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 체니 부통령은 조지 W. 부시대통령의 후견인"이라는 게 워싱턴의 정설이다.
아프간 전쟁을 비롯, 북한을 겨냥한 최근의 '악의 축' 발언에도 체니의 입김이 깊숙이 작용하고 있다는 게 워싱턴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과연 체니의 실체는 무엇인가.
***엔론 게이트의 몸통은 딕 체니?**
최근 엔론 사태의 전모를 밝히려는 조사과정에서 체니 부통령이 깊숙이 관련이 되어있다는 의혹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체니가 엔론 게이트의 '몸통'이 아니냐는 의혹 제기다.
급기야 미국 의회 회계감사원(GAO)이 엔론 사태와 관련해 정보제공을 거부하고 있는 체니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이다.
회계감사원이 공개를 요구한 내용은 ▶에너지정책팀이 만난 재계인사 명단▶에너지정책팀 주최 회의에 참석한 인사들의 명단 등이다.
정부를 상대로 정보공개를 요구하며 소송을 걸기는 GAO 80년 역사상 처음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입법부와 행정부의 극한 대립까지 불러일으킨 체니에 대해 미국 언론들은 그의 행위가 미 국익을 위한 게 아니라, ‘거대한 정경유착의 핵심고리’라는 점 때문에 빚어진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던지고 있다.
***딕 체니는 ‘에너지업계의 대부’**
부시 행정부 출범 전후에 미국 언론에서는 "부시의 이너서클은 재계 드림팀"이라는 평가가 무성했다.
그 중에서도 딕 체니는 “미국 대통령제가 시작된 이래 최강의 부통령으로 사실상 공동 대통령에 가깝다”는 인정을 받고 있다.
그는 아버지 부시 대통령 때부터 최측근으로 보좌해온 인물로, 아들 부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후견인’ 또는 ‘주식회사 미국의 실질적인 최고경영자’라 불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현재 ‘부시 마피아’로 불리는 이익 집단을 이끌며 엔론뿐 아니라 ‘에너지업계’ 전반에 걸친 유착관계로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도 3일 "딕 체니가 자신이 책임맡고 있는 에너지 정책개발팀에 대한 의회 회계감사원(GAO)의 정보요구를 거부한 것은 파산한 엔론 이외의 다른 에너지 기업들과 행정부간의 연관관계를 숨기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타임은 "엔론 이외의 몇몇 에너지 기업들도 에너지 정책에 영향력을 미칠 기회를 가졌다"면서 "체니 부통령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전했다.
***국가에너지정책회의에 에너지업계 로비스트 참석**
작년 5월3일 백악관에서 체니 부통령 주재로 열린 회의에 몬태나 주지사 출신의 GOP사 회장인 마크 래시코트와 GOP의 전 회장 할리 바버 등 전기설비업계 로비스트 2명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 그런 예중 하나이다.
공교롭게 회의 2주일 후에 제출된 체니 보고서에는 비용이 많이 드는 공기청정 관련규제 재평가 등 이들 로비스트가 원했던 내용이 다수 들어갔다.
특히 바버 전 회장은 작년 5월21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위한 연회를 열어 최소한 25만달러의 정치자금을 모아주었으며 그중 15만달러가 에너지업계에서 기부된 것으로 알려졌다.
체니 부통령은 이 연회가 열리기 하루 전날 자신의 관저에 스폰서와 정치자금기부자 등 수백명을 모아 성대한 리셉션을 열기도 했다.
'피바디 에너지'라는 석탄재벌과의 유착 의혹도 거론되고 있다. 이 회사의 지주회사와 임원이 부시 대통령 취임 이후 약 20만달러를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에 기부했다고 타임지는 보도했다.
***환경보존 무시, 에너지 개발 주창**
9.11 테러 직후 아프간과의 전면전을 주장한 ‘매파’이자 전쟁을 주도했던 체니는 에너지팀 최고 책임자로서, 오래 전부터 아프간 북부의 카스피해 연안에 매장된 엄청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미국이 확보하기 위해선 아프간 지역의 영향력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온 인물이다.
부시 행정부와 에너지 산업과의 유착관계를 미국의 경영전문지 포브스가 얼마 전 파헤쳤다. 포브스지는 지난해 5월 "부시 행정부의 새로운 에너지 정책은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더 많이'라고 할 수 있다"고 표현했다. "더 많이 파고, 뚫고, 생산하고, 써라"는 것이다.
“딕 체니는 부시 행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좌지우지 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정책은 환경보존보다 에너지 생산 증대를 강조하면서 미국은 석탄과 천연가스 산업을 확장하고 핵발전 의존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환경보존이란 1970년대의 낡은 개념이라고 몰아붙였다. 미국이 처한 에너지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해결책으로 개발보호지역을 포함한 미국 전역에서 석유와 가스 유전 발굴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석유공급회사 핼리버튼의 최고경영자로였던 그는 발전소 건설도 적극 지원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20년간 미국은 1천3백~1천9백기의 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매달 7기의 발전소 건설을 해야 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는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 미국의 에너지 위기는 에너지 가격이 너무 싸다는 데 있다.
