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전쟁'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이 세 가지 조정기를 겪고 있다. 첫째, 무역전쟁이 알고 보니 무역전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질은 '미래 패권경쟁'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경제 논리에 의하면 '싸우면 둘 다 손해인 무역전쟁'이 이내 타협을 볼 것으로 봤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장기화할 가능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타협 불가피론'이 조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셋째, 미·중 갈등이 '그나마 무역전쟁이라 다행'이라는 시각이다. 총 들고 싸우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는 미·중 관계에서 '무역'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나온다. 미중 관계의 역사적 흐름에서 보자면 미중 무역전쟁의 성격은 판이하게 그 무게감이 다르다. 그것은 그동안 산적한 미중 갈등을 막아주었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 것과 같다.
한국은 미·중 관계 악화에 따라 양 강대국 사이에서 가장 '포지셔닝' 어려움을 겪게 될 수 있다. 거친 국제정세에서 두 강대국 사이에 낀 한국이 어느 쪽의 불만도 사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은 당연하지만, 미·중 간 힘의 경쟁에서 지속적인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양국 간의 무역전쟁은 미·중 간 미래 패권경쟁이라고 볼 때, 미중 관계의 새로운 균형점을 모색하는 과정은 단기적 과제가 아닐 것이다. '미중 사이 한국의 선택' 문제는 향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분열적인 담론으로 등장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이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필자)
'무역전쟁'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이 조정기를 겪고 있다. 첫 번째 조정은 미중 무역전쟁이 알고 보니 단순한 '경제문제의 갈등'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통상적 무역 불균형에 대한 문제라고 봤는데 본질은 갈수록 '미래 패권경쟁'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교정은 무역전쟁은 '싸우면 둘 다 손해니까 미중이 샅바싸움을 하며 신경전을 벌이긴 해도 이내 타협할 것'이라고 봤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렇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미중 '타협 불가피론'도 조정을 받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미중 '타협 불가피론'은 이제껏 한국사회에서 무역전쟁 향방을 점치는 가장 주요한 프레임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아마도 '경제 논리'의 관점에서 보면 '타협'이 본연적 설득력을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 주체의 지상최대 명제는 '이익추구'다. 그것의 마지노선은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 서로 싸우면 둘 다 손해니까 결국 타협을 보는 것이 경제논리에서 보자면 자명한 논리다. 한미 FTA 협상에 직접 관여했던 한 고위관료도 미중이 곧 타협할 것이라고 내다 봤었다. 그것이 두어 달 전이었다.
그런데 '싸우면 둘 다 손해'인 미중 무역전쟁이 2019년 새 해에 들어서도 지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월말에 개최되는 제2차 북미정상회담 전후로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나 양국 최고 지도자 차원에서 무역갈등을 매듭짓는 수순으로 갈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지만 그 회동도 전격적으로 무산되었다. 설사 미중 정상이 만나 합의가 나와도 미봉책 수준이 될 가능성이 높고, 트럼프는 이것을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자신이 '승리'(victory)했다고 선언할 수도 있다.
미중 무역전쟁은 '봉합 후 다시 악화', 그리고 다시 봉합 그리고 다시 악화, 이러한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전체적으로는 미중관계가 '하향평준화' 포물선을 그리면서 악화의 트렌드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무역전쟁이라 더 위험한 미중 갈등
미중 '무역전쟁'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에서 조정이 아직도 미뤄지고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미중 갈등이 '그나마 무역전쟁이라 다행'이라는 시각이다. 총 들고 싸우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얼핏 들어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아마도 그래서 '인식 조정'이 미뤄지고 있는 것일 테다. 무역 갈등은 현대 국제사회에서 빈번히 있기도 하다. 동맹관계인 한미 사이에서도 있지 않는가.
그런데 수교 40주년을 맞는 미중 관계의 역사적 흐름에서 보자면 미중 무역전쟁의 성격은 판이하게 그 무게감이 틀리다. 그것은 그동안 산적한 미중 갈등을 막아주었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 것과 같다. 이는 미중관계에서 '무역'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은 정치체제, 사회구조가 판이하게 다른 사회다. 지난 40여 년간 인권문제, 대만 문제, 티벳, 언론 자유, 소수민족 핍박, 종교 억압, 이데올로기 대립 등 미중간에는 만성적인 충돌의 뇌관들이 무수했다. 그러한 대립이 양국관계를 본질적으로 악화시키는 것을 막아준 '완충제'가 바로 미중 양국의 긴밀한 경제적 상호의존이었다. 미중 간의 깊은 '전략적 불신'을 극복하게 해준 것도 바로 경제적 '공동 이익'이었다 (전 미국 고위 관료의 소회).
