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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내내 바다를 품은, 최고의 섬 트레일과 동백꽃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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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걷는 내내 바다를 품은, 최고의 섬 트레일과 동백꽃 기행

2019년 3월 섬학교 <여수 금오도와 안도 2박3일 걷기 특집>

‘황금[金]자라[鰲]의 섬’ 금오도(金鰲島)의 <비렁길>은 바다를 향해 열려있는 한국 최고의 섬 트레일입니다. 해안을 따라 이어져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비렁길(벼랑길). 수직으로 향하는 등산로와 달리 수평으로 이어진 비렁길은 걷기에 더없이 편안합니다. 또 금오도와 다리로 연결된 안도(安島)는 마을 앞 바다가 한반도 모양이라 해서 유명세를 탓던 적이 있는데 작지만 유서 깊고 이름처럼 더없이 편안함을 주는 섬이기도 합니다. 수백 년 된 고목들이 가득한 안도의 수호신인 당산은 신성한 기운으로 가득합니다. 해산물이 풍성해 먹거리 또한 최고입니다. 이즈음 금오도와 안도는 동백이 제철입니다.

▲비렁길에서는 내내 바다와 내가 하나 되어 걷는다.Ⓒ섬학교

봄이 오는 길목, 3월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 제80강은 3월 1(금)-3(일)일, 삼일절 연휴를 이용한 2박3일 일정으로 여수의 섬 금오도와 안도로 갑니다. 금오도 <비렁길> 1코스부터 5코스까지 전 구간 완주를 한 뒤 안도 <상산둘레길>까지 걷습니다. 이 길은 동백나무 고목들이 즐비하여 가는 내내 동백의 향연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번 섬학교는 많이 걷습니다. 게다가 섬학교가 처음 걷는 비렁길 3-4-5코스는 가파른 곳이 많습니다. 힘들지만 섬길을 실컷 걷고 싶은 분들을 초대합니다(걷다가 힘이 부치신 분들은 중간에 버스로 픽업해드립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인 <여수 금오도와 안도 2박3일 걷기 특집>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순간이 곧 영원이다!

“온전한 걷기란 단지 다리 근육의 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잠들어 있는 생각을 깨우고 생각의 폭을 넓히는 정신의 운동이기도 하다.” (강제윤 <걷기의 의미>)

삶은 무한하지 않으나 유한하지도 않다. 그래서 순간인 줄 알면서도 영원처럼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또한 삶이다. 사람은 무한과 유한 사이를 끊임없이 길항한다. 무한과 유한, 그 경계에서 꽃처럼 피었다 지기를 거듭한다. 꽃이다. 이제 다시 꽃 시절이다. 저 어둡고 찬 겨울의 장막을 뚫고 피어오른 벚꽃들. 금오도 우실마을. 낭창하게 흐드러진 꽃의 무게에 겨워 나무들은 꽃 몸살을 앓지만 덕분에 산과 들은 온통 불 밝힌 꽃등으로 환하다. 저 꽃 시절도 순간이겠지. 하지만 꽃은 순간이 곧 영원이다. 영원은 순간을 통해서만 그 실체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을 살지만 순간이 아니다. 영원을 사는 것이다. 티끌 같은 시간, 티끌 같은 삶이 덧없으나 더없이 소중한 것은 그 때문이다.

