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제64강으로, 경기도 최북단 고을인 <연천>에서 한반도 최초의 거주지인 구석기유적지와 임진강 단애 위에 세워진 고구려성, 그리고 대학자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전서체 비문을 감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64강은 2019년 2월 24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4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고인돌공원-전곡구석기유적지-은대리성-염근당(조선왕가)-임장서원-연천향교-점심식사 겸 뒤풀이-은거당터-미수허목묘-이진무묘-당포성-숭의전지-호로고루-경순왕릉-서울의 순입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답사 코스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64강 답사지인 <연천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군사분계선과 맞닿은 경기도 최북단의 고을
연천은 경기도 최북단에 위치하며 산줄기는 동쪽으로 고대산(832m), 보개산(877m), 화인봉(805m), 향로봉(612m), 종자산(644m)의 연봉 너머로 강원도 철원과 접해 있고, 남쪽으로 감악산(675m), 마차산(588m), 종현산(588m) 연봉 너머로 경기도 동두천과 접해 있으며, 북쪽과 서쪽은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북녘과 접해 있습니다.
연천의 물줄기는 함경남도 덕원군 두류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임진강과, 북녘 땅 평강군 장암산에서 발원하여 철원·포천을 지나 연천 은대리성에서 차탄천을 합류한 한탄강이 연천군 군남면 남계리의 도감포에서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 경기도 파주시 탄현에서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연천 지역을 흐르는 임진강은 달리 연강(漣江)이라 부르며, 임진강은 대부분 수직절벽을 이루고 있어 징파나루, 고랑포나루, 임진나루 등을 제외하고는 건너기가 어렵습니다.
연천 지역은 온조가 한강 유역에서 백제를 건국한 후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에는 백제의 영역에 속했고,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대에 고구려의 남진경영을 하던 시기에는 고구려의 공목달현이 되었으며, 한강 지역을 차지한 신라가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임진강 이남 지역이 신라에 편입되자 임진강은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하는 국경하천이 되었습니다. 한탄강변의 매초성(현 대전리산성)에서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물리친 후 연천은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어 757년(경덕왕 16) 군의 명칭을 공성현이라 하였습니다.
고려시대는 940년(태조 23) 군의 명칭을 장주로 변경하였고, 1018년(현종 9) 지방행정제도 개편에 따라 장단현(현 장남면)은 개성현과 더불어 최초의 경기제(京畿制)를 구성하는 중심지역이 되었습니다. 1069년(문종 23) 승령, 삭령, 마전, 적성을 장주에 편입해 개성부에 속하게 하였고 1309년(충선왕 원년) 군의 명칭을 장주에서 연천(漣川)으로 변경하였습니다.
조선시대는 1413년(태종 13) 연천현을 설치하였고 1906년(광무 11) 철원군 관인면을 연천군으로 편입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1914년 마전·적성의 2개면과 삭영군 대부분과 양주군 영근면을 연천군에 편입했습니다. 해방 후 1945년 적성면·남면 전역과 백학면, 전곡면 일부를 파주군에 편입시키고, 1979년 연천면을 읍으로 승격시켰으며 1989년 백학면 원당출장소를 장남면으로 승격하여 현재와 같이 2읍 8개면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전곡리 구석기유적
연천에는 구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연천의 한탄강변은 한반도 최초의 인류인 ‘호모 에렉투스’의 거주가 시작된 곳으로 이들이 남긴 주먹도끼는 모비우스 이론을 뒤집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습니다. 1978년 겨울 한탄강 유원지에 놀러 왔던 미군 병사가 지표에서 석기를 발견하여 서울대 김원룡 교수에게 가져갔고 김 교수와 영남대 정영화 교수에 의해 아슐리안계 구석기 유물로 밝혀지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구석기유적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주먹도끼와 가로날도끼 등 아슐리안형 석기의 발견 이후 현재까지 11차에 걸친 발굴을 통하여 3,000여 점 이상의 유물이 채집되었으며 이들 석기의 발견으로 이들 석기의 존재 유무로 동아시아와 아프리카·유럽으로 구석기문화를 양분하던 모비우스의 학설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연천고인돌공원은 원상태의 보존이 어려운 연천 지역의 고인돌을 효율적으로 보존, 관리하고자 2004년 이곳에 이전, 복원하여 조성한 것입니다. 통현리 일대는 연천 지역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으로 현재는 16기의 고인돌이 이전되어 있으며, 그 중 2기(2호 및 3호)는 발견 당시의 위치에 원형 그대로 복원하였습니다. 16기 중 2기는 북방식이고 나머지는 모두 남방식입니다.
