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는 사정이 워낙 급박해 예측을 정교하게 하고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제일 시급한 게 불을 끄는 것이었는데, 불을 끌려다 보면 화단을 밟을 수 있고 창문도 깨뜨릴 수 있고 또 필요이상으로 물을 많이 쏟아부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이종구 금융감독위원회 상임위원이 지난 11월29일 오후 감사원 공적자금 감사결과에 대해 해명을 하는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이 상임위원의 해명은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 97년말 IMF(국제통화기금)사태 발발, 99년 7월의 대우사태 발발 등은 분명 초유의 위기상황이었고, 그 결과 당시 경제관료들은 공황적 위기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분서주했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감사원이 공적자금 문제에 대한 특별감사 결과, 공적자금이 투입된 부실기업 및 부실금융기관 임직원의 7조1천5백여억원대 재산은닉행위와 12조4천억원 규모의 공적자금 과다투입 행위 등 총 1백82건의 위법.부당행위를 적발하고서도 정작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 등 공적자금 관련부처에 대해 ‘주의 촉구’의 형식적 징계를 내리는 데 그친 것도 공적자금 투입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꽃밭론’과 ‘바가지론’의 대립**
그러나 이종구 상임위원의 해명이나 감사원의 ‘무징계 결정’은 당시 상황의 일면만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여러 모로 ‘허구’이며 ‘위선’이다.
하나의 증거를 들어보자.
다음은 기자가 한 종이 일간종합지에 재직하던 무렵인 지난해 5월19일 쓴 기사 전문이다.
이헌재 재정경제부장관으로 대표되는 경제위기관리 경제팀의 공과에 대해 ‘꽃밭론’과 ‘바가지론’으로 비유가능한 상반된 평가가 나와 화제가 되고 있다.
재경부 관계자는 19일 최근의 경제불안과 추가공적자금 조성을 둘러싼 야당 및 언론 등의 비판과 관련, “소방관들이 목숨을 걸고 밤새워 불난 집의 불을 간신히 끄고 나니 불을 낸 주인이 ‘