▲섬으로의 여행은 여권 없는 해외여행이다.Ⓒ섬학교

무명이었던 금오도가 세상 속으로 성큼 걸어나온 것은 순전히 비렁길 때문이다. 해안 절벽을 따라 내내 바다를 보면서 걸을 수 있는 금오도 비렁길은 청산도 슬로길과 함께 최고의 섬 트레일로 꼽힌다. ‘비렁’은 ‘벼랑’의 여수 지방 말이다. 통영 동피랑 마을의 ‘피랑’이 벼랑인 것과 같다. 금오도 함구미선착장에서 장지까지 18.5km. 비렁길은 길 가는 내내 청옥 빛의 바다와 기암괴석으로 인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길은 하늘로 이어진 듯도 하고 바다로 이어진 듯도 하다. 수직으로 향하는 등산로와 달리 수평으로 이어진 트레일인 비렁길은 걷기에 더없이 편안하다. 곳곳이 동백 터널인 비렁길에서는 동백의 시절이면 내내 붉은 꽃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금오는 황금[金] 자라[鰲]다. 섬의 모습이 자라처럼 생겼다 해서 얻은 이름이다. 금오도(金鰲島)는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호환(虎患) 때문에 주민들이 당제를 올렸을 정도로 골이 깊고 산세가 장엄하다. 사람과 선녀의 애절한 사랑이 깃든 옥녀봉과 신랑봉처럼 금오도의 산은 골골이 신화와 전설의 무대이기도 하다. 한때 국영 사슴목장이었던 금오도의 산은 임금의 관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소나무인 황장목을 길러내는 황장봉산이기도 했다.

여수시에서는 2012년 세계해양엑스포를 유치하면서 여수 관내의 섬들을 연결하는 다리박물관 사업을 계획한 바 있다. 그래서 이미 19개나 되는 여수의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고 있거나 연결중이다. 다리가 생긴 섬들은 육지와 교통이 편리해졌지만 대신 섬의 정체성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금오도 주민들은 육지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금오도를 섬으로 남겨놓았다. 초창기에는 섬 주민들 대다수가 연육교 공사에 찬성했지만 섬의 정체성을 잃고 몰락한 타 지역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끝내 섬으로 남기로 결정한 것이다. 참으로 고맙고 아름답고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 결정 덕에 금오도는 섬의 향취를 찾아오는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동백터널을 빠져 나가면 또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섬학교

“하늘로 딱 올라가버렸으면 좋겠다”

꽃비가 내리는 봄날, 할머니들은 방풍밭에 나와 방풍나물을 뜯는다. 금오도의 밭이란 밭은 온통 방풍과 취나물, 머위나물 천국이다. 방풍을 뜯던 할머니 한 분, 지나가는 나그네에 말을 건다. "천지가 만지가 꽃이요." 그렇구나! 천지가 꽃이고 만지가 꽃이구나. 할머니가 방풍나물 하나를 건넨다. "좀 잡숴보시오. 우리들은 잘 모르지만 텔레비전서 좋다 안 합디야." 오늘 이 방풍밭에서는 할머니 세 분이 일하신다. 한 할머니는 밭주인이고 두 할머니는 품앗이를 왔다. 미나리과에 속하는 방풍(防風)은 원래 해변의 모래밭이나 바위틈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예부터 맛과 향이 좋아 잎은 나물로 애용되어 왔고, 그 뿌리는 차와 약재로 사용된다. 아이들의 머리가 좋아진다 해서 태교음식에 쓰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중풍이나 산후 풍 예방에 약효가 뛰어나다고 한다.

금오도는 여수에서 방풍나물 재배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금오도에 방풍 재배가 본격화된 것은 불과 육칠 년 전이다. 방풍이 값 비싸고 약효가 뛰어난 나물이라는 방송을 본 어떤 이가 해변에 자생하는 방풍 씨앗을 받아다 재배를 시작했고 그것이 급기야 금오도 전체로 퍼져나갔다. 요새는 관광객들이 방풍을 한 자루씩 사가기도 한다. 밭주인 할머니는 풍에도 좋지만 당뇨에도 좋다고 자랑이다. 당뇨가 있는 할머니는 직접 효과를 봤다 한다.
"입이 마르드만 방풍 즙을 내 먹으니 입 마른 게 없어져부러."

금오도는 섬이지만 어업보다는 농사가 많다. 전에는 고구마가 주 작물이었는데 방풍 재배가 시작된 뒤로는 고구마를 거의 심지 않는다.
"고구마 숭거봐야 일 년에 몇 십만 원 왔다갔다 한디 방풍은 한철 해도 2년 고구마 농사 한 것보다 나서부러."