임진강, 한탄강 북안의 고구려성들
연천에는 임진강, 한탄강 북안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방어성곽인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의 유적이 당포성, 은대리성, 호로고루 등 세 곳에 남아 있습니다.
당포성(堂浦城)은 당포나루로 흘러오는 당개 샛강과 임진강 본류 사이에 형성된 약 13m 높이의 삼각형 절벽 위에 쌓은 고구려의 방어성곽입니다. 평지로 연결되어 출입이 가능한 동쪽에만 인공성벽을 쌓았습니다. 성벽은 길이 50m, 잔존높이 6m 정도이고 동벽에서 서쪽 끝까지의 길이는 약 200m입니다. 성 밖의 저지대에는 너비 6m, 깊이 3m의 대형 해자가 설치되어 있고 성벽 외면에는 이른바 기둥구멍이라 하는 단면 방형의 수직 홈이 일정 간격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만주 지역 고구려의 성들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습니다.
당포성의 배후에는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마전현이 있어 양주 일대에서 최단거리로 북상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당포성은 최적지입니다. 북진 시에도 강의 북안에 교두보를 확보해야 하므로 신라의 점령기에도 꾸준히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출토된 유물은 신라계 유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고구려의 토기편과 기와편 그리고 고려시대·조선시대의 와편도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은대리성은 하천 침식작용으로 생긴 삼각형의 대지 위에 쌓은 성으로 서울과 원산을 잇는 교통로로 활용되어 왔던 추가령구조곡이 주변을 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수로와 육로 어느 쪽이든 주변 지역과의 교통이 아주 편리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규모로 보면 우리나라의 가장 큰 고구려 성곽유적으로, 성의 둘레가 약 1km에 달하고 외성과 내성의 이중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한탄강과 차탄천이 만나면서 형성된 여울목의 요충지를 통제하는 방어진지와 고구려 남진 시기 후방의 거점기지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의 규모는 동서 400m, 남북 145m로 둘레 1,069m, 면적은 32,592㎡이며 발굴조사를 통하여 문지(門址) 3개소, 대형 건물지 1개소, 치성 3개소와 내벽에서는 빗물의 배수를 처리하기 위한 구(溝)시설이 확인되었습니다. 유물은 고구려 토기편이 대부분이고 소량의 백제 것도 있습니다. 동벽의 초축 시기와 일치하는 배수구 바닥에서 고구려 토기가 집중적으로 출토된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 의해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발굴된 토기의 편년과 고구려가 이 지역에 처음 진출하였던 시기를 고려하면 5세기 이후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신라계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후에는 폐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호로고루는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지류가 흐르면서 형성된 약 28m 높이의 현무암 수직단애를 이루는 고랑포 주상절리 적벽 위에 조성되었습니다. 이곳은 갈수기에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평양과 서울을 연결하는 가장 단거리의 육상교통로가 통과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호로고루에 임진강 국경방어선을 관장하는 국경방어사령부를 두었습니다. 평양 지역에서 출발한 고구려군이 백제 수도인 한성으로 진격하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은 평양에서 개성을 거쳐 문산 방면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15㎞ 정도 우회하여 장단을 지나 호로고루 앞의 여울목을 건너 의정부 방면으로 진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일대의 임진강은 <삼국사기>에도 전투기사가 여러 번 등장할 정도로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성벽의 둘레는 401m, 내부 면적은 606㎡이고 동쪽 벽은 석성과 토성의 장점을 적절하게 결합하여 축조하였고 석축으로 구축되기 전 목책 단계가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며 이는 임진강의 전략적 의미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즉, 551년 나제연합군에 의해 한강 유역을 상실한 고구려가 임진강 유역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토성보다 튼튼한 석성으로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토성과 석성의 장점을 모두 취해 내구성과 방어력을 높인 축성기법은 고구려 수도인 중국 집안의 국내성과 평양의 대성산성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구석기시대의 주먹도끼를 비롯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고구려의 유물이 가장 많습니다. 고구려의 관모인 절풍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유추할 수 있는 토제 모형, 고구려 도량형을 이해할 수 있는 저울추와 도침, 삼족벼루, 도침형태의 토제품 등도 출토되었습니다. 창고시설에서는 쌀, 콩, 조 등의 탄화곡물과 소, 말, 사슴, 개, 멧돼지 등 다양한 동물 뼈가 수습되었으며 화살촉, 도자류, 금동불상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호로고루의 어원에 대해서는 이 부근의 지형이 표주박, 조롱박과 같이 생겼다하여 호로고루라고 불린다는 설과 ‘고을’을 뜻하는 ‘홀(호로)’과 ‘성’을 뜻하는 ‘구루’가 합쳐져 ‘호로고루’가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연천향교와 임장서원
연천에는 관학으로 연천향교, 사학으로 임장서원이 남아 있습니다.
