거 알지?' 뒤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거잖아요.
김명희 : 지식인 특유의 아주 치사한 부분이죠.
김성이 : 이런 성희롱이나 괴롭힘에는 권력이 중요하지만 계급이나 연령 효과도 함께 작용하는 것 같아요. 성희롱 문제가 50대 이상 남성 관리자들에서는 젠더인식 자체가 없이 여성을 차별하고 편견을 가졌기 때문에 일어났다면, 지금 젊은 세대에서는 어떤 언행들이 젠더 이슈가 될 거란 걸 알면서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괴롭히는 것 같아요.
이을 : 여성가족부에서 발행한 성폭력 관련 자료에 보면 다양한 권력관계의 중첩지대에서 성희롱이 발생한다는 내용이 그림으로 나와 있어요. 권력관계는 나이, 성별, 고용형태, 학력, 근속년수 등이 다 해당하고, 여성노동자는 거의 모든 권력관계에서 가장 하위에 있어요.
김명희 : 서지현 검사 같은 경우 본인이 검사잖아요. 그런 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어요. 검사가 저 정도면 정말 하위직 여성노동자들은 어떨까. 아까 캐디이야기 들으며 생각난 것이 있는데 예전에 골프장 캐디 건강문제를 노동건강연대에서 처음으로 조사했거든요.
저는 참석하지 못했는데, 선배가 학회에서 그 연구결과를 발표했더니 플로어에서 누가 "아니 우리 산업의학 하는 사람들이 골프장 캐디 건강까지 챙겨야 되면 룸살롱 아가씨들도 챙겨야 하냐' 이랬다는 거예요.
이을 : 말 속에 정확하게 있네요. 캐디를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김성이 : 캐디를 손녀처럼 보는 사람도 있었잖아요. 박희태라고(웃음)
가정을 떠나고 노동현장을 떠나야 문제 해결이 시작되는 젠더폭력
김명희 : 성폭력의 가장 흔한 발생 장소가 일터일 텐데, 작업장이나 노동의 구조적 요인보다는 일반적 문제, 이상한 남자들, 전반적인 가부장제, 일반적인 젠더 문제 이렇게만 다루어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노동 이슈보다는 젠더 이슈로 가야 사회적 파급력이 커서 그런가, 복잡한 마음이 들어요. 여성노동자회 활동 경험에서 볼 때 어떠세요? 저 같은 아쉬움이 있는지, 아니면 이거라도 다행이다 이런 생각인지.
이을 : 서지현 검사 고발 이후에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라는 연대 단체를 꾸렸어요. 그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 마음이 비슷하더라고요.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구조의 문제다, 그런데 왜 일터에서 이 문제를 말하지 못할까? 이게 분명히 일터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인데 왜 노동운동에서도 같이 대응하지 못할까. 기존 여성이슈 젠더이슈에서.
김명희 : 노동 문제가 아니라고 봐서.
이을 : 기존 노동운동이 다루지 못하니 따로 여성운동에서 다루고, 여성노동자회를 따로 만들고. 노동현장에서 젠더 이슈를 얼마나 끌어안았는가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김명희 : 여성 운동에 노동 관점이 부족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노동 내부에서 이것을 노동 문제로 다루지 못한 것에 대한 성찰 말씀하시는 거죠?
이을 : 네. 그래서 자꾸 밖으로 나가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여성운동 안에서는 운동의 전선이 젠더폭력 중심으로 짜여 있잖아요. 이것도 아쉬워요. 사건 대응 중심으로 가요. 구조가 문제라고 생각은 하는데 개별 사건에 집중하면 피해자-가해자 구도로 되어 버리죠. 성평등 행정체계에 국가가 민간기업을 규율하는 체계가 없어요. 미투 운동이 1년 내내 지속되었는데도 관련 법안들이 계류되어 있고.
