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이 많은 1번 국도를 피해 톰슨즈 트랙(Thompsons Track)을 달렸다. 바둑판같은 캔터베리 평원의 도로는 두세 시간씩 계속 직진이다.
사방 끝도 보이지 않는 들녘은 온통 초지다. 구릉지 한가운데 생뚱맞게 서있는 한 그루의 나무는 초지를 개발하면서 경관 목적으로 남겨놓은 것 같았다. 길게 줄지어 바람에 활처럼 휘어진 30미터가 넘는 미루나무들이 멋진 경치와 방풍 역할을 하는 데 한몫을 하고 있었다.
연노랑 초지는 1.5미터 높이의 목재 울타리로 길게 구분됐고, 양 떼들이 내 곁으로 다가와 함께 달리며 낯선 동양인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뉴질랜드는 한반도 면적의 1.5배인데 비해 인구는 고작 450만 명 정도다. 북 섬에 비해 인구가 적은 이곳 남 섬에서는 사람들보다 양들의 숫자가 더 많다고 한다.
초지에 물을 공급하는 스프링클러가 500미터는 넘어 보이고, 가끔씩 초대형 트랙터가 멈춰 내게 길을 비켜줬다.
“우비 입어야겠어요.”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광활한 평원이라서 비를 피할 곳이 없었다.
“빨리, 빨리 꺼내요.” 추니가 독촉을 했다. 우비를 왼쪽 가방에 넣었는지, 오른쪽 가방에 넣었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가방 덮개는요?” 비닐 커버를 찾는 사이에 빗물이 흠뻑 스며들었다. 헬멧은 미용실 파마용 비닐로 덮었다.
“어휴, 추워요.” 우비를 준비 못한 인천 총각의 웃옷이 젖어 살갗에 찰싹 달라붙었다.
“혹시 비닐 있어요?” 인천 총각이 춘천댁에게 물었다.
“어딘가 있을 텐데 지금 찾을 수가 없어요.” 비가 쏟아지고 있어 어쩔 수 없다며 앞질러 갔다.
비포장도로 자갈이 바퀴에 미끄러져 이리저리 튕겨나갔다. 군데군데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웅덩이를 피하지 않고 통과했다.
“여기 잠깐만요. 옷을 꺼내볼게요.” 추니가 입술이 새파래진 인천 총각에게 말했다.
“이거 한 겹 더 껴입으세요.” 잠시 빗줄기가 약해지자 추니가 가방을 뒤져 방풍 재킷을 꺼내줬다.
“와우, 훨씬 따뜻해요. 찬바람이 스며들지 않네요. 고마워요.” 고목나무 아래서 옷을 껴입고 나서는 인천 총각의 표정이 밝아졌다.
“근데 말이에요. 좀 서운해요. 춘천댁한테요.” 인천 총각이 나란히 달리는 추니에게 말을 꺼냈다.
“그게 뭔데요?”
“사실 아시다시피 춘천댁 짐을 제가 좀 덜어주고 있잖아요.”
“그렇지요. 춘천댁이 아직 초보라서요.”
“무거운 텐트도 여기에 실고요. 그런데 그럴 수가 있어요?”
“뭐가요?”
“아무리 비가 많이 내리더라도 내가 추워 죽겠다는데 최소한 비닐을 찾아 주려는 성의를 보여야 하는 거 아녜요? 비닐을 갖고 있지 않다면 몰라도. 쯧.”
옳은 얘기인 것 같았다. 하지만 비가 억수로 내리는 벌판에서 가방을 뒤져 비닐을 찾기도 그리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거센 바람에 빗물이 수평으로 날아들어 얼굴을 때렸다. 바짓가랑이와 신발은 물속에 텀벙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푹 젖었다.
회색 빙하수가 흐르는 애쉬버턴 강(Ashburton River)을 건너 저만치 보이는 헛 산(Mt Hutt) 방향으로 계속 달렸다.
“오늘 비가 많이 내려 캠핑장은 안 되겠어요.” 앞서 달려간 만능 키가 삼거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말을 꺼냈다.
“어디 호텔이나 민박에서 묵으면 좋겠어요.” 추니도 거들었다.
“20킬로미터 정도 더 가면 로지라는 방갈로 같은 숙박 시설이 있는 것 같아요.” 만능 키가 ‘맵스미’ 어플을 보며 말했다.
“그런 곳이 좋겠네요.”
당초 예정했던 캠핑장을 지나 로지를 찾아 더 가보기로 했다.
‘앗 펑크다.’ 갑자기 내 자전거가 미끄러지듯 흔들렸다. 뒷바퀴 펑크였다.
“짐을 모두 내려야겠어요.”
일행들이 서둘러 캐리어에서 가방을 떼어내고 수리 도구를 찾았다. 인천 총각은 자전거를 뒤집어 세워 바퀴를 빼내고, 만능 키는 새 튜브를 꺼내 공기를 주입했다.
불과 10분 만에 끝냈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제 목적지인 필 포레스트(Peel Forest) 로지까지는 15킬로미터 정도 남았다.
오후 9시 필 포레스트 로지에 다다르자 오늘은 웨딩 행사가 있다는 안내 표지판이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만능 키와 춘천댁이 앞장서 주차장에 자전거를 세우고 로지 관리실로 들어갔다.
“오늘 여기서 묵으려고요.” 만능 키가 프런트를 찾아가 관리인에게 물었다.
“오늘은 웨딩 행사로 만실이라서 숙소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관리인이 웃으며 거절했다.
“그럼 캠핑장에 텐트는 칠 수 있나요?”
“아뇨. 이곳은 캠핑장을 운영하지 않습니다.”
“헐, 그럼 어떡하지.” 만능 키가 뒤를 돌아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곳을 찾아보세요.”
“혹시 가까운 캠핑장이나 숙박 시설을 아시나요?”
“조금 더 가면 ‘에코 로지(Eco Lodge)’라고 있는데 요즘 운영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현관으로 다시 나오는데 춘천댁이 한쪽 구석에서 어떤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국에 가보신 적이 있다고요?” 친한 사이인 듯 표정이 밝아 보였다.
“네. 아주 오래 됐어요.” 아주머니는 웨딩 상차림을 하느라 빵을 썰면서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부탁이 있는데요.”
“그게 뭔데요?”
“빵 한 조각 주실 수 있어요?” 춘천댁이 왼손 검지 손톱 끝을 꼭 쥐어 들어 보이며 사정하고 있었다.
“안 됩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요.”
“제가 드릴 수는 없습니다.” 아주머니가 미안하다는 듯 답했다. 어깨가 축 쳐진 채 현관을 빠져나오는 춘천댁이 안쓰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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