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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준 서울대총장 사태'의 뼈아픈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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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기준 서울대총장 사태'의 뼈아픈 교훈

정치인ㆍ장관 등에게 5천8백만원어치 명절 선물

정치인들의 꿈이 대통령이라면, 학자들의 꿈은 서울대학교 총장이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울대 총장은 이처럼 학계에서 '장관급'이라는 직급이상의 무형의 권위를 가져왔다. 역대정권들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현재, 이수성 등 서울대 총장을 국무총리로 영입, 위기타파를 시도했던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그런데 지금 서울대 총장이 제자들로부터 '퇴진'을 요구받고 있다. 지난 48년 개교이래 초유의 일이다. 그것도 명예스럽지 못한 '돈'문제로 말이다.

학계에서는 이번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기준 총장 사태'는 단순한 서울대 내부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계가 안고 있는 모순이 압축적으로 드러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편법적으로 4억2천만원 조달**

지난달 28일부터 총장실을 점거한 채 농성중인 서울대총학생회(이하 총학)가 3일 이기준 서울대 총장의 2001년도 판공비 내역을 공개, 큰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다. 이번 자료는 그동안 대학측이 극구 공개를 기피해온 극비문서이나, 학생들이 총장실 점거농성을 하던 중 비서실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개자료에 따르면 이총장이 사용한 판공비는 지난해 4억5천만원을 넘었으며 대부분 식사비와 명절 선물비, 경조사비 등으로 사용됐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식사비와 간담회, 조찬모임 비용 등으로 1억6천3백만원이 지출된 것을 비롯, 국회의원과 장관 등 정치권과 정부인사 등 각계 인사에게 보내는 추석과 송년 선물비용으로 5천8백여만원이 지출됐다. 여기에는 총장 개인이 사용한 사우나비용과 이발비용 등도 포함돼 있었다.

이번에 밝혀진 서울대 총장의 판공비는 다른 국립대 총장에 비해 많게는 10배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다.

4억5천만원의 판공비는 어떻게 조성됐나.

지난해 3월부터 올해 2월까지 1년간 총장 판공비 사용내역을 확인한 결과, 기성회계 3억3천만원을 비롯해 일반회계와 발전기금 등에서 모두 4억5천1백여만원이 판공비로 지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가운데 정부가 정식으로 판공비로 승인한 예산은 3천만원에 불과했다. 나머지 4억2천만원이 편법으로 조달된 것이다.

총학은 "총장의 판공비 대부분이 기성회계 예산에서 나온 것인 만큼 결국 총장이 등록금을 인상, 과다한 판공비를 지출했다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며 등록금 인상 백지화 주장의 근거로 제시했다. 총학은 또 "발전기금 이사장 업무추진비의 경우도 연구 및 학술활동, 국제교류, 시설 개선 등 사용 용도가 명백히 정해졌음에도 불구, 실제 사용내역은 경조사비와 비서실 격려금 지급 등 원 취지와는 관련없는 용도로 지출됐다"고 위법성을 지적했다.

***"서울대 총장이 국회의원과 장관에게 선물을 5천8백만원어치나 보내다니..."**

특히 총학이 공개한 기성회비 법인카드 결제 내역에는 이총장 부인이 20회에 걸쳐 음식점이나 백화점에서 법인카드를 사용, 모두 1백30여만원을 결제한 부분도 포함돼 있어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논란을 빚고 있다.

이에 대해 서울대 관계자는 "서울대 총장을 단순히 다른 국립대 총장과 비교해서는 안될 것"이라며 "총장 부인이 법인카드로 결제한 경우는 총장이 부득이한 이유로 모임에 참석지 못했을 때 대신 참석, 계산한 것이므로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감사대상인 서울대 총장의 판공비 예산은 3천만원이며 나머지는 주로 학생들의 등록금에서 조달된 것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모럴 해저드 비판을 피하기 힘들 전망이다.