▲밟고 가는 것이 미안해 머뭇거리게 되는 비렁길의 동백꽃밭Ⓒ섬학교

점심시간이다. 밭주인 할머니의 며느리가 도시락 세 개를 싸왔다. 고등어조림과 김치, 도시락에는 계란후라이도 하나씩 올라가 있다.
"어서 오씨오. 같이 한술 뜹시다." 할머니들이 밥을 같이 먹자고 하신다. 나그네는 식당에서 막 밥을 사먹고 온 길이다. 달디 단 들밥. 마음에 점을 찍는 시간, 점심시간은 모처럼 휴식시간이기도 하다. 방풍밭은 언덕에 있고 이 언덕에서는 우실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할머니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동네 돌아가는 일에 일일이 참견한다. 마치 중계방송 같다. 눈도 좋으시지.
"두 마리는 밭 매네."
"저게 뭐 짐승이야. 한 마리 두 마리 하게. 한 사람 두 사람이지."

우체국 뒤 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다.
"저 차는 야물게 한 차 실었다."
"돈 벌었다 하고 들고 달린다."

방풍나물을 가득 실은 트럭이 뱃시간에 맞추기 위해 속도를 내는 것을 보고 하시는 말씀.
"오리들이 와서 숭어 잡아 자치네. 숭어 덤불이 왔어."

숭어떼가 몰려든 해변으로 물오리들이 날아가 숭어를 잡아먹는다. 숭어가 보이기야 하겠는가. 이즈음에 해변으로 몰려드는 것이 숭어라는 것을 짐작으로 아시는 게지.

밭주인 할머니가 나그네에게 눙을 친다.
"여기 함씨들 다 영감 없는 사람들이요. 어디 중신 한번 서보소."
"문디 소리도 다 하네."

두 할머니가 동시에 밭주인 할머니를 향해 돌팔매질 하는 시늉을 한다. 점심이 끝나고 할머니들은 다시 밭으로 들어간다. 한 할머니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한 말씀.
"날도 좋은데 하늘로 딱 올라가버렸으면 좋겠어."

꽃비는 내리지 하늘은 푸르지 봄볕은 따뜻하지, 하늘에라도 오를 듯이 기분 좋은 봄날이다.

▲금오도 특산 방풍밭Ⓒ섬학교

돌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함구미마을, 방파제 주변에는 여행객이 떼로 몰려 웅성거린다.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긴 걸까.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 할머니 한 분이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고 있다. 썰물 때, 물이 빠지자 방파제 안에는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다. 때를 놓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들이 웅덩이에 갇혔다. 어린 숭어떼다. 돌로 쌓은 방파제 석축 사이에는 그물이 쳐져 있다. 물고기들은 함정에 빠진 것이다.

독 안에 든 물고기들, 할머니는 양동이를 들고 그저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 할머니 손길을 피해 달아나는 숭어들. 힘껏 내달려봐야 소용없다. 할머니를 따라 나온 손녀아이도 맨손으로 숭어를 잡는다. 옛날에 섬이나 바닷가에서 흔했던 원시 어로인 독살. 돌 그물과 같은 어법. 물고기가 귀해진 요즘은 좀체 보기 드문 풍경이다. 오늘 뭍에서 온 여행객들은 어업박물관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섬 여행이 가져다준 행운이다.

▲안도의 마을 신전, 안도 당산은 입구부터 신비롭다.Ⓒ섬학교

안도 백년손님 밥상

백년손님 밥상. 이런 독특한 이름의 음식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지금이야 손님이랄 것도 없는 처지가 된 사위들이지만 사위들이 백년손님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귀한 사위들이 받던 밥상. 여수 안도에 실존했던 밥상이다. 이름만으로도 행복해지지 않는가. 육지에서는 사위가 오면 씨암닭을 잡아주기도 했었지만 모두 가난했던 섬에서는 알을 얻어야 하는 씨암닭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사위를 대접할 요량으로 갯가에 나가 온갖 해산물들을 따다가 차려주던 것이 이 밥상이다. 밥상에는 주로 따개비 종류와 해초들이 올라갔다. 배말, 군봇, 거북손 등 갯바위에 붙어서 살아가는 따개비와 깊은 바다에 살아 해녀만 딸 수 있는 해녀 배말 등을 삶아내고 거기에 세모, 가사리, 미역 등의 해초를 넣어 만든 비빔밥이 백년손님 밥상이다. 이 백년손님 밥상은 예전에는 섬마을 잔치음식으로도 차려지곤 했다.