김명희 : 김성이 선생님은 특별히 노동 관점에 포커스를 두기보다 젠더폭력 전반을 고민하셨잖아요? 이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성이 : 여성폭력은 노동 현장이나 가정에서 많이 발생하지만 대부분은 그곳에서 해결을 하지 못하고 거기를 떠나야 본격적으로지 싸울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때리는 남편을 떠나고자 하지 않으면 그 폭력을 알리거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노동도 마찬가지로 노동현장에서 떠날 각오로, 아니면 떠난 이후에야 싸움을 시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문제가 노동 문제로 수렴하지 못하고 자꾸 떨어져 나가고. 나중에 보면 노동문제는 없고 여자 혼자만 남는 것이죠. 가정을 떠난 여자, 노동을 떠난 여자. 그래서 여성문제, 젠더이슈로만 보이는 거죠. 그리고 만약 노동내부에서 내재적 접근을 한다면, 관리자 같은 사람이 성차별을 일상적으로 숨 쉬듯 하던 것에 대해 전부 다 관리를 해야 하는 건데, 이러면 노동관리에 대한 부담이 엄청나게 커질 테고, 그래서 개인을 문제로 삼고 피해자, 가해자가 서로 다투는 프레이밍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요.
이을 : 성 문제라는 게 개인들 간의 문제다 이렇게 받아들여지는 거죠. 페미니즘 운동의 세컨드 웨이브 이후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라고 주장했지만 아직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요. 심지어 노동조합 안에서도. 안희정지사 사건에서도 둘이 좋아서 그런 것 아니냐 라는 이야기가 판을 치잖아요.
전수경 : 노동 관점에서 해결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것 같아요. 공중전, 캠페인, 이런 것이 더 쉬워요. 심각하다고 어디다 글 쓰고, 시선의 권력을 비판하고, 남성중심 문화를 비판하는 것이 훨씬 더 쉽고, 노동 혹은 기업 조직 안으로 들어가서 구체적으로 처리절차를 거치고 책임을 지도록 징계를 하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에 이 문제가 계속 빠져나가는 것 같아요. 글 쓰는 사람 따로 있고, 현장 따로 있고. 그런데 동시에 이것이 노동문제이고 반드시 응징 받는다, 이런 사례가 쌓인다면 줄어들 것 같아요. 일반적인 노동 사안에서 과태료가 늘면 사업주가 눈치를 보고 덜 하려고 애쓰듯이. 근데 이 성폭력과 관련한 문제들은 끝까지 하기 너무 힘들어서 거의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악순환이 되는 것 같아요. 당사자가 나서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어려운데, 가장 결정적인 일자리 문제가 걸려 있으니 누가 운동으로 하라고 떠밀 수가 없잖아요. 그 고리가 문제를 가로막고 있어요.
김명희 : 그래서 딜레마에요. 검사라는 안정된 직장이라고 해도 따돌림과 2차 가해가 있는 것을 보면.
이을 : 피해자 대부분이 직장을 떠나요. 72%가 2차 피해가 너무 심해서. 그래서 예방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죠. 일터를. 저희는 성평등 노동이라는 말을 써요. 젠더에 노동을, 노동에 젠더를 기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노력이 전사회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 미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 같아요.
김명희 : 회사에서 성희롱, 성폭력이 발생하면 사장들 콩밥도 먹이고 이래야 사장이 앗 뜨거 하면서 덜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은 이상,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전수경 : 경총에서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뭐냐면, 같은 직원들끼리 전날 밤 카톡으로 왕따 시키고 공모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런 것까지 기업이 어떻게 관리하냐, 무능한 직원들이 꼭 문제제기한다. 그러면서 토론회 같은 공개적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게 관리의 어려움, 경영자들이 어디까지 관리해야 하냐 호소하고. 기업들이 이렇게 엄살 피우기에 이 문제는 너무 편하고 좋은 것이죠.
'노동자 김지은이고 싶습니다'
김명희 : 그런 면에서 이것이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통계나 정책근거가 많아져야 할 텐데 그게 참 어렵습니다. 저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피해자 김지은 씨가 '노동자 김지은이고 싶습니다' 라고 선언한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렇게 김지은 씨가 나선 것에 비해서 노동 쪽, 혹은 노동자 건강 영역에서는 전혀 여기에 대응해 주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이야기 마무리를 해야겠는데요. 노동조합이 강력해서 이 문제에 나서 주면 좋겠지만 조직력이 낮고, 심지어 노동조합 안에서도 이것이 메인 이슈가 되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어떤 것들이 시급하게 다루어져야 할지 의견을 제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성이 : 직장 내 성희롱은 명백히 범죄행위잖아요. 개인 사생활 문제가 아니라 공적인 문제이고 노동자의 건강권과 노동권을 침해하는 일이라는 공적 프레임. 이렇게 되면 좋겠어요. 젠더 문제, 불편한 문제가 아니라 문제의 층위가 좀 상위로 올라가야 하고.
김명희 : 문제로서 시민권을 갖는 것.