연천향교는 1379년(태조 7) 읍내리 부근에 세워진 후 1658년(효종 9)에 1차 이전하였고, 한국전쟁 중에 전소되었다가 1965년 차탄리 부근에 재건되었으나 1989년 도로공사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습니다. 지금은 대성전, 명륜당, 동, 서재, 내, 외삼문 등 6개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위와 송나라 2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임장서원(臨漳書院)은 임계중이 기묘사화 때 정계를 은퇴하고 낙향하여 건립한 무이정사를 모태로 창건되었으나 1700년(숙종 26) 주자서원으로 새롭게 창건하여 주자의 위패를 모셨다가 1713년(숙종 39) ‘임장’이라 사액되어 임장서원으로 개칭되었으며 1801년(순조 1)에 송시열을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995년부터 1998년 사이에 재건된 것이며 이때 임계중도 추가 배향되어 지금은 대성전 중앙에 주희, 우측에 임계중, 좌측에 송시열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임장서원의 남쪽 경작지에 원래 서원의 구조물로 여겨지는 석재와 기와편 등이 산재되어 있습니다.
사대부 가옥 은거당 터와 황족 고택 염근당
연천에는 사대부 가옥인 은거당 터와 황족의 고택인 염근당이 남아 있습니다.
은거당(恩居堂)은 미수 허목이 말년에 저술활동을 하던 곳으로, 84세가 되던 해인 1678년(숙종 4) 국가에 공이 많은 신하를 예우하기 위하여 왕명으로 건립된 7칸 규모의 가옥이었습니다. 허목은 은거당이 완성된 후 당호를 ‘수고은거(壽考恩居)’라 하고 괴석원, 십청원 등의 정원을 손수 가꾸었다고 합니다. 은거당에는 허목의 각종 유품을 비롯하여 정원에 각종 괴석, 희귀목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건물이 모두 타버려 지금은 그 터만 남았는데 허련이 그린 ‘십청원도’에서 옛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정원의 괴석과 희귀목도 모두 밀반출되었으며 근래에 십청원에 있었다는 ‘석호(石戶)’ 명문 괴석이 발견되어 허목의 묘 아래에 옮겨다 놓았습니다.
염근당(念芹堂)은 조선조 역대 왕의 종묘제례를 관정하였던 황족 이근(李芹)의 고택으로 1800년대에 명륜동 문묘 옆에 창건되어 1935년에 99칸으로 중수된 황실가의 전통 한옥입니다. 2008년 6월 15일부터 약 5개월에 걸쳐 트럭 약 300대 분량의 자재를 해체하여 자은산 기슭, 현 위치로 옮겨 2010년 9월 7일 중건하였습니다. 염근당을 이건하기 위해 해체하는 과정에 붉은 비단에 싸인 상량문과 함께 금 셋, 은 다섯, 동 일곱 덩어리의 귀중한 보화들이 나왔습니다. 창건 당시 상량문은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무정 정만조가 짓고, 당대의 명필 농천 이병희가 글씨를 썼습니다.
