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거리에 나가면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 포스터나 플래카드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신문이나 TV도 떠들썩하다. 대다수 일간지가 3.1운동이나 항일독립운동을 다루는 기획 기사를 연재 중이고, 어느 신문은 편집까지 100년 전 모습을 재현하며 그날의 분위기를 전하려 하기도 한다.
좋은 일이다. 반가운 현상이다. 때로는 착잡한 정치적 이유로, 때로는 입시 공부와 상관없다고 현대사를 알고 싶어 하지 않은 나라에서 이런 식으로라도 집단적 기억을 되살리니 일단은 박수치고 볼 일이다.
그러나 박수를 보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몇 마디 단서를 달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다. 3.1운동을 뒤늦게 '혁명'으로 고쳐 부르면서까지 늦바람을 타는 항일독립운동사 붐이 혹시 '혁명'을 지금 여기와는 상관없는 먼 옛일로만 치부하려는 속내와 연관되지는 않는지 하는 의심 말이다. 꼭 그렇게까지 의혹을 품지는 않더라도 한 세기 전 사건들이 현재의 고민과는 동떨어진 채로 회고되는 것 같다는 아쉬움은 좀처럼 시원하게 걷히지 않는다.
그럴수록 나는 3.1운동 당시의 문서 한 편을 더 많은 이들과 함께 읽고 싶다. 초등학교 수업 시간부터 '3.1운동' 하면 늘 따라붙는 '기미독립선언서'에 가려 아는 이가 많지 않은 또 다른 독립선언문, '무오독립선언서'다.
또 다른 독립선언문, '대한독립선언서'
1919년 봄에 동아시아는 비통하고 혼란스러운 현실의 단단한 지표를 뚫고 분출한 해방과 희망의 언어로 들떠 있었다. 식민지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그랬다. 지금 많은 한국인은 그 언어의 한 사례로, 최남선이 기초했다는 기미독립선언서만을 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선언문이 최소한 두 편은 더 있다. 하나는 일제의 심장 도쿄에서 발표된 '2.8독립선언서'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무오독립선언서'다.
실은 이 두 문서가 기미독립선언서보다 여러 모로 더 뛰어나다. 국내 만세 시위 현장에서 낭독된 문서라는 점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무시할 것까지야 없다. 하지만 후세대가 당시 투쟁의 의의를 곱씹는 데는 두 선언문이 기미독립선언서보다 훨씬 낫다.
우선 2.8독립선언서는 치밀하고 정확하다. 역사와 정세를 냉철히 읽어내며, 그래서 만세 시위가 불가피함을 강력히 설파한다. 조선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하며, 식민 통치 10여 년만에 조선 민중 전체가 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더구나 말미의 '결의문'에서 "전항의 요구가 실패할 시는 오족(吾族)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의 혈전을 선포함. 이로써 생기는 참화는 오족에게 책임이 있지 아니함"을 당당히 밝힌다. 기초자가 이광수라 하여 구석에 처박아놓을 문서가 결코 아니다.
한편 '무오독립선언서'는 본래 제목이 '대한독립선언서'다. '무오(년)'이라는 수식이 붙어 흔히들 3.1운동 한 해 전인 1918년에 발표된 문서인 줄 안다. 그러나 선언문에는 발표 일자가 1919년 2월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2.8독립선언서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셈이다.
그런데도 흔히 '무오독립선언서'라 한 이유는 기미독립선언서와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2월이면 음력으로는 기미년이 아니라 무오년이겠거니 여겨 '무오(년)' 문서라 한 것이다. 그렇다면 기미독립선언서보다는 어쨌든 더 먼저 발표된 문서가 된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은 가설일 뿐이다. 선언문에 적힌 '2월'이 양력 2월이 아니라 음력 2월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기 때문이다. 이게 맞는다면, 이 선언문은 기미독립선언서보다 나중에 작성됐을 수도 있다.
발표 시점은 이렇게 불분명하다. 그러나 기초자가 누구인지는 다른 두 선언문만큼이나 명확하다. 선언문 말미에 적힌 39인 중 한 사람인 소앙 조용은이 작성했다. 조용은은 우리에게 '조소앙'으로 더 유명하다. 중경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강령(1941년)' 기초자이자 삼균주의 주창자인 그 조소앙 말이다.