김성이 : 그렇죠. 신문 사회면에 있는 기사가 아니라 정치면이나 경제면에 있는 이슈가 되어야 하죠. 현재 직장 내 성희롱 통계수치가 2~50%로 천차만별이라는 거 자체가 문제를 심각하게 보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봐요. 직장 내 성희롱 문제제기로 인한 고용 상 불이익이 없어져야 하고, 또 성희롱 피해에 대해 산재보험을 적용해서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는 게 중요합니다. 성희롱에 의한 건강영향에 대한 근거들이 쌓이고 산재 여부에 대한 판단기준이 생겨야 하는데, 그러려면 안전보건과 관련된 일을 하는 직업환경의사들이 성희롱과 성폭력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성폭력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하는 것보다 의료진을 찾는 경우가 다섯 배 이상 높아요. 의료진들이 성폭력, 성희롱 피해자를 만날 수 있는 최전선에 있으니 그런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치료와 예방정책을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우선 현실에서 젠더폭력의 위험성을 드러내는데 보건의료적 접근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이을 : 저는 여성노동자회에서 활동한지 1년 넘었고, 그 전에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3년 동안 일했어요. 미투 운동을 겪으면서, 위험 환경에서의 작업중지권에 대해 계속 말해왔는데 왜 젠더 관점에서는 작업중지권을 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전자제품 방문관리 하는 분 같은 경우, 직장 내에서 성희롱을 당했어, 바로 위험현장을 피할 수 있어야 해, 하면서 작업중지권이 적용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못 했어요. 실제로 작업거부권이 독일에는 있대요.
김명희 : 성희롱 건에 대해서요?
이을 : 네. 성희롱 피해자 보호를 위한 작업거부권이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저희가 지난 4월 토론회에서 알게 된 건데, 일반적 동등대우법 제14조에 성희롱 피해자 보호를 위한 작업거부권이 명시되어 있고, 사업주가 직장 내 성희롱 피해에 대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거나 부적절한 조치를 취했을 때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임금을 제공받으면서 작업을 중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희가 미투 운동하면서 노동부의 고용평등 담당자가 제대로 안한다, 남녀고용평등법이 역할을 못하고, 좋게 말하면 법이 포괄적이고 규율에 책임이 없도록 되어 있다고 비판해 왔어요. 처벌기준도 없고 행정체계가 없는 거에요. 성평등을 담당하는 기구인 고용평등과가 이명박 정권에서 사라졌어요. 이걸 다시 복구할 것처럼 이야기하더니기재부에서 잘렸대요. 담당자가 있어야 문제제기도 하고 관리도 할 텐데 없는 상황인 것이죠.
김성이 : 고용평등과가 없어진 것이 이명박이 했던 말과 닿아 있지 않나요? "못생긴 여자가 안마를 잘 한다"는 기상천외한 말과 그의 정신세계가.
김명희 : 보건 쪽에서도 여성건강 담당 부처가 없어졌어요.
이을 : 이런 것 없어도 되잖아 이런 식이었던 거죠. 근로감독관, 노동위원회에서 성희롱 문제가 제기되어야 하는데 근로감독관이 부족하고, 성평등 감수성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2차 가해도 있죠. 공무원 교육도 필요하고 성평등 전담감독관도 필요한 상황입니다.
김명희 : 노동부는 메르스 유행 때문에 병원노동자들이 엄청 위험한 상황인데도 아무 것도 안 하더라구요. 당시 노동부에서 나온 자료를 보면 일반 사업장 관련 내용은 있어도 보건의료노동자에게는 아무 것도 안 했어요.
김성이 : 현재 전국에 성폭력전담의료기관이 343개, 성폭력피해상담소 168개소, 여성폭력피해자 원스톱 지원기관인 해바라기센터는 38개 있습니다. 이 정도 규모에 비하면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지원에 대해서는 인식이 낮아요.
이을 : 여성들은 일상이 전쟁터이고 출근하는 순간 과장, 차장, 대리 다 한 마디씩 이야기하고 지나가는 상황인데도 고용평등에 대한 대응은 부족한 상황이죠
김명희 : 사고 자체가 임금차별 문제와 성희롱, 성폭력 문제는 완전 별개인 것처럼 프레이밍 해서, 노동부가 내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게 중요한 이유 같습니다.
김성이 : 가정폭력, 성폭력은 특별법도 있고 예산과 조직이 있잖아요.
