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이 한국기업평가(주)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제2금융권 17개사에게 경영인사권 위임을 강요하며 극비리에 작성한 '주주간 협약서'의 적법성과 정당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한기평 주식의 6.3%밖에 보유하지 않고 있는 산은이 전체 지분의 40%를 보유하고 있는 다른 금융기관들에게 경영인사권을 위임하라고 강요한 행위는, 몇% 안되는 지분만 갖고서도 전체그룹을 좌지우지해온 재벌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는 이유에서다.
아울러 이같은 행위는 산은이 다름아닌 국책은행이라는 점에서 해외투자가들 사이에서 '위장 민영화' 또는 '신관치'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또다른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마피아식 '복종과 침묵'을 요구하는 비밀문건**
본지가 26일 입수한 이른바 '주주간 협약서'는 한국산업은행 총재 명의로 지난해 6월 한국기업평가 주식을 보유중인 17개 제2금융권과 8개 법인(기업) 등 전체 지분의 약 60%를 소유하고 있는 기관주주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주주간 협약 체결'이라는 제목의 이 문건에서 산은은 "동사가 코스닥에 등록될 경우 10%이상의 대주주가 없는 지분구조의 특성상 경영 불안문제 발생의 소지가 있으며, 또한 기존주주 보유지분의 매물화에 따른 주가의 하락 등도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산은은 이에 "동사의 경영 불안요인을 제거하여 경영진이 영업에 전념토록 함으로써 기업가치를 증대시키고 또한 주식의 매각을 보류함으로써 적정 주가 수준의 유지를 도모하는 것이 기존 주주의 이익을 보호하는 방안이라 사료되어 귀사와 저희 은행간에 다음과 같은 주주간 협약 체결을 제의하오니 검토하신 후 협조해 주시길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산은은 이어 별첨한 4개 조항으로 작성된 '주주간 협약서'를 통해 임원 선임권 이양을 요구하고 있다.
제1조 '목적'은 앞의 취지를 요약, 정리하고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제2조인 '임원 선임' 조항으로, 산은은 "회사(한기평)의 이사 및 감사 선임은 상호협의를 통하여 을(산업은행)이 추천하기로 하며 추천한 이사 및 감사에게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갑(주식보유 금융기관 및 법인)은 주주총회에서 이사 및 감사로 선임되도록 협조하기로 한다"고 돼 있다.
제3조 '주식의 양도'는 "보유하고 있는 주식을 제3자 앞 양도하는 경우에는 상호협의하여 결정하기로 한다"로 돼 있다.
마지막 제4조는 '비밀유지 의무'로 "본 협약내용에 대하여 비밀을 유지하도록 한다"고 돼 있다.
한 마디로 말해 마피아식 '복종과 침묵'을 강요하고 있는 문건인 셈이다.
***일부 대그룹은 서명 거부**
이 문건이 지난해 6월 뜬금없이 산은에 의해 한기평 주식보유 기관들에게 돌려진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기평 관계자는 "8월 중순께 평소 친분이 있던 한 주주기관으로부터 '미안하다'는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산은이 6월부터 기관들에게 주주간 협약서를 돌리며 서명할 것을 종용해 윤창현 한기평 사장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불가피하게 서명을 했다는 전언이었다. 그로부터 두어곳 기관에서도 같은 사과성 연락을 받았다.
서둘러 진상을 조사해보니, 정건용 산은총재의 고등학교 및 대학교 같은 과 2년선배인 오규원 산은 이사의 임기가 7월로 다가오자 차기 한기평 사장으로 오 이사를 내정해놓은 상태에서 이를 확실하게 매듭짓기 위해 주주들로부터 임명동의서를 받기 시작했다는 혐의를 잡을 수 있었다.
문건을 돌리는 과정에 재무건전도가 높아 굳이 산은 눈치를 안봐도 되는 S, L사 등 일부 대그룹들은 '주주권리' 박탈을 용인할 수 없다며 서명을 거절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자사가 직접 산은과 거래를 하거나, 아니면 모그룹이 산은과 거래중인 대다수 기관투자가들은 이 문서에 서명한 것으로 확인됐다.
산은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지분 6.3%를 포함해 현재 43%의 지분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단 '작전 성공'인 셈이다.
***시장경제로의 전환에 역행하는 조처**
산은은 윤창현 사장의 공개반발에도 불구하고 내달 7일 임원선임협의회를 구성해 내달 28일 주주총회에서 윤 사장 등 기존 임원진을 교체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과연 오규원 전 산은 이사를 당초 방침대로 차기사장으로 밀어부칠지, 아니면 새 인물로 바꿀지는 아직 미지수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산은이 확보한 지분 43%를 앞세우면 산은은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킬 수 있을 게 확실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같은 산은의 행위가 얼마나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이다.
산은은 99년 6월 자신의 보유지분을 기관주주들에게 매각하기 전까지만 해도 지분 1백%를 보유하고 있던 한기평의 명실상부한 주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보유지분이 6.3%인 최대주주에 불과하다. 더욱 미·영 합작신용평가기관인 피치사가 산은과 마찬가지인 6.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더욱 산은지분 매각은 민영화 조치인 동시에 "30대 재벌이나 금융기관은 10% 이상 지분을 보유할 수 없다"는 신용정보법에 기초한 조치이기도 했다. 지분이 편중될 경우 객관적 신용평가가 불가능하다는 법적 취지에 따른 규제이다.
산은의 이번 '비밀 합의서' 파동은 이런 전후 맥락에서 볼 때 시대역행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또한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시장경제로의 전환이라는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리려는 행위로까지 지탄받을 소지가 크다.
정건용 산은총재는 한가지를 곱씹어 생각해볼 때가 아닌가 싶다. 과연 국책은행이 비밀 협약서로 사장을 선임하는 신용평가기관의 평가를 과연 국내외의 누가 객관적 평가라고 믿을 것인가이다.
정 총재의 결단을 지켜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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