경순왕릉과 기황후 능터
연천에는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의 능과 고려 말 원나라의 기황후의 능터가 있습니다.
경순왕릉은 고려시대 왕릉에서 보이는 곡장이 둘려져 있어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조성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임진, 병자 양란을 겪으면서 무덤은 자취를 감추었다가 영조 때 지석을 발견하면서 무덤을 새로이 쌓았습니다. 한국전쟁 후에는 돌보는 사람이 없어 무덤이 소실될 뻔했으나 1970년대 한 병사가 잡목 숲속에 쓰러져 있는 묘비를 발견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935년 10월 경순왕은 신라 주변의 땅이 모두 다른 나라의 소유가 되고, 국력은 약해져 도적이 들끓으니 도저히 나라를 지탱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국서를 보내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왕건은 경순왕의 항복을 받은 후 신라를 경주로 개칭하여 경순왕의 식읍으로 삼게 했으며 경순왕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향했는데, 이때 말과 수레가 30여 리나 길게 늘어섰다고 합니다. 왕건은 경순왕을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와 혼인하게 하여 개경에서 살게 하였으며, 왕건도 경순왕의 사촌과 혼인하고 그 사이에서 난 아들 욱(旭)으로 왕위를 잇게 하였습니다.
978년 경순왕이 개경에서 승하하자 후손들과 신라의 유민들은 왕의 고향인 경주로 가서 장례를 지내고자 길을 떠났습니다. 이에 고려 조정은 긴급회의를 열어 “경순왕은 태조의 따님과 결혼하였으니 고려의 왕족이나 다름없다. 고려의 왕족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도성 밖 100리 이상을 나가서는 안 된다. 경순왕이 왕으로서의 예를 받고자 하면 개경 도성 밖 100리 안쪽에서 장례를 치러야 할 것이다”라고 통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왕의 주검은 길을 멈추고 개경에서 80리 떨어진 장단군 남팔리, 현재의 장남면 고랑포리에 모셔지게 된 것입니다.
전하는 바 기황후(奇皇后) 능터에는 현재 묘와 관련한 뚜렷한 흔적은 없으나 곡담에 쓰였을 와편이 수습되었고 근래에 석수 2점이 발견되어 연천향토사료관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황후총(皇后塚)이라 하여 “현에서 동쪽 20리 재궁동에 소재하며 속전하기를 원(元) 순제(順帝) 기황후가 장례를 고국에서 치르기를 원해 이곳에 장사지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황후는 원 순제의 황후로 고려인 기자오의 딸이며 북원 소종(昭宗)의 생모입니다. 1333년(충숙왕 2) 원의 휘정원에 있던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의 추천으로 궁녀가 되어 순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정후인 다나시리의 학대를 받았습니다. 1339년 황자를 낳고, 1340년 2월 실권자인 백안 세력이 물러나자 4월에 제3황후로 책봉되었습니다. 황후가 된 뒤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휘정원을 자정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나 1368년 원의 멸망 후의 행적은 알 수가 없습니다.
고려 왕들을 모신 숭의전과 이색의 영당
연천에는 고려의 태조를 비롯한 4왕과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과 고려의 마지막 충신 이색의 영당이 있습니다.
숭의전(崇義殿)은 원래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에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숭의전의 시초입니다. 1399년에는 왕명에 따라 태조,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충경왕), 충렬왕, 공민왕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습니다. 1425년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5왕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토록 하였습니다.
