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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방식은 싫다"

다나카 마키코-일본의 철혈외상

박근혜 한나라당 부총재가 고 박정희 대통령의 후광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라면, 일본 최초의 여성 외상인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57) 역시 고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수상의 후광과 분리할 수 없는 존재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한때 ‘퍼스트 레이디’ 대역을 맡은 적이 있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박근혜 부총재는 불의에 타계한 고 육영수 여사의 뒤를 이어 74년부터 79년까지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았었고, 다나카 외상 또한 아버지가 수상에 취임했던 72년부터 74년까지 병석의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 레이디 역을 맡았다.

***요정까지 데려가며 파벌정치 가르쳐**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유사점과 동시에 여러 모로 차별성도 존재한다.
가장 큰 차별성은 박부총재가 아버지의 업적과 후광을 최대한 부각시키려 하는 반면에, 다나카 외상은 정반대로 아버지 시대의 정치관행을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오늘날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대목이다.

다나카 외상의 부친 다나카 가쿠에이는 “정치는 세력이고, 세력은 돈”이라는 철학아래 일본정치사상 최강의 파벌을 구축했던 금권정치가이자, 록히드 스캔들의 주역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외동딸인 그녀를 일찌감치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려 했다.
가쿠에이는 이에 어린 시절부터 그녀에게 파벌을 관리하는 법이나 기자를 상대하는 법을 틈틈이 가르쳤고, 심지어는 요정에까지 데리고 다녔다.

***"나는 아버지식 파벌정치가 싫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녀가 정치에 정식으로 입문한 것은 지난 93년 아버지 선거구인 니카타의 중의원직을 물려받으면서였다. 그녀가 정치에 입문하자 자민당의 많은 파벌들이 앞다퉈 그녀를 영입하려 했다. 그녀 부친의 후광이 아직도 막강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러나 모든 파벌에의 가입을 거절하며 ‘무당파(無黨派)’를 선언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민당 파벌정치의 폐해를 특유의 신랄한 어조로 공격했다. 외로운 ‘반골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파벌정치에 식상해 하던 일본국민들은 당연히 환호했다. 그녀는 그후 여론조사만 하면 ‘수상으로 뽑고 싶은 사람’ 1~2위를 놓치지 않을 정도로 국민의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올 들어 그녀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朗)와 손을 잡았다. 고이즈미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소속된 파벌이 없는 무당파로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4월 총선에서 고이즈미는 폭발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정권장악에 성공했다. “고이즈미 바람의 3할은 다나카가 만들었다”는 게 당시 일본 언론의 분석이었다.

고이즈미는 수상이 되면서 그 은덕을 잊지 않고 다나카를 일본최초의 여성 외상에 임명했다.

***'관료와의 전쟁"**

외상이 된 다나카는 특유의 저돌성으로 ‘관료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그녀의 취임 일성은 “본부에 있을 때는 위만 쳐다보는 샐러리맨, 해외공관에 나가면 특권계급인 게 바로 일본의 외교관들이다”였다.

당시 일본 외무성은 과장급 간부의 횡령사건을 비롯해 잇따라 터진 각종 비리로 국민의 지탄대상이 돼 있었다. 국제행사비용을 빙자해 호텔비 등을 과다청구하는 방식으로 수억엔의 비자금을 조성해 놓은 뒤 이를 회식비용 등으로 전용하다가 적발된 것이다. 다나카는 관련자들을 형사고발해 구속시키는 등 3백28명을 인사조치했다.

그녀는 또한 사무차관 역임자를 주요국 대사로 파견하는 ‘낙하산 인사’ 관행도 깨버렸다. “대사는 정보수집이 주업무인데 사무차관 역임자는 움직임이 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그대신 손 마사요시(孫正義) 소프트뱅크 회장 등 일본의 민간 저명인사 6명으로 구성된 간담회를 발족시켜 민간외교시스템을 강화해 나갔다. 외부인사들로 외무성을 감시하는 ‘감찰 사찰관’ 제도도 도입했다.

다나카의 개혁에 일본 국민들은 속 시원해 했으나, 외무성 관리들은 크게 반발했다. 이들은 언론에 다나카가 고등학생 시절 고노 요헤이 전 외상을 짝사랑했었다는 등 각종 해프닝성 스캔들을 흘리며 조직적으로 ‘다나카 죽이기’에 나섰다. 다나카는 그러나 관료의 저항에 기죽지 않고 지금도 관료와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더이상 친미 일변도 외교는 위험하다**

다나카는 외교에서도 특유의 자기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나카 외교노선의 가장 큰 특징은 ‘탈미입아(脫美入亞)’로 규정할 수 있다. 그녀의 부친인 다나카 수상은 72년 중일 수교를 만들어낸 주역이었다. 그녀는 일본이 살기 위해선 미국에의 편중외교에서 벗어나 중국 등 아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이런 맥락에서 고이즈미가 신사참배를 하려하자 각료들 가운데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반대입장을 밝히는가 하면, 타이완의 리덩후이 전 총통에 대한 일본입국비자 발급을 금지시켰다. 모두가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주변국을 생각한 조처였다.

미국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드러냈다. 그녀는 미국의 조지 W.부시 대통령이 미사일방어(MD) 정책을 강행하려 하자, 지난 6월 아셈(ASEM) 외무장관 회담때 “MD구상 배경에 부시대통령의 출신지인 텍사스주 석유업계의 영향도 있다”는 발언을 해 미정부를 발칵 뒤흔들기도 했다. 그녀는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당선됐다면 이런 상황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나카의 이같은 소신 행보는 지금 상당한 난관에 봉착해 있다.
고이즈미 수상이 난색을 보이기 시작한 때문이다. 고이즈미는 자민당 극우파의 지지를 얻기 위해 친미외교노선을 고집하고 있다.
일본 극우파 및 우파성향 언론, 관료들의 ‘다나카 두들기기’도 계속되고 있다. 일본 극우의 대표논객인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는 TV에 나와 “다나카 전수상은 사람을 다루는 데 천재였지만 딸은 열등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이 확실하다”는 독설을 퍼붓기까지 했다.

다나카가 언제까지 소신 행보를 계속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해 ‘마이 웨이’를 걸어갈 것으로 전망하는 이들이 많다. 지금 다나카를 둘러싼 비난은 일본 다수국민의 뜻이 아닌 관료 등 일부 기득권집단의 저항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다나카의 실험은 일본정치의 미래가 달린 실험”이라는 이코노미스트 등 외국언론의 평가가 잇따르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다나카 약력

44년 1월14일 도쿄 출생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 외동딸
60년 미국 필라델피아 고교 유학
와세다대학 상학1부 졸업
72년 다나카 수상 취임. 74년까지 퍼스트 레이디 역할 수행
85년 아버지 다나카 뇌경색으로 쓰러짐
92년 가업인 에쓰고 교통 이사 취임
93년 첫 중의원 당선
94년 과학기술청 장관 역임
2001년 외상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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