현재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그러한 미중 갈등의 완충 역할을 했던 ‘뚝’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산적했던 갈등이 표출되는 것이다. 즉, '무역전쟁'은 미중관계를 지탱해 왔던 버팀목이 무너진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러한 맥락은 왜 미중이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 시점에서 미국에서 공화·민주당의 정당에 상관없이 중국에 대한 경계심과 반중정서가 전반적으로 고조·확산되고 있는 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갈수록 미국사회를 반영하는 일종의 ‘시대정신’으로 부상하고 있다. 미국 대학들이 중국 유학생들에 대한 비자 심사 강화, 미국 내 중국 정부의 예산 지원으로 운영되는 '공자학원' 폐쇄 움직임, 중국 기업인들의 미국 첨단기업 투자나 인수·합병 및 산·학 협업에 대한 관리감독 강화, 그리고 최근 화웨이 부회장 체포 등 일련의 조치들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무역 이외에 미국 사회의 '전방위'적인 중국 경계 분위기 확대
또한 경제뿐만 아니라 군사 분야에서 중국을 경계하는 미국의 모습이 더욱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2018년 1월만 해도 폼페이오 당시 CIA 수장은 중국을 '러시아와 동급으로 미국에 큰 위협'(as big a threat to US as Russia)이라고 표현했다. 거의 1년이 지난 2018년 말 폼페이오는 12월 10일 러시아를 쏙 빼고 중국만 꼬집어 "중국은 미국에게 가장 큰 위협(China presents the greatest challenge that the United States will face)"이라고 명시했다.
미국이 중국에 대해 경계를 넘어 적대시하는 경향은 무역 전쟁이나 정치인의 수사(修辭)를 넘어 미국 정부의 공식적 전략문서에 공개적으로 명시되고 있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공식화', '문서화'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정부 차원에서 내놓은 세 가지 전략보고서, 즉 2017년 12월에 발간된 국가안보전략보고서(NSS), 2018년 2월에 나온 핵태세검토보고서(NPR), 2018년 8월에 의회를 통과한 '2019 회계연도 국방수권법(NDAA)'은 모두 일관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시기에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목표가 확고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가장 최근에 나온 국군수권법 섹션 1261은 '미국의 대 중국 전략'(United States Strategy on China)을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중국과의 장기적인 전략적 경쟁이 미국의 주된 우선 사항이라고 '선포'(declares)한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주어는 미국 ‘의회’다. 트럼프 행정부가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제 한국사회에서도 미중 무역마찰이 시간이 갈수록 경제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설사 '90일 휴전' 후 미·중 간 무역전쟁에 대한 잠정적인 타협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미국의 대중국 압박은 다양한 영역에서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포지셔닝' 가장 어려울 수 있는 국가
한국은 미중 관계 악화에 따라 양 강대국 사이에서 가장 '포지셔닝' 어려움을 겪게 될 수 있다. 미중 관계 '악화'는 미중이 반드시 물리적 충돌로 간다는 극단 편향적 결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미중 '강대강' 정치 구조 중간에 위치한 한국으로서는 '저강도'의 미·중 갈등도 그것이 한반도에 투사될 때는 '국가적' 수준의 도전이 될 수 있다.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한국이 한바탕 치룬 홍역은 그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은 미중 간의 힘의 경쟁에서 지속적인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양국 간의 무역전쟁은 미중간 미래 패권경쟁이라고 볼 때, 미중 관계의 새로운 균형점을 모색하는 과정은 단기적 과제가 아닐 것이다. 즉 금방 끝날 사안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미국 의회 차원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장기적인 전략적 경쟁’(long-term strategic competition)이라고 명시한 것에 미중 갈등의 장기 지속 가능성에 대한 미국의 판단이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미중 반목이 심화되면서, '안보=미국', '경제=중국'이란 공식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한국 외교가에서 대두되고 있다. 문제는 한국은 미중 모두와 잘 지내고 싶은데 미중은 한국이 자기편에 서기를 원하는 것이다. 한국은 미중간 힘의 경쟁에서 지속적인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한국은 계속 선택을 거부할 수 있을까? 한국은 선택을 하지 않고도 강대국의 '줄세우기' 강요를 거부할 수 있는 외교 맷집을 지녔는가의 여부, (2)한쪽을 선택 했을 경우의 리스크, (3)선택을 미루다 자발적으로 할 경우의 리스크, (4) 선택을 미루다 타의에 의해 선택을 강요당하는 경우의 리스크, 등 각각의 시나리오와 그에 따른 '기회비용'을 냉정히 점검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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