1451년에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인 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 등 16명을 배향토록 하였습니다. 1452년에 고려 현종의 먼 후손을 공주에서 찾아내서 순례라는 이름을 내린 후 부사를 삼아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습니다.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5차례에 걸쳐 개수와 중수를 반복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전소되었고, 1972년에 사적으로 지정하고 다음해에 재건하였습니다. 지금은 4왕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 고려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배신청,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이안청, 제수를 준비하는 전사청, 제구를 보관하고 제관들이 제례를 준비하는 앙암재 등 5동의 건물과 내신문·외신문·협문 3동, 운조문 등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목은 이색 영당(影堂)은 이색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686년(숙종 12)에 창건되었으나 한국전쟁 중 전소되었고 1973년과 1993년 두 차례에 걸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당에 모셔진 영정은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수송영당의 원본을 모사한 것입니다. 목은의 영당이 이곳에 세워진 이유는 첫째, 1389년 이성계 일파에 의해 단장에 유배된 인연이고, 둘째는 5대손인 이명은이 노동리에 정착하여 한산이씨의 집성촌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색의 본관은 한산, 호는 목은, 시호는 문정입니다. 15세에 부음(父陰)으로 별장의 직을 얻었고,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가 되어 1348년(충목왕 4)에는 원(元)의 국자감 생원이 되었습니다. 1351년(충정왕 3) 부친상으로 귀국하여, 1353년 향시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1365년 신돈이 등용될 때 그는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1373년 한산군에 책봉된 후에는 신병으로 관직을 사퇴했으나 1375년(우왕 1)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고, 우왕의 사부가 되었습니다. 1389년 위화도회군으로 문하시중이 되어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와 함께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이성계가 득세하자 장단, 함창 등지에 유배되었습니다. 조선 개국 후 태조가 1395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하였으며, 이듬해 여강의 신륵사로 가던 중 사망하였습니다.
연천의 왕족 묘들
연천에는 왕족의 묘들도 있습니다.
낙선군 묘는 동원군부인 김씨와의 합장묘로 석물로는 봉분 전면에 혼유석, 묘비, 상석,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는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이 각 2기씩 있습니다. 묘비의 비문 후면에 ‘崇禎戊辰紀元後 九十九年丙午日 日立’의 기록으로 보아, 1726년(영조 2)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낙선군 이숙은 인조와 귀인 조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인조 말년에 세력을 떨치던 김자점이 유배되자 형이나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재기를 노리려던 공서파들의 모의가 발각되어 벼슬과 녹을 삭탈 당하였고 1651년(효종 2) 사건에 관련된 그의 어머니는 사사되고 이듬해 낙선군도 해도에 귀양 갔다가 강화 교동에 위리안치 되었습니다. 1656년 여름에 풀려나 1659년 작록을 회복 받고 1673년(현종 14) 판중추가 되었습니다.
운성부원군 묘는 정혜옹주와의 합장묘로 봉분 전면에 상석 2기, 장명등, 묘표가 있고 좌, 우에 문인석이 2기씩 있습니다. 묘표는 1466년(세조 12) 3월에 건립된 것입니다. 운성부원군 박종우는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운봉이고 태종의 사위입니다. 1419년(세종 1) 태종의 서녀 정혜옹주와 결혼하여 운성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자헌대부에 승품했고 1423년(세종 5) 사은사로 명에 다녀온 뒤 정헌대부 삼군장수, 호조판서, 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했습니다. 1447년(세종 29)에 이조판서 좌찬성을 거쳐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 1등이 되고 운성부원군에 봉해졌고 1455년(세조 원년)에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어 정1품인 유록대부에 올랐습니다.
영원부원군 묘는 원형의 봉분으로 호석을 두르고 있습니다. 봉분 전면에 묘표와 상석,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문인석이 마주보고 있습니다. 영원부원군 윤호는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입니다. 1447년(세종 29) 생원시에 합격하여 군기시주부, 의금부도사, 신창현감, 밀양부사, 양주목사 등을 역임하였고, 1472년(성종 3) 춘장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그 이듬해 성종이 그의 딸을 왕비로 삼아 정현왕후가 되자 영원부원군에 봉하여졌습니다. 1488년 영돈녕부사에 이르고 이듬해 사복시제조를 겸하고 1495년(성종 25) 우의정이 되면서 기로소에 들어가 궤장(几杖)을 하사받았습니다.
취우옹 이진무와 미수 허목
연천에는 사돈지간인 취우옹 이진무와 미수 허목의 묘가 있습니다.
이진무 묘는 부인 남양홍씨와의 합장묘입니다. 봉분 전면에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좌, 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을 한 쌍씩 갖추고 있습니다. 묘비는 한국전쟁 당시 탄흔으로 약간의 파손이 있지만, 미수 허목이 직접 짓고[撰] 해행서체로 쓴[書] 글로 미술사나 금석학적으로 뛰어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건립 연대는 1680년(숙종 6)입니다.
