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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눈과 귀가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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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통령의 눈과 귀가 막혔다"

측근들로 민정수석실 채운 결과

“승지(承旨)가 할 일은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한 점 가감 없이 그대로 왕에게 고하는 것이다. 승지가 권력의 향배를 의식해 힘 있는 자 비리를 이것저것 솎아내고 왕이 좋아할만한 이야기만 골라 보고하면 왕의 눈과 귀가 멀게 되기 때문이다.
민정수석은 ‘현대판 승지’다. 그런데 과연 역대 민정수석들은 승지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던가. 과연 대통령 친인척이나 가신그룹들을 둘러싼 세간의 각종 풍문을 제때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비리를 사전에 차단하려고 노력했던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했다는 게 내 판단이다.”

현 정부 들어 자칭 ‘부(副)승지’를 지냈다는 전직 청와대 민정수석실 비서관이 17일 한 말이다.

***작금의 민정수석 비리는 지역편중 인사의 결과다**

민정수석을 지냈던 신광옥 법무차관이 지난주말 사표를 낸 데 이어 알선수재 혐의로 검찰수사를 받고 있다. 신 전차관은 금명간 구속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권이 바뀐 뒤에는 YS정권시절의 배재욱 사정수석처럼 전직 민정수석(또는 사정수석)이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된 일이 있다. 그러나 정권 재임기간 중에 민정수석이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기란 이번이 처음이다. 정권 차원에서 보면, 사실 여부를 떠나 ‘대통령의 얼굴’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전임 민정수석이 검찰 수사대상이 됐다는 사실 자체가 여간 안쓰럽고 심각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정권의 최대위기다.
사태가 왜 이런 지경까지 왔나?

자칭 ‘부승지’는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사람을 고르게 적재적소에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같은 고향 사람을 쓰더라도 능력에 맞는 자리에 써야 했다. 정권의 사활이 걸린 요직일수록 다른 지역 출신들을 사이에 드문드문이라도 심어 세력 균형을 맞추고 서로 견제토록 해야 했다. 내로라 하는 친인척이나 가신들의 비리 등을 미연에 방지해야 할 민정수석실은 특히 그러해야 했다.
그래야만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가감 없이 대통령에게 고할 수 있고, 부패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법인데...
민정수석이 몇 푼 안 되는 돈을 받았다고는 곧이 믿어지지 않으나, 뇌물 의혹에 휘말린 것 자체가 한때나마 같은 비서실에 근무했던 사람으로서 낯 뜨겁고 울화 치미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말처럼 신광옥 전차관이 과연 축재 차원에서 돈을 받았는지는 의문이다. 검찰 수사 결과 현재까지 드러난 액수가 극히 미미하기(?) 때문이다. 검찰에 따르면, 신 전차관은 진승현의 로비스트인 최택곤으로부터 “부하직원들과 회식이나 하라”며 한번에 2백만~3백만원씩 도합 1천~2천만원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일반 생활인들 입장에서 보면 1천~2천만원이란 돈이 결코 적은 돈이라 할 수 없으나, 우리 사회의 뇌물관행에서 볼 때 ‘축재 차원’이라 보기에는 적은 규모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돈의 액수가 아니라 신 전차관이 이 과정에 보인 ‘승지’답지 못한 행태이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신 전차관은 그동안 진승현과 수차례 만난 적이 있으며 지난해 9월 진씨에게 전화를 걸어 구속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며 “15억원의 변호사 선임료를 준비하라”고 말했다 한다. 만에 하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 나라의 최고 사정책임자인 민정수석이 주가조작 범죄를 저지른 일개 벤처사업가의 ‘집사’로 전락한 셈이다.

***조선시대의 '승지'는 역사기록자이자 언론이었다**

‘승지’란 본디 이렇게 형편없는 자리가 아니었다.
조선시절 직제 중 하나인 승지는 세종 15년(1433년)에 법제화된 요즘의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하는 조직이었다.
조선시절 왕은 승정원 산하에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 등 6승지를 두어 이. 호. 예. 병. 형. 공조 등 6조에의 왕명 전달뿐 아니라, 이들 6조의 공문이나 건의사항을 왕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겼다.

왕은 정승이나 판서 등 중신들과 만날 때에도 이들 6승지를 배석시켰으며, 6승지는 국가 중요회의에도 참석해 회의 내용을 기록하는 등 국왕의 그림자로서 모든 국정에 참여했다.
6승지 가운데 민정수석 업무에 가장 근접한 일을 하던 승지로는 형방을 책임 맡고 있던 우부승지를 꼽을 수 있다.