백년손님 밥상 말고도 안도에는 전해오는 토속음식들이 많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들은 주로 피문어죽을 끓여먹었다. 껍질째 말린 문어는 피문어라 하고 껍질을 벗겨 말리면 백문어라 하는데 피문어에 찹살, 대추를 넣고 문어가 말랑말랑하게 물러질 때까지 푹 고아 먹는다. 안도에는 또 문어김치란 것도 있다. 문어잡이를 하던 집들에서 주로 담가먹던 김치다. 김장을 할 때 마른 문어를 방아에 찧어서 가루로 만든 뒤 김치 양념에 넣는다. 또 말린 문어를 통째로 넣기도 하는데 김장을 할 때 김치 포기 사이에 넣어두면 김칫국물이 배어들면서 촉촉해진다. 문어는 방망이로 두드려서 장작을 때고 남은 숯불에 은근히 구워 김치에 넣는다. 생것은 비리고, 찐 것은 쉽게 물러지기 때문에 굽는다. 문어는 김치를 먹을 때 꺼내서 잘라 먹는다. 김치 속의 문어는 겨울에 다 먹어야 한다. 날이 따뜻해지면 벌레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그네는 이런 귀한 섬의 토속음식 문화가 아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쉬워 수년째 섬의 토속음식 레시피를 채록 중이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음식들이 많다. 섬들은 음식의 보고이기도 하다.

▲비렁길 5코스에서 마주한,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안도 바다 풍경.Ⓒ섬학교

장보고 선단이 오가던 고대 국제항로의 기항지

여수시 남면에 속하는 안도는 3.474㎢의 면적의 아담한 섬이다. 섬이 기러기 모양과 같다고 하여 기러기 '안(雁)'자를 써 안호(雁號)라 하다가, 1910년 안도(安島)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안도는 또 금오도와 연도(소리도) 사이에 들어있는 섬이라 해서 안섬이라고도 불렸다. 안도 사람들은 자신의 섬을 여전히 안섬이라 부른다. 안도에는 큰 마을인 안도리와 동곶이, 서곶이, 이야포 등 자연 부락에 450여 명의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는데 주민들 대다수는 중심지인 안도리에 모여 산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는 안도는 2010년 2월 18일의 연도교로 금오도와 연결되면서 낙도에서 벗어났다. 금오도 비렁길이 유명세를 타고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안도를 찾는 이들도 부쩍 늘어났다. 지금이야 금오도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옛날에는 금오도보다 더 번성했던 섬이다. 안도에도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다. 6천 년 전쯤으로 추정되는 조개더미 유적에서는 질그릇 조각들과 돌도끼, 대팻날, 숫돌, 돌톱 등 50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됐다. 2007년 안도대교 공사를 하면서는 조가비 팔찌를 찬 인골 2구가 발굴되기도 했다.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안도 유적에서 출토된 남자 머리뼈로 복원한 신석기인을 전시한 ‘신석기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다’라는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안도는 고대부터 인근의 거문도, 소리도 등과 함께 국제 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 일본 헤이안시대 승려 엔닌(794-864) 선사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도 안도의 이름이 등장한다. 엔닌 선사는 838년부터 847년 9월까지 10여 년 간의 당나라 유학 중 여행허가서를 받는데 장보고(?-846년) 대사의 도움을 받았다. 왜인들의 당나라 입국이 금지됐던 당시 엔닌은 또 장보고가 당나라 적산에 세운 절 법화원에 기거하며 불법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엔닌은 장보고에게 감사의 편지를 쓰기도 했는데 그 내용이 절절하다. 10여 년 동안의 당나라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는 장보고가 염장에 의해 암살된 뒤라 신라인 무역업자 김진(金眞)의 배를 얻어 탔다. 엔닌은 일본으로 돌아가던 길에 고이도와 거차도를 거처 안도에 기항했고 그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던 것이다.