조소앙 외의 서명자들 면면을 보면, 모두 당시 해외에 망명해 항일독립운동을 벌이던 이들이다. 김교헌, 김좌진, 윤세복처럼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준비하던 대종교계 인사들이 있는가 하면, 중국 본토에서 활동하던 신규식,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문창범, 이동휘의 이름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후 독립운동 노선을 놓고 치열하게 대립하게 되는 신채호, 안창호, 박용만, 이승만 등이 함께 이름을 올렸다는 점이다.
이들 가운데 몇 명이나 실제 연락이 닿아 초안을 직접 검토한 뒤에 선언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을까? 아직까지도 정확히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만주나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혁명가들은 상당한 정도로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모았을 것이다. 비록 1919년 초에 국내외 만세 시위 준비 상황을 접하며 조소앙이 부랴부랴 집필했더라도 해외 운동가들 사이에서 이미 공통의 지향과 가치가 어느 정도 확인됐기에 이를 바탕으로 선언문을 생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온 이 선언문은 다른 두 선언문과는 달리 독립을 통해 만들어가야 할 새 나라의 이상과 원칙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어찌 보면 독립만큼이나 이를 통한 건국의 내용에 골몰한다. 아예 첫 문장에서부터 "완전한 자주독립"과 함께 새 나라 만들기의 방향을 소리 높여 외친다. 모든 민중에게 실현되고 후대에 면면이 이어져야 한다고 못 박는 그 원칙은 바로 "신성한 평등복리"다.
독립을 통해 건설해야 할 새 나라, 평등 공화국
"오(噫)라, 일본의 무얼(武孽)이여, 임진 이래로 반도에 적악(積惡)은 만세에 가엄(可掩)치 못할 것이며 갑오 이후의 대륙에 작죄(作罪)는 만국에 능용(能容)치 못 할지라 (…) 십 년 무얼의 작란(作亂)이 이에 극(極)하므로 천(天)이 그들의 예덕(穢德)을 염(厭)하여 아(我)에 시기(時機)를 사(賜)하실 새, 오인(吾人) 등은 순천응인(順天應人)하여 대한독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그들의 합병하던 죄악을 선포징변(宣布懲辨)하노니"
한자를 읽기 힘들기는 둘째 치고 '무얼' 같이 사전에도 안 나오는 단어가 빈번히 출몰한다. '무'란 무력을 뜻할 테고, '얼'은 '서얼'의 그 '얼'이다. 현대어로 풀면, '무얼'이란 일본 군국주의다. 다만 적자가 아니라 얼자라 하여 군국주의가 일본 입장에서도 정도에서 벗어난 그릇된 길임을 암시한다.
풀어 놓으니 뜻이 이렇게 풍부하지만, 현대 독자가 자력으로 읽어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나마 현대어에 조금 더 가깝게 '번역'한 판본들이 있으니 약간의 어려움만 감내하면 이 선언문에 담긴 벅찬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다. 바로 아래 대목이다. 좀 길지만, 그대로 인용하겠다.
"아, 우리 대중이여, 공의로 독립한 자는 공의로써 진행함이 마땅하도다. 일체의 방편으로 군국주의와 전제주의를 쓸어버려 민족 평등을 전 지구에 널리 펼칠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첫 번째 의의요, 군비 경쟁을 근절하여 평등한 천하의 길로 함께 나아갈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본령이요, 비밀조약과 분쟁을 엄금하고 대동평화를 널리 전할지니 이는 우리 광복의 사명이요,
동권동부(同權同富)를 모든 동포에게 실시하며 남녀빈부(男女貧富)를 고르게 만들며 등현등수(等賢等壽)로 지우노유(知愚老幼)에게 균(均)을 실현하여 사해 인류를 포용할지니 이것이 우리 건국의 깃발이요, 나아가 국제 불의를 감독하고 우주의 진선미를 체현할지니 이는 우리 대한 민족이 때에 맞춰 부활함의 궁극의 의의니라."