이들 승지는 단순한 왕의 그림자이자 비서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경연참찬관(慶筵參贊官)과 춘추관(春秋館)의 수찬관(修撰官)을 겸직했다. 오늘로 말하면 역사기록자이자 언론인의 역할까지 겸했던 것이다. 단순한 왕의 그림자가 아니라, 왕의 독주와 전횡을 견제하는 제동장치 역할을 했던 존재들인 것이다.
이들은 왕에게 세간의 민심을 가감 없이 직언했다. 왕의 눈과 귀를 맑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승지들의 직언을 받아들인 왕은 훗날 성군이라 평가받았다. 그러나 곧은 말을 하는 이들 승지들을 내친 왕은 훗날 폭군이라 평가받았다. 결국 ‘승지를 승지답게’ 만드는가 아닌가 여부는 왕의 선택사항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신광옥 전차관으로 대표되는 민정수석의 비극적 몰락상은 신 전차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김대통령의 통치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로 보아야 정확할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은 99년 8월 민정수석실을 부활시키고 그 자리에 김성재 교수를 앉혔다. 이어 다섯달 뒤인 지난해 1월에는 비서실장 직속의 법무비서관실을 폐지하고, 그 기능을 민정수석실에 ‘사정비서실’과 ‘공직기강비서관실’을 신설하는 청와대 비서실 직제개편을 단행했다. 그리고 민정수석에 검사장급인 신광옥 대검 중수부장을 배치했다. 과거 정권시절의 민정수석실 위상을 회복한 셈이다.
민심을 제대로 못 읽은 결과,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도 막기 힘들어진 ‘옷 로비 사건’의 여파였다.

***역대 정권도 측근들로 민정수석실을 채웠다가 실패했었다**

김대통령은 98년 취임직후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고 그 기능을 법무비서관으로 옮겼다. 역대 민정수석실의 폐단이 심했기 때문이다.
민정수석은 과거 정권에서 민심청취는 물론, 사정지휘 기능을 맡아온 권력실세였다. 특히 김영삼 정권시절 민정수석실은 검찰.경찰이 주축이 된 사정기관협의회를 주재해 각종 사정작업을 진두지휘함으로써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했다. 민정수석실은 당시 야당총재와 일가친척의 계좌를 추적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과거정권 시절 민정수석실(또는 사정수석실)에 근무했던 인사들의 파워는 대단했다. 지금은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기춘.강재섭.김영일.최연희.박철언.이건개 의원이 모두 이 자리를 거쳤다. 김두희.정구영씨 등과 같이 이 자리를 거친 뒤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지낸 이들도 적잖다. 이어 YS정권시절에는 김영삼대통령의 경남고 후배인 배재욱씨가 5년간 이 자리를 지켰고, DJ정부 들어서는 전남 보성의 박주선 의원이 법무비서관을 지냈다. 문제의 신광옥 전수석은 전남 광주 출신이었다. 한결같이 대통령의 최측근로 채워진 자리였다.

어찌 보면 처음 인선작업부터 ‘승지’의 역할을 하기엔 적합지 않은 인물들로 채워진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 역대 민정수석(또는 사정수석)의 말로는 배재욱, 박주선씨 등이 모두 구속될 정도로 밝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진승현 스캔들과 관련해 김대통령의 차남인 김홍업 등 대통령의 친인척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과연 이 사건이 어디까지 번져갈지를 예측하기 힘든 현기증 나는 상황이다.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일차적 책임은 민정수석에게 있어 보인다. 그러나 더 큰 책임은 민정수석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한 위정자에게 있는 게 아닌지.

***"아는자는 아는척, 모르는자는 모르는척, 있는자는 있는척, 없는자는 없는척 해야"**

17일 밤 귀가길에 만난 초로의 개인택사 기사 임모씨는 이런 말을 했다.

“아는 자는 아는 척, 모르는 자는 모르는 척, 있는 자는 있는 척, 없는 자는 없는 척 해야 한다는 게 지금까지 60여년간 살아오면서 내가 체득한 삶의 지혜다.
아는 자는 아는 것을 말해야 한다.
모르는 자는 아는 체 하지 말아야 한다.
있는 자는 떳떳하게 세금 내고 있는 척 해야 한다.
없는 자는 있는 자 쫒아가느라 가랑이 찢어지는 바보짓을 멈춰야 한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아는 자는 모르는 척, 모르는 자는 아는 척, 있는 자는 없는 척, 없는 자는 있는 척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온갖 말도 안되는 사건사고가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제 자리를 찾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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