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무대의 남자 프로골퍼 숫자는 여자 프로골퍼보다 무려 1백배나 많다.
현재 해마다 미국 골프투어에 참가하고 있는 남자골퍼들만 1천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평생 동안 우승은커녕 예선에 통과하지 못하는 골퍼도 부지기수다. 이런 마당에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최경주가 '깡' 하나로 미국에 건너간 지 3년만에 PGA 우승이라니...
우리 숙원인 월드컵 16강 진출에 버금갈만한 일대 사건이다. 눈물이 다 나왔다."
6일 새벽 최경주 선수의 미국 PGA 우승 소식을 접한 뒤 한 골프전문가가 감격을 감추지 못하며 한 말이다.
***골프장 연습생 출신의 지독한 노력파**
6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PGA 투어 컴팩클래식 최종 4라운드에서 최경주 선수가 5언더파 67타를 기록해 최종합계 17언더파 2백71타로 우승컵을 안았다. 1백여년이 넘는 PGA 역사상 국내 골퍼로는 처음 거둔 쾌거이며, 동양인으로는 오자키 등 일본선수 2명에 이어 세 번째 일이다.
매서운 눈매로 '호크 아이(매눈)', 다부진 체구로 '필드의 타이슨'이라 불리던 최경주 선수가 드디어 국제무대에서 쾌거를 이뤄낸 것이다. 미언론들은 인상깊은 활약을 보여준 시커먼 피부의 최선수에게 '블랙 탱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흔히 누가 우승을 하면 언론은 그의 '어려운 인생역정'을 말한다. 일종의 '상투적 보도공식'이다. 그러나 최경주에 관한 한, 이같은 보도공식은 '상투적'이지 않다. 실제로 그의 삶은 '섬 촌놈'의 근성과 오기의 파노라마였기 때문이다.
최선수는 1968년(호적은 1970년 5월 19일생) 전남 완도의 가난한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다부졌던 그는 완도 화흥 초등학교 때 축구, 씨름, 투창으로 운동을 시작했고 중학교 올라가서는 역도를 했다. 미국무대에서 덩치큰 서양인들과 싸워 뒤지지 않는 기초체력을 어렸을 때 다져놓은 셈이다.
완도 수산고등학교 1학년 때 그의 다부진 체격에 감탄한 체육교사의 권유로 골프채를 잡았다. 그러다가 혈혈단신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지방에서 수준 높은 골프를 배우기란 힘들었기 때문이다.
"최경주가 서울에 올라와 맨처음 들어간 곳은 서울 청담동의 한 골프연습장이었다. 여기서 그는 연습생으로 일하면서 틈만 나면 밤낮 없이 무진장 연습을 했다. 여기서 '사부'를 만나 전문교육을 받은 그는 세미 프로가 됐고, 그 때부터 연습장에 오는 손님들에게 레슨을 하는 한편 이들 손님이 골프장에 나갈 때에는 같이 나가 함께 라운딩을 했다. 제돈 내고 골프장에 갈 경제적 여건이 안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 청담동 연습장에서 해고됐다. 연습장 레슨 대신에 주로 골프장 라운딩에 전념하다보니 소장 눈밖에 나 마침내 짤리게 된 것이다.
최경주는 그러나 여기에 굴하지 않고 다른 연습장에 자리를 구해 계속 실력을 키워나갔고 마침내 93년 프로골퍼가 돼 본격적으로 프로무대에 설 수 있었다."
청담동 골프연습장 시절부터 그를 잘 알고 있는 박근배 은행연합회 홍보실장의 전언이다.
이후 95년 첫승(팬텀오픈) 이후 96년 1승을 거쳐 97년 3승을 올리며 2년 연속 상금랭킹 1위에 오른 그는 국내에는 대적할 선수가 없다는 찬사를 받아왔다. 이어 일본무대에도 진출해, 기린오픈에서 우승해 활동영역을 아시아로 넓혀갔다.
***인종차별적 분위기 속에서 일궈낸 값진 승리**
그러던 중 최선수는 미PGA 출전자격을 따기 위해 99년 컬리파잉스쿨(Q스쿨)에 지원서를 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미 그는 일본 기린오픈 우승으로 2000년말까지 일본투어 풀시드를 확보한 상태였다. 그는 미PGA투어 못지않은 큰 시장인 일본투어 출전자격을 따냈지만, PGA투어 못지않은 무대로 알려진 일본시장을 과감히 포기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서른을 넘었고, 처자식도 딸린 몸이었다.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는 그러나 6일 연속시합을 해 35위 이내에 들어야 하는 혹독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퀄리파잉스쿨에 35위로 턱걸이로 합격을 하면서 어렵게 2000년 투어 조건부 출전권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미국 프로무대는 생각보다 험난했다. 2000년 30개 대회에 출전해 톱10에 단 한번들었을 뿐이었다. 자기보다 30야드는 더 멀리 날아가는 비제이 싱과 같은 유명선수들의 장타에 기가 죽어 최선수는 '그만 때려치우자'며 짐을 챙겨 빠져 나오기도 했다. 귀국이냐 2부 투어냐의 기로에서 그는 한 번 가기도 싫다는 지긋지긋한 Q스쿨을 또 거쳤다. 2000년 Q스쿨을 앞두고 한국을 찾았을 때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는지 그의 손바닥은 온통 터지고 굳어지길 반복해, 함께 미국생활을 하던 부인과 아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는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다. 미국 진출 이후 비디오를 통해 자신과 체형(1m72, 82㎏)이 비슷한 톰왓슨, 이안 우스남 등의 스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며 6차례나 폼을 교정한 끝에 강한 하체를 토대로 한 보디턴 스윙을 만들어냈다.