1980년 이후 최근의 발전 비용의 상승에도 불구하고 에너지를 제외한 소비자 물가가 129% 증가하는 동안 에너지 가격은 55%만 올랐다.
1984년에서 1999년 사이 에너지 가격은 사실상 1.4% 감소했다. 다른 물가는 77% 상승했다. 에너지 가격 인상이 있다면 최근 몇 년간에 일었났을 뿐이다.”
포브스의 이같은 보도는 체니의 에너지 정책이 국익을 위한 방향이 아니라 에너지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듯하다는 의혹을 담고 있다.
***체니는 미국의 ‘공동 대통령’**
이쯤 되면 체니의 과거가 궁금해진다. 부시와 체니는 석유사업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부시는 텍사스에 석유시추회사를 운영했다. 반면에 부통령이 되기 직전까지 체니가 최고경영자로 있었던 핼리버튼은 석유회사와 주요 석유생산국에 기술과 장비를 제공하는 회사다.
체니는 러시아의 체첸 침공으로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악화될 때 미국 수출입은행으로부터 TNK 석유회사에 대출 보증을 따냄으로써 4억8천9백만달러를 챙기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가디언지는 "부시는 간판이고 실제 일은 체니가 다 한다"면서 "체니야말로 미 행정부를 공격적인 보수화 정권로 탈바꿈시킨 사실상의 주역"이라고 평했다.
체니는 모든 의사결정에 부시 대통령이 관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결정 뒤에는 항상 체니가 있음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것이다.
체니는 미국내 최대 쟁점인 에너지 문제 해결의 전권을 쥐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정권 이양 업무를 총괄했던 체니는 로널드 럼스펠드를 국방부 장관에, 친구 폴 오닐을 재무부 장관에 포진시켰다. 게다가 헌정사상 어떤 부통령도 맡은 적이 없는 연방예산 검토위원회를 이끌며 대통령에 대한 보고없이 각 부처 예산을 조정하는 권한을 쥐고 있다.
외교안보정책에 적극 관여하는 부통령도 체니가 사실상 처음이다. 현재 현안이 되고 있는 대 중국 문제는 물론, 지금까지 북한, 대만, 이라크 관련 중요 정책에 대한 모든 결정에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 앤드루 카드 백악관 수석 보좌관과 함께 참여했다.
게다가 그는 독자적인 안보정책팀을 운영하고 있으며 주요 각료들에게 가는 모든 안보 브리핑 내용을 입수해 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9.11 사태 때 황급히 백악관으로 돌아오던 부시 미국대통령이 발길을 돌린 것도 체니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북한에 대한 골수 초강경파**
올해 60세인 체니는 조지 부시 전 대통령 시절 국방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북한 핵문제에 강경노선을 구사하고 한국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북한 핵 의혹이 제기된 지난 94년 "북한 핵시설 국제사찰을 위해 한국과 군사훈련을 취소해서는 안되며 북한에 무역제재를 압력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국방장관 시절 북한 등 제3세계 국가가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며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미군을 전진 배치해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부시의 '악의 축' 발언 뒤에도 체니의 그림자가 짙게 드러워져 있다.
그야말로 최근 한반도를 긴장으로 몰아넣고 있는 미국 매파의 몸통인 것이다.
일각에서는 체니가 엔론게이트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자 북한등을 '악의 축'으로 규정, 전쟁분위기를 고조시킴으로써 세간의 관심을 바꿔 당면한 위기를 벗어나고 오는 11월 총선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게 아니냐는 강한 의혹을 던지고 있기도 하다.
***91년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기도**
미국의 중서부 시골인 네브라스카주의 링컨에서 가난한 농업담당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이웃 와이오밍주의 케스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예일대 2년을 다니다 중퇴한 그는 와이오밍대학으로 옮겨 정치학 학사.석사를 마친 후 박사학위 과정중인 1968년 워싱턴DC로 옮겨 의회연구원을 시작으로 정치계에 뛰어들었다.
그는 71년 이후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백악관 보좌관을 거쳐 75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 시절 34세의 젊은 나이로 백악관 비서실장에 전격 발탁돼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 78년부터 와이오밍주 하원의원 6선을 기록했고 88년에는 공화당 원내총무를 맡았다.
지난 91년 걸프전 당시 국방장관으로서 콜린 파월 당시 합참의장과 함께 그는 '사막의 폭풍' 작전을 지휘하면서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도 했다.
체니는 정치적으로 ‘강한 보수주의자’로 중도보수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부시에 비해 더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원의원에 당선된 이후 10여년간의 의정활동에서 연방정부가 예산으로 낙태를 지원하는 데 반대했고, 여성동등법안과 교육부 신설에 반대했다. 특히 단 3명의 의원과 함께 탐지기에 체크되지 않는 플라스틱 총기규제에도 반대하는 등 어떠한 총기규제에도 거부감을 표시했다.
환경 문제에서도 “정부가 사회적인 이슈에 개입하는 것은 제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체니의 부인 린은 잡지 <워싱토니언>의 편집장을 지낸 작가출신으로 여성계 명사이다. 슬하에 엘리자베스와 메어리 등 두 딸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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