위 인용문 중 두 번째 문단의 앞 문장은 일부러 원문의 표현을 그대로 살려 봤다. 그런 어구 가운데에 우선 '동권동부'를 보자. '동권(同權)'이니 모든 동포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뜻이다. 3.1운동 한 달 뒤에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에서 드러나듯, 항일혁명가들은 새 나라가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흐름을 감안하면, '동권'이란 민주공화국의 기본 전제인 정치적 평등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동권'으로 끝나지 않는다. '동부(同富)'가 따라 붙는다. 그럼으로써 '동권' 자체도 의미가 더 깊어진다. '부'란 당연히 재산을 말한다. 그렇다면 '동부'란 재산까지 평등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동부'가 함께 하는 '동권'이니 이는 정치적 평등만이 아니게 된다. 즉, '동권동부'란 정치적 평등과 더불어 경제적 평등까지 보장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다양한 평등의 보장은 "남녀빈부를 고르게 만든다"는 다음 문구를 통해 더 분명해진다. 무오독립선언서는 '남녀'를 적시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하기도 전에 이미 여성과 남성의 차별 철폐가 새 나라의 철칙이어야 함을 밝힌다. 또한 '빈부'를 언급함으로써 앞에 말한 경제적 평등을 부연한다.
그 다음 대목에서는 이러한 평등의 이상이 당시에 상상할 수 있었던 극한까지 확장된다. '지우(知愚)'란 지적 능력을 습득한 이와 그렇지 못한 이를 가리킨다. '노유(老幼)'는 물론 여러 연령대의 인구를 뜻한다. 그런데 이 '지우노유'에게 '균(均)'을 실현해야 한다고 한다. '균'이란 평등의 동의어다.
어떻게 평등하게 하는가? '등현등수(等賢等壽)'로 한다고 한다. '현'이란 현대적으로 풀면, 지적 능력일 것이다. '수'란 좁게 말하면 수명이지만 넓게 보면 건강이다. 즉, 지적 능력과 건강까지 평등하게 한다는 말이다.
항일혁명가들이 바란 새 나라에서는 이렇게 인간의 모든 정신적-육체적 능력까지 평등해야 했다. 이들의 지향은 민주공화국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진화형인 평등공화국이었다. 그야말로 망국 이전의 나라, 오로지 양반 세상이던 조선의 정반대 모습 아닌가!
평등이란 잠꼬대이고 공정쯤이 바람직한 목표라 여기는 요즘 세태에 이런 이상은 너무 낯설게 느껴질지 모른다. 아마도 지적 능력이나 건강은 그저 개인에게 달려 있을 뿐이며 따라서 이런 차원까지 평등이 확대될 수는 없다는 게 다수의 상식일 것이다. 더구나 지금 이 순간도 교육과 의료는 점점 더 경쟁과 이윤 추출의 전장이 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세상에서 무오독립선언서 문구는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 취급이나 당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틀림없다. 지금 이 나라는 독립운동가들이 세우려던 그 나라가 아니다. 오늘날의 이 모습은 무오독립선언서가 그린 새 나라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며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엄연한 진실이다. 우리는 그렇게 싸워서 지금 이 나라가 서 있음을 축복할 게 아니라 그렇게 싸우고도 아직 그 나라가 서지 못했음을 깨닫고, 통탄하고, 분노해야 한다.
'건국'은 끝나지 않았다
대한독립선언서 기초자인 조소앙은 나중에 '대한민국 건국강령'에서 건국의 3단계를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일제 축출과 정부 수립은 '건국의 제1기'일 뿐이다. 그 다음에는 아래 내용의 '제2기'가 뒤따라야 한다.
"삼균제도[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 실현-인용자]를 골자로 한 헌법을 실시하여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민주적 시설로 실제상 균형을 도모하며 전국의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가 완성되고 전국 학령아동의 전수가 고급교육의 면비수학(免費受學)[무상교육-인용자]이 완성되고 (…) 경향 각 층의 극빈 계급의 물질과 정신상 생활정도와 문화수준이 제고 보장되는 과정을 건국의 제2기라 함" (강만길 편, <조소앙>, 한길사, 1982. 104~105쪽)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과연 건국의 제2기는 완료됐는가? 정치와 경제, 교육 모두에서 평등이 실현됐는가? 허망한 질문이다. '등현'은 고사하고 <스카이(SKY) 캐슬>
그러고 보면 '건국' 기점이 언제냐는 논란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도대체가 '건국' 기념 자체가 황당한 일 아닌가? 완료하지 못한 과업을 어찌 기념하겠는가?
지금 할 일은 항일혁명가들을 먼 옛날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기념하는 행사가 아니다. 3.1운동을 '혁명'이라 부르며 뿌듯해 할 일도 아니다. 차라리 이제 우리는 미완의 건국을 앞당기는 혁명을 재개해야 한다. 그들의 과업을 잇는 우리 시대의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