취우옹 이진무는 본관은 전주로 효령대군의 후예입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미수의 종형인 허후의 문하에 들어가 깊은 영향을 받고 평생 스승으로 섬겼는데 이러한 사제관계는 그를 평생토록 예법을 좋아하고 성현들의 절개를 흠모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특히 임진강의 웅연(熊淵)가에 위치했던 취우당(醉愚堂)에서 일생을 무위자연의 도가적 사상과 처사(處士)의 몸가짐으로 사돈인 미수 허목과 교유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다간 인물입니다.
취우당 앞의 웅연은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에 소상히 그려져 있습니다. 1742년(영조 18) 10월 보름, 이 날은 북송의 시인 소동파가 적벽강에서 뱃놀이를 하며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지은 660주년 되는 날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임진강 우화정(羽化亭)에서 웅연(熊淵)까지 선상(船上) 연회가 벌어졌는데 참석자는 경기도관찰사 홍경보, 연천현감 신유한, 양천현령 정선이었습니다. 우화정은 경기 연천군 중면 대사리로 지금은 임진강댐 상류 북한 땅입니다. 청천 신유한이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이라면 겸재 정선은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이 뱃놀이에서 신유한은 <의적벽부’(擬赤壁賦>를 지었고 겸재는 배가 우화정을 떠나는 장면과 웅연에 닿는 모습을 각각 <우화등선(羽化登船)>과 <웅연계람(熊淵繫纜)>이라는 그림에 담았습니다. 여기에 창애 홍경보의 서문이 더해진 시화첩을 세 벌 만들어 나누어 가졌으니 이것이 유명한 <연강임술첩>입니다.
미수 허목 묘역은 민통선 안에 있는데 동남향한 나지막한 구릉 상에 있는 6기의 묘 가운데 제일 아래에 있습니다. 석물로는 봉분 전면에 묘비,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있고 양쪽에 문인석과 망주석이 1기씩 있으며 제수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묘비는 전, 후 양면에 비문이 있으며, 비문의 후면에 있는 <허미수자명(許眉叟自銘)>이란 기록으로 보아 생전에 자명자찬(自銘自撰)한 것으로 보입니다.
허목의 본관은 양천이고 1615년(광해군 7) 정언웅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부친이 거창현감에 임명되자 부친을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습니다. 1624년(인조 2) 광주(廣州)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독서와 글씨에 전념하여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를 완성하였는데 이는 독특한 전서체로 서예사상 혁명적인 업적으로 평가되며 추사체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1674년(현종 15)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삼공(三公)에 올랐습니다. 1678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인 연천으로 돌아와 저술활동과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습니다. 남명 조식의 제자인 정구를 스승으로 삼아 예학과 고학에 일가견을 이루었고 그림·글씨·문장에 모두 능했으며 특히 전서에 능하여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는데, 취우옹 이진무와 선생의 묘비 글과 삼척의 동해척주비(東海陟州碑)를 통해 그 뛰어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받았습니다.
임진왜란 때 큰 공 세운 장군들
그리고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윤인함, 정발장군, 박진장군의 묘도 있습니다.
윤인함 묘는 봉분 앞에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묘비 등 최근에 건립한 석물과 원래부터 있던 문인석이 1기가 있습니다. 묘비는 우암 송시열이 쓴 것으로 1617년(광해군 9)에 건립되었습니다. 또한 묘역 입구에 1639년(인조 17)에 건립된, 이조참판 민병승이 찬하고 비서원승 김녕한의 글씨와 규장각학사 윤용식의 전자를 한 신도비와 1922년 건립된 것으로 경주에 있던 것을 옮겨온 동도복성비(東都復城碑)가 있습니다.
윤인함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 호는 죽재, 1553년(명종 8) 진사시에, 1555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1584년(선조 17)에는 동지사로 명에 다녀왔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주부윤으로 재직 중 적군을 방어하지 못한 죄로 좌천당하였으나 경주성이 함락된 후 의병을 모아 경주성의 회복에 큰 공을 세워 선무원종호성공신이 되었습니다. 1597년에 형조참판이 되어 영위사로 명에 장수를 맞이하러 평양에 갔다가 객사하였으며 사후에 이조참판, 대제학에 증직되었습니다.