특히 이총장이 추석과 연말 등에 국회의원과 장관 등에게 선물을 보내며 5천8백여만원을 사용한 대목은 서울대 학생뿐 아니라, 교수들로부터도 강한 비판을 받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수는 "학계의 최고 어른 격인 서울대총장이 국회의원이나 장관들에게 5천8백여만원어치나 명절 선물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허탈하기 짝이 없다"고 개탄했다. 그는 "언제부터 서울대 총장이 이처럼 선물보따리로 정치권과 관료들의 환심을 사는 속물적 존재로 전락했는지 모르겠다"며 "이번 사태는 서울대인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모럴 해저드"라고 개탄했다.

***사외이사 겸직으로 물의빚기도**

모럴 해저드 문제는 이총장의 아킬레스 건이다. 이총장은 얼마전 LG화학의 사외이사직 겸임으로 물의를 빚은 끝에 이사직을 사퇴하기도 했다.

현행 국가공무원 복무규정에 따르면, 국공립대나 사립대를 가리지 않고 대학교원의 영리활동 금지 차원에서 기업체 사외이사 겸직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 사외이사제도가 발달한 외국에서도 교수의 사외이사 겸직은 경영감각이나 시간적 여유, 열의 등 여러 측면에서 적절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교수가 사외이사를 맡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이기준 총장은 이사회 참석 등 사외이사로서의 활동을 거의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총장은 "LG화학의 경우 사외이사에게 연간 2천만원씩 지급하도록 규정이 돼있으나 대학교수의 직분상 보수를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해 무보수로 일했으며 연구비조로 1년에 2천만원 가량을 지원받았다"고 해명했다.

국가공무원 복무규정을 위반하고 있는 것은 이총장 혼자가 아니다.

교수신문은 지난 3일 전국 대학에서 모두 2백여명의 교수가 상장기업의 사외이사직을 맡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이 신문 보도에 따르면, 상장기업협회가 지난해 7월 집계한 사외이사명단 분석 결과 연세대 김우식총장, 숙명여대 이경숙총장, 동국대 송석구총장 등 5개 대학 총장을 비롯, 교수 2백10명이 1백74개 상장기업의 사외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이 가운데 교수 27명은 두 곳 이상의 기업체에서 사외이사직을 맡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외이사직을 겸임하고 있는 교수 중에서 서울대 교수가 27명으로 가장 많았고 연세대 24명, 고려대 18명, 한양대 14명, 성균관대 13명 순이었다.

***아직도 세상이 바뀐 줄 모르고 있다**

그동안 우리 재계에서 사외이사는 '거수기' 정도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IMF사태후 기업의 불투명한 지배구조가 한국경제의 최대문제점으로 지적되면서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사외이사야말로 가장 적극적으로 기업경영을 감시해야 할 존재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한 예로 금융감독당국으로 가장 선진적 경영지배구조를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아 상까지 받은 국민은행의 예를 들어보자.

98년말 주택은행장으로 취임한 김정태 행장은 99년 2월 정기주주총회에서 사내 상임이사 중심으로 짜여져 있던 이사회를 비상임이사 중심으로 바꾸는 대대적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이를 위해 종전에 9명이던 사내 상임이사를 3명으로 대폭 줄이는 반면에, 비상임이사 숫자는 10명으로 늘렸다. 이와 함께 건설업체 사장 출신 비상임이사들을 포함해 종전의 비상임이사들을 전원 교체했다.

김행장은 새로 뽑는 비상임이사의 자격조건을 "주택은행과 대출 거래가 없고 소매금융을 하는 우리 은행 경영에 도움이 될만한 분들"로 엄격히 제한했다. 이런 기준에 따라 주주대표 추천으로 7명, 이사회 추천으로 3명 등 도합 10명의 비상임이사가 선출됐다. '집중투표제'도 도입했다. 집중투표제란 소액주주가 원하는 인사가 사외이사로 선임돼 경영을 감시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선진국형 견제 장치였다.