"한국인이 미국에서 골프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여자는 세계무대에서 우승할 수 있으나 남자는 불가능하다'는 게 그동안 국내골프계의 정설이었다. 우선 선수층이 여자보다 남자가 1백배나 두터운 데다가, 남자들은 군대를 갔다와야 한다. 프로 바둑선수들은 병역면제가 되나 프로 골퍼는 그렇지 못하다. 군대 3년을 마치고 돌아오면 대부분 감각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더욱 미국골프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이 대단히 심한 사회다. 더욱이 골프는 테니스와 함께 미국에서 귀족스포츠에 속한다. 프로선수가 되기 위해 엄청난 고액의 레슨비를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핸디캡과 장애를 영어도 거의 못하는 최경주는 혼자 힘으로 돌파, PGA 우승을 거머쥐었다. 지난해까지는 돈이 없어 미국에 집 한 채 장만하지 못하고 부인과 자녀들과 함께 호텔방을 전전하는 뜨내기 생활을 해야 했다.
말 그대로 입지전적 인간승리가 아닐 수 없다."
박근배 실장의 분석이다.
***거센 '최경주 신드럼'예상돼**
최경주가 우승한 컴팩 클래식은 상금 규모(4백50만달러)나 참가자 수준을 볼 때 미PGA투어에서 특급대회로 분류된다. 이벤트를 포함해 상금이 걸린 2002 미PGA투어는 총 55개로 컴팩클래식은 상금면에서 랭킹 12위다. 이보다 상금이 많은 이른바 초특급 대회는 4대 메이저대회, 플레이어선수권과 이벤트성 대회인 WGC대회 등이다.
이번 대회에는 세계랭킹(출전대회 성적에 따른 누적점수로 랭킹을 매김) 상위 20걸중에서 2위 필 미켈슨, 3위 어니 엘스, 8위이자 전년도 우승자 데이비드 톰스(공동9위), 11위 크리스 디마르코 등 6명이 나서 출전 선수면에서도 특급대회로 손색이 없었다.
최경주는 지난해부터 전문가들 사이에서 퍼팅만 보완된다면 미PGA 우승이 멀지 않다는 인정을 받아왔다. 최경주는 지난해 29개 대회에 출전, '톱10'에 다섯번이나 들었고 그중 세번은 5위안에 진입하는 안정적인 성적을 거뒀기 때문이다.
최경주는 이번 우승으로 벌어들인 상금은 무려 81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0억4천만원이다. 이로써 올해 12개 대회에 출전해 획득한 상금 총액만 1백26만 3천6백81달러(약 16억원)으로 랭킹 15위에 올랐다. 현재 1위를 달리고 있는 타이거 우즈는 2백68만 달러다.
최경주 선수만 값진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니다. 93년 최 선수가 프로골프 데뷔때부터 후원해온 국내 골프의류업체 슈페리어(대표 김귀열)도 '세계적 브랜드'로 격상되는 기쁨을 누리게 됐다. 슈페리어는 두 차례 최경주와 계약을 연장해 왔으며 올해 3번째 계약을 경신, 끈끈한 인연을 이어왔다.
지난 67년 설립돼 국내 골프의류업체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나 잇단 대기업의 시장 진출로 연간 매출이 1천억원에 미치지 못했던 슈페리어는 최경주와의 오랜 인연으로 엄청난 광고효과를 누리는 행운을 잡게 된 것이다. 최경주가 입고 있는 옷과 머리에 쓴 모자에 달린 슈페리어 로고가 한국 뿐 아니라 미국 전역에 생방송으로 중계된 탓이다.
올해 슈페리어와 공동스폰서를 맡은 골프용품업체 테일러메이드코리아나, 올해부터 최경주와 사용 계약을 맺은 카바이트 퍼터 수입업체 청풍교역도 국내 판매가 부쩍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98년 IMF당시 박세리 선수의 우승이 나어린 여학생들 사이에서 거센 골프붐을 몰고왔듯, 이번 최경주 선수 우승은 남학생들 사이에 또한차례 거센 골프 붐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최경주 선수가 주는 가장 의미있는 교훈은 특권의식의 산물인 '3홍 비리'에 환멸을 느끼던 우리 사회에 '그래, 이렇게 제 힘으로 한 길을 파면 된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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