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사태후 각 언론사 편집국내 권력질서(?)에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종전의 수석부서는 단연 정치부였다. 정치부장을 거쳐야 편집국장이 되고 나중에 임원이 되는 게 가능했다.
그러던 것이 IMF사태후 단연 경제부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정치부 우선주의의 전통이 강한 조ㆍ중ㆍ동 등 ‘빅3’에서조차 경제부장 출신이 편집국장이 되는 경우가 부쩍 많이 목격됐다. 이른바 ‘경제부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경제부 전성시대의 도래는 IMF사태 발발후 경제기사에 대한 독자의 관심이 크게 높아진 대목과 무관치 않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속담도 있듯, 편집국장이 경제기사를 모르면 신문 톱을 정하는 등 기사의 경중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경제부 출신들이 편집국 센터를 차지하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경제부 전성시대'의 어두운 이면**
그러나 이면에는 보다 절실한 ‘다른 이유’가 숨겨져 있기도 했다.
IMF사태로 대다수 언론사들은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했다. 일부 언론의 경우 존폐의 위기감을 느낄 정도였다. 수익성을 무시한 채 차입금에 의존해 확장경영을 해오기란 재벌이나 언론이나 오십보백보였기 때문이다. 언론사 차입금만 2조원을 넘어설 정도였다.
이러다 보니 금융기관, 기업 등과 안면이 있는 경제부 출신이 언론사내에서 주목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 결과 외형상 경제부는 ‘황금시대’를 맞은 것처럼 비쳤다. 경제부장이 국장으로 승진하는 등 사내 요직을 차지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면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종합일간지인 A신문의 경우 경제부장 출신인 P모씨가 국장이 됐다.
P모 국장은 경제부기자 경력만 20년이 넘는 베터랑으로, 경제계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 할 정도로 유명한 경제논객이자 대기자였다. 문제는 A신문의 부채가 해마다 이자조차 물을 수 없을 만치 엄청나게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P모 국장의 주된 역할은 좋은 신문을 만드는 데 전념하기보다는 수시로 채권은행 등을 찾아가 은행장에게 채무만기 연장, 신규 대출 등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수십년간 기자로서 쌓아온 ‘자존심’이 상하는 괴로운 일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금융계 친구들은 P모 국장에게 “차라리 국장을 그만 두라. 한때 장ㆍ차관 모가지를 떼었다 붙였다 하던 네가 아쉬운 소리를 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기가 너무 안쓰럽다”고 조언할 정도였다. 결국 그후 그는 신문사를 그만 두고 따로 회사를 차렸다.
다른 회사들의 경우도 정도 차이만 있을 뿐, 편집국 간부나 기자들이 회사 경영 문제로 시달리기란 마찬가지였다.
종합일간지인 B신문사의 경제부장은 아예 정례적으로 광고국과 이른바 ‘기획광고’ 회의를 하고 있다. “이번 주에는 정보통신 특집을 8개면에 걸쳐 만들고 내주에는 부동산 특집을 만들 예정이니 경제부가 적극 협조해 달라”, 이런 식의 주문이 계속되고 있다.
연말에 목표한 광고액을 채울 수 없다고 광고국이 읍소를 하면, 경제부장은 재벌그룹측 사람을 만나 “내년초 광고 예정액 가운데 일부를 한달만 앞당겨 집행해 달라”고 사정하기도 한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광고국은 수시로 경제부와 회식을 갖는 등 갖은 예우를 다하나, 경제부원들은 “광고국 직원 얼굴만 봐도 지긋지긋하다”고 불만을 털어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부 기자들은 회사 수익의 80%이상을 광고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 언론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만큼 울며 겨자먹기로 광고수주전에 동원되고 있다.
***"할당액 못 채우면 인사 불이익 각오하라"**
이번 윤태식 게이트에 사장과 부장 등 주요 임직원이 연루돼 회사 설립이래 최대위기에 직면한 서울경제신문의 경우는 IMF사태후 언론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윤태식 게이트 취재과정에 만난 서경의 한 기자는 사업확장과 광고유치를 암묵적으로 강요해온 회사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회사가 지난해 편집국 각 부장에게 경기위축으로 인해 30억~50억원 정도의 적자가 예상되니, 부서별로 수억원에서 10억원정도의 할당액을 주고 광고유치나 협찬을 해오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할당액을 채우지 못할 경우 좌천 등 인사상 불이익을 준다는 경고성 메시지도 곁들였다.”