김행장은 이들의 전문성을 경영에 활용하기 위해 이들을 이사회 운영위원회, 경영전략위원회, 리스크관리위원회, 윤리위원회, 보상위원회 등 5개 위원회에 배속시키고 위원장도 사외이사들이 맡도록 했다.

동시에 이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각종 권한을 부여했다. 종전에는 이사회 회의에 앞서 이들에게 회의자료조차 사전배포하지 않았을 정도로 비상임이사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김행장은 비상임이사들에게 법령이 허용하는 모든 장부 기록과 문서를 열람할 수 있는 '정보요구권'을 주었다.

또한 직무와 관련된 권한 행사를 위해 변호사등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했을 때에는 그 비용을 은행이 대신 지불토록 하는 '전문가 자문권'도 주었다. 이밖에 비상임이사들은 필요할 경우 부서장이하 실무진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권한도 갖게 됐다.

김행장은 그대신 사외이사들에게 명백한 보상을 해주었다. 그는 미국 방식에 따라 사외이사들에게 보상을 할 때 매달 현금 대신 주식으로 주기로 하는 '주택은행 주식보유 의무화' 조항을 신설했다. 2000년 2월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은행권 최초로 사외이사 전원에게 각각 1만주의 스톡옵션을 주기도 했다. 김행장은 합병후 이 제도를 합병 국민은행에도 확대적용했다.

이처럼 사외이사란 이제 기업의 핵심적 존재다. 이름이나 걸어놓고 때가 되면 돈이나 받는 들러리가 돼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총장 등 대다수 교수들이 얼마나 기업의 경영감시를 철저히 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개혁가는 자신에게 특히 엄격해야"**

이총장의 사외이사 겸직 사실은 이번 사태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서울대 총학생회는 서울대 사상 처음으로 총장 퇴진운동을 벌이며 학생들에게 대학본부 정책 전체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한 결과(3월27~28일),전체 등록생 1만8천8백75명 중 53%(1만79명)가 투표에 참여, 96.1%(9천6백90명)가 불신임안에 찬성했다. 총학은 이에 지난 28일 새벽부터 총장실 점거에 들어갔다.

이총장에 대한 반발은 비단 학생뿐이 아니다. 특히 기초학문 단과대학 교수들의 대부분은 이총장이 서울대를 망치고 있다고 강력히 성토하고 있다. 이총장이 주도하고 있는 서울대 개혁안이 시장주의 논리에만 치중한 결과, 서울대 본연의 역할중 하나인 기초학문 발전의 토대를 붕괴시키고 있다는 비판이다.

서울대 인문·사회·자연대 등 3개 단과대학 교수들은 지난달 18일 정부와 대학측의 기초학문 외면정책 시정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고 이를 이총장에게 전달했다.

교수들은 성명에서 "학교측이 기초학문분야의 후속세대 양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외면한 채 경제원리에 따라 대학과 학문의 기본구조를 재편함으로써 기초학문의 심각한 소외를 초래했다"며 "기초학문의 위기는 대학 및 전체 학문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교수들은 또 "시장논리만을 중시하는 총장의 대학운영 방침에 따라 대학의 이념과 본질이 크게 손상됐다"며 "실용학문과 첨단공학도 기초학문의 토대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기초학문 연구에 대한 학교측과 교육당국의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을 촉구했다. 이날 성명에는 3대 단과대 교수 4백40명중 3백55명이 서명했다.

이총장은 38년 충남 아산 출신으로 서울사대부고,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후 미 워싱턴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서울대 공대 교수로 재직하다 총장자리에 올랐다. 총장 취임 이후 서울대 개혁을 추진하며 끝없는 논쟁거리를 제공해온 이기준 총장이 지금 학생과 교수에 이어 국민들의 심판대에 오른 형국이다.

개혁가는 특히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는 게 동서고금의 진리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개혁의 본질과 정당성이 의심받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총장 사태는 우리 대학사회가 아직도 얼마나 과거관행의 늪에서 자유롭지 못한가를 극명히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위기의 대학이 살아남기 위해선 지도부부터 자기개혁에 철저해야 함을 이번 사태는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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