김명희 : 여성가족부는 그래도 자신들이 일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하는데
이을 : 노동부는 내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여성가족부로 돌려요.
김성이 : 일단 성희롱이라는 표현자체가.
김명희 : 제가 선배 여성주의 연구자에게 여쭤본 적이 있어요. 왜 처음부터 성희롱이라는 용어를 썼냐? 성춘향과 이몽룡이 서로 희롱하면서 논다는 데 쓰는 표현인 만큼 유희적 의미가 강한데, 성적 괴롭힘으로 써야 맞는 것 아니냐. 그랬더니 그 정도 용어를 넣기 위해서도 엄청나게 싸웠다 하시더라고요. 뭐라고 할 말이 없었죠.
이을 : 희롱이라고 해서 결코 가벼운 것도 아니고 범위가 엄청 넓은데, 사실 폭력이잖아요.
김명희 : 성적 괴롭힘이라는 표현이 정확하죠.
여성들의 연대야말로 가장 중요한 생존의 기술
김명희 : 총체적인 해결책 이야기해주셨는데 그래도 우선 순위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김성이 : 스쿨미투 시대의 세대가 어찌될 지 봐야 해요.
전수경 : 당사자들이 나설 수밖에 없는데 우리사회에서 남녀를 떠나 모든 고용된 노동자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혼자 감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여성 노동자, 여성 직장인이 각자 자기가 끌어안고 그냥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면 아무것도 해결이 안 되죠. 아까 이야기한 여성 노동자 네 명에게 키스를 요구했다는 부장 사례를 보면, 크게 법제도로 해결하는 것과 별개로, 옆자리 여성에게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순간, 아주 많은 경우 저지될 것이라고 봐요. 서로 공론화하고 있다는 신호 만으로도 상당 부분 가해자가 주저하거나 이를 저지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옆 사람과 이야기하고 공론화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힘을 가진 사람이 움찔한다는 것이죠. 아주 약해 보이지만 이런 전략들이 중요한데, 각자가 끌어안고 있다가 고충처리위원회로 올라가고 소송하고.
여성들은 연대가 생존의 기술이라는 것을 공유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끊기 어렵다가 생각해요. 언어적 희롱이 시작되었을 때, 물리적 괴롭힘이 시작되었을 때 옆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연대가 시작되면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여성 직장인, 노동자들 상황도 다른 운동과 비슷해요. '반올림' 투쟁을 보면서 슬픈 것은 그 싸움 자체는 훌륭했지만 그 정도 노력으로 10년을 싸우지 않으면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도 한 것 같아요. 조직이 없이 개인이 해야 한다면 절대 할 수 없는 것이죠.
이을 : 서지현 검사 인터뷰 보니까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에게 당신도 이야기를 하라고 말을 못하겠다. 그만큼 견디기 어려운 거죠.
전수경 : 각자 감당하겠다고 하면,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목숨 걸고 얼굴 공개하지 않는 이상, 일상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투사가 될 수는 없잖아요. 직장이 중요하고 생계가 중요한데, 그 갭을 좁히는 것은, 사회적 문제제기와 직장 생활에서 각자 겪는 어려움 사이에는 굉장히 큰 간극이 있어요.
이을 : 그래서 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개인을 개인으로 두지 않고 안전하게. 정확히 말하면 제도가 없는 것은 아닌데 제대로 되지 않는.
김명희 : 굴뚝에 올라가서 10년은 싸워야 하고.
이을 : 제도에 구멍이 너무 많고, 정부대책은 공공기관 중심으로 나와요.
김명희 : 그게 실행하기 쉽잖아요.
이을 : 국가의 역할이 사회를 견인하는 것이고, 개인이 안전하게, 안전망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너무 못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문재인 정부는 촛불정부인데 실망스럽죠.
전수경 : 그래서 저는 옆 사람을 보자는 것이죠. '손에 손잡고' 작은 정치들, 각각의 조직에서 이런 작은 정치를 학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명희 : 오랜 시간 다양한 이야기들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직장 내 성폭력 문제가 권력과 구조적 성차별의 문제라는 점,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피해자 구도보다 구조와 제도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우리 일터와 현장에서 옆에 있는 노동자들을 쳐다보고 함께 연대하야 한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처음이라 이야기가 다소 두서없이 전개되었는데 다음에 이런 자리를 또 마련했으면 합니다.
(이 글은 <노동과 건강> 2019년 봄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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