고려 말, 조선 초부터 시작된 공도정책으로 안도 또한 오랜 세월 비워져 있었다. 안도에 다시 주민 거주가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인 1500년경에 정씨(鄭氏) 내외가 입도하면서 부터라 전한다. 정씨 내외 입도 후 안도는 크게 번성했으나 경신년(1860년) 대화재로 모여 살던 100여 호(일설에는 300호라고도 한다) 중 1호만 남고 전소됐다고 한다. 화재 이후 주민들 대다수는 당시 주민 거주가 금지됐던 금오도로 이주해 숨어 살았고 일부는 다시 돌아와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안도의 아득한 동곶이 바다Ⓒ섬학교

한반도를 품은 섬

안도 당산 오르는 길 선창가에는 한반도를 품은 섬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영월의 서강 변에 위치한 선암마을이 한반도를 닮은 지형 때문에 유명한 것처럼 안도 또한 한반도를 닮은 지형 때문에 한때 유명세를 탔었다. 안도의 큰 마을인 안도리마을 앞에는 S자 모양의 내해가 있다. 이 내해의 형상이 높은 데서 보면 그대로 한반도 모양이다. 이 내해를 안도에서는 두멍안이라 한다. 두멍이란 둠벙, 곧 작은 저수지를 이르는 말인데 바다지만 작은 둠벙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파도를 막아주는 이 한반도 닮은 둠벙으로 인해 안도는 천혜의 대피항이다. 이 두멍안은 내륙 안으로 쑥 들어가 있어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이었을까. 안도에 주민들이 정착하기 전 오랜 옛날에는 해적들의 근거지였다는 전설도 있다. 해적선을 숨기기 좋았기 때문이다. 이 두멍안 때문에 일제 강점기 안도는 어업 전진기지가 됐다. 일제가 안도에 일본인들을 이주시켜 어업조합, 순사 주재소 등을 만들고 어업권을 장악해 수산물을 수탈해갔다.

어업이 발달했던 까닭에 안도에는 부유한 집안이 많아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 대부분이 여순반란 사건 때 희생당했다. 안도는 1980년대에는 학꽁치잡이로 많은 수입을 올렸다. 학공치는 일본에 수출했는데 고가였다. 일본에서 학꽁치는 아이들 성장 단백질로 쓰였고 횟감으로 쓰였다. 송아지 한 마리에 17만 원 할 때 130마리 학꽁치 한 상자에 40만 원을 받았다니 학꽁치가 금꽁치였다. 선원들이 부족해 선주들이 선불금을 많이 주고 아이들을 선원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당시 15살짜리 아이의 선불금이 3백만원이었는데 그 돈이면 여수 시내 집한 채 값이었다. 선장은 선불금이 2천만 원이나 됐다. 일찍부터 돈을 벌 수 있으니 부모는 자식을 학교에 보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안도에서 1980년대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은 학교교육을 못 받은 이가 많다. 1980년대 초등학교 학생 수만 3-4백 명이었다. 그때는 셋방 얻기도 어려웠다고 전한다. 지금으로서는 번성했던 시절 안도의 풍경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안도는 여전히 인근의 큰 섬인 금오도나 소리도보다 어선이 많다. 안도리 한 마을만 30여 척의 어선이 어업으로 큰 소득을 올린다. 겨울에는 아구, 봄에는 갑오징어 등을 주로 잡는데 2톤짜리 어선 한 척의 연 소득이 보통 8-9천만 원에 이른다.