정발장군 묘는 부인 풍천 임씨와의 합장묘입니다. 여러 석물이 있었으나 훼손되고 현재 새로 건립한 상석, 향로석, 무인석, 망주석 등이 있습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으나 소실되었고, 1982년 다시 비를 세웠습니다. 정발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에서 출생하였고 호는 백운, 본관은 경주입니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며 해남 현감, 거재 현령, 위원 군수, 훈련원 부정을 역임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부산진첨절제사로 부임하였습니다.
1592년 4월13일 왜장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8,000명의 왜적 1진은 부산진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부산진전투는 임진왜란의 최초 전투로 정발의 지휘 하에 1,000명 규모의 군, 관, 민이 일심으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다음날 성이 무너지고 정발장군도 41세의 나이로 순절하였습니다. 부산진전투가 끝나고 장군의 시신을 찾지 못하여 유품(옷과 갓)만 수습하여 의관장을 치렀으며 후에 무공이 알려져 좌찬성에 추증되었습니다. 시호는 충장으로 부산의 충열사(안락서원)에 제향되었습니다.
박진장군 묘는 두일리 밀양박씨 선영 내에 맨 위쪽에 있습니다. 봉분 전면에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좌, 우에 문인석이 2기 있으며 봉분 앞의 묘비가 있던 자리에는 장방형의 비좌만이 남아 있는데 비신은 후대에 손실된 것으로 보입니다. 박진은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비변사에 있다가 1589년(선조 22) 심수경의 천거로 등용되어 선전관을 거쳐 1592년 밀양부사가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경주성을 탈환하여 왜적이 상주나 서생포로 물러났고 이 때문에 영남지역 수십 개의 읍이 적의 약탈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공으로 선조로부터 양피의(羊皮衣)를 하사받았고, 가선대부에 올랐습니다. 1596년(선조 29)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목사를 지내고 뒤에 참판에 올랐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습니다.
심원사와 오봉사 절터
연천에는 심원사와 오봉사의 절터가 남아 있습니다.
심원사는 보개산에 있었으며 석대암, 남암, 지장암, 성주암 등 여러 암자를 관장하던 지장도량의 본산이었습니다. 647년(진덕여왕 1) 영원조사가 영주산(현 보개산)에 영원사, 법화사, 흥림사, 도찰사를 차례로 창건한 후, 859년(헌안왕 3)때 범일국사가 흥림사를 중창하고 천불을 만들어 봉안하였습니다. 1393년(태조 2) 화재로 모든 전각이 전소되었고, 1396년(태조 5) 무학대사가 건물을 삼창(三創)하면서 영주산을 보개산으로 흥림사를 심원사로 개칭하였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후 1592년(선조 28) 사창(四創)되어 서산대사의 법맥을 잇는 소요(逍遙), 태능(太能), 제월(霽月), 경헌(敬軒) 등 조선 중기의 선승들과 수많은 학승들이 주석 정진하는 도량이 되었습니다. 1907년 정미의병사건 때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항쟁하던 의병과 관군의 공방전 속에서 장래의 화근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관군에 의해 250여 칸의 건물과 1,602위의 불상이 완전 소실되었습니다. 1909년부터 점차 복구되어 8동의 건물을 갖추게 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다시 모두 전소되었으며 군사보호구역 안에 남겨진 보개산 심원사의 기둥을 헐어 철원 심원사의 법당인 명주전을 건립하면서 심원사의 사적은 철원 심원사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오봉사지 부도는 석종형으로 부도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어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다만 남동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절터만 남아 있는 오봉사가 1407년(태종 7)에 지정된 전국 88개의 자복사찰(資福寺刹) 중 하나였을 정도로 연천 일대에서 대표되는 사찰이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민통선 출입을 위해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하세요.
*걷기 편한 차림, 보온모자, 선글라스, 식수, 장갑, 버프(얼굴가리개),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가급적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를 찾으시면 2월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