또다른 기자의 증언도 있다.
“회사나 편집국장등 간부들이 기업친화를 강조하다 보니 기업 입장을 대변하는 기사가 1면 머릿기사로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기자들은 삼성생명이나 삼성전자, 현대그룹 등 주요 광고주들에 대한 비판기사는 아예 쓸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언터처블(Untouchable)'이다.”
다른 경제신문의 경우도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마찬가지 메커니즘 속에서 일하고 있다.
한 경제지 중견기자의 토로이다.
“조선, 중앙 같은 경우는 앉아서도 광고가 들어올지 모르지만, 경제지나 사세가 약한 종합지는 경기가 아주 좋을 때가 아닌 경우에는 상시적으로 출입처 인맥을 이용해 편집국 차원에서 광고유치나 부수확장 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건 이미 일반화된 비밀이 아니냐.
우리 회사의 경우 서경처럼 편집국 부서별로 기간별 협찬액수나 광고수주 목표액을 정해주지는 않고 있지만, 광고국과 손잡고 각종 기획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때에는 어떤 기사를 쓸 것인지, 인원은 얼마나 동원할지, 관련부처나 기업체의 후원은 있을지, 이에 협조하는 업체는 얼마나 있을지 등이 모두 고려사항이 된다.
그러다 보니 기업에 비판적 기사를 쓰기 힘들고, 알고도 못쓰는 기사들이 많은 게 솔직한 현실이다.”
***'언터처블'이라는 무형의 장벽**
주목해야 할 대목은 경영난을 겪고 있는 신문사들만 ‘언터처블’ 메커니즘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C종합지는 내로라하는 유력언론이다. 그러나 이 신문사가 발행하는 종합월간지에 재직중인 한 D모기자는 요즘 한마디로 말해 ‘회사 다닐 맛’이 안 난다.
이유는 위에서 쓰고 싶은 기사를 못 쓰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기간 집요하게 한국의 차세대전투기(FX) 사업의 진행상황을 집요하게 취재해왔다. FX사업은 구매가격만 무려 4조3천억원에 달할 뿐 아니라, 한국의 차세대 전투력만 밀접한 관련이 있는 중차대한 국책사업이다. 언론이 당연히 비상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취재대상임에 분명하다. 워낙 사업의 규모가 크다 보니, 미국의 보잉사, 프랑스의 닷소사 등 세계 4대 방위산업체가 치열한 로비전을 전개중이다.
D모 기자는 초기에는 자유롭게 기사를 쓸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상황이 달라졌다. 열심히 취재를 해와 기사를 쓰려 해도 위에서 “FX에 대해 쓰지 말라”고 막는 것이었다. “특정 기업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기사가 나갈 경우 손해배상 제소 등이 우려된다”는 이유에서였다. D모 기자는 “그렇다면 소송이 들어오면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각서를 쓰겠으니 기사를 쓰게 해달라”고 했으나 답은 역시 ‘불가(不可)’였다.
그러나 윗선의 ‘손해배상 운운’은 속 들여다보이는 변명이다.
거의 2년전부터 이 잡지에는 거의 매달 빠짐없이 보잉사, 닷소사 등의 광고가 게재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경쟁 월간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보잉사의 경우 지난해말 “미국 차세대전투기 사업에서 탈락한 결과 전투기 생산부문의 존립 자체가 위험해졌으며, 그 결과 한국의 차세대전투기 사업에서도 탈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언론보도가 잇따르자, 국내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한 치열한 광고전을 전개했다. 그 결과 지난해말에는 같은 날에 조ㆍ중ㆍ동 등 유력 일간지의 1면에 뜬금없는 보잉사 광고가 도배를 하기도 했다.
언론은 각종 게이트가 발생할 때마다 권력에 대해 ‘성역(聖域) 없는 수사’를 촉구한다.
그러나 언론은 내부적으로 ‘언터처블’ 즉 ‘성역’을 갖고 있다.
언론의 최대 과제는 어떻게 이 자기 모순을 해결할 것인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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