▲최고의 섬 밥상, 안도 해물밥상Ⓒ섬학교

양민학살의 비극이 깃든 섬

안도마을과 인접한 이야포 해변은 해수욕하기 적당한 아름다운 해변이다. 하지만 이 해변은 현대사의 비극인 양민학살의 현장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일제 패망 후 도주한 일본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망 어장을 안도마을 공동체에 빼앗긴 이웃 섬의 한 주민의 무고로 진압군이 들어와 학살의 만행을 저질렀다. 1948년 10월19일 여순사건의 와중에 진압군 김종원 대위가 연락선 동일호를 타고 함포 사격을 하며 안도 이야포로 상륙했다. 진압군은 주민들을 안도초등학교에 집결시킨 후 노인, 어린이, 여자, 청년으로 분류하여 인민군을 찾아내라며 폭행을 했고 주민 40여 명을 결박하여 둠벙안 입구 안도선착장으로 끌고 가 11명을 처형했다. 좌익과는 무관한 순박한 민간인들이었다. 또 한국전쟁 때는 350여 명의 피난민이 배를 타고 이야포로 들어와 주민들의 환대를 받았는데 미군 제트기 4대가 피난선을 폭격했고 피난선이 침몰해 피난민 150여 명이 몰살당했다. 분단의 비극과 양민학살은 남쪽 끝의 작은 섬도 비껴가지 못했으니 참으로 슬픈 민족사다.

안도의 최고 보물은 당산이다. 안도 당산에는 근래까지도 신당인 당집이 있었는데 신당에 모시던 신위가 바로 입도조였던 정씨 내외의 위패였다. 지금은 맥이 끊겼지만 안도마을의 당제는 정월 보름 오후 다섯시 무렵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열렸었다. 당주는 제사 7일 전에 하당에 들어가 청소하고 금줄을 치며 출입을 삼가고 매일 목욕재계하면서 준비했을 정도로 당제를 신성하게 모셨었다. 하지만 이 당집은 당산공원 공사 중 허물어져버렸고 그 자리에는 운동기구가 놓여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히 지금도 상록수 거목이 울창한 당산 숲은 잘 보존되어 있는데 안도 당산은 아직도 신성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마을의 신전이었던 당집도 다시 복원되길 기원해 본다.

안도에는 물질하는 4명의 해녀가 있다. 1990년대만 해도 안도에 18명의 해녀가 있었다. 안도 해녀 중에는 제주 출신보다 토착 해녀가 더 많다. 수영을 잘하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해녀가 됐다. 안도 해녀는 제주 해녀에 비해 기량이 떨어진다고 스스로들 말하신다. “깊은 데는 못 다니고 요량이 벨로요.” 예전에는 전복, 해삼, 소라, 성게, 미역, 천초(우뭇가사리), 합자 등을 따서 제법 벌이가 괜찮았지만 이제는 바다가 가물어서 벌이도 신통치 않다. “지금은 눈 씻고 보자도 없다.” 씨프린스호 기름유출 사고 이후 씨가 말랐다. 사고 이후부터 수산물이 점점 줄어들더니 이제는 바다 속이 아주 황폐화됐다. 바다를 살리기 위한 정부의 대책이 요구된다.

▲#그래 꼭 간다! 이제 안도가 된다.Ⓒ섬학교

3월 섬학교 제80강 <여수 금오도와 안도 2박3일 걷기 특집>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3월 1일(금)>
06:00 서울 출발(뱃시각에 대기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05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80강 여는 모임
-여수 돌산도 도착
-돌산도 신기항 출항
-금오도 여천항 도착
-점심식사(금오도 매운탕)
-첫째날 금오도 <비렁길> 3-4-5코스 걷기(10km)
직포-갈바람통전망대-매봉전망대-학동-사다리통전망대-온금동-심포-막개-장지
-숙소 도착(다인실)
-저녁식사(해물정식)
-자유시간 및 취침

<3월 2일(토)>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섬밥상)
-금오도 <비렁길> 1-2코스 걷기(6.5km)
함구미-미역널방-송광사 절터-신선대-두포마을-굴등전망대-촛대바위-직포
-점심식사(안도에서 아구탕)
-휴식
-안도 <상산둘레길> 걷기(4km)
안도리-이야포-안도리
-저녁식사 겸 뒤풀이(해물정식)
-자유시간 및 취침

<3월 3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섬밥상)
-안도 당산 산책
-금오 여천항 출항
-점심식사(여수에서 장어탕)
-여수어시장 장보기
13:40 서울 향발. 제80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여수 금오도와 안도 2박3일 걷기 특집> 답사지도Ⓒ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장갑, 버프(얼굴가리개), 식수, 윈드재킷, 슬리퍼,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 3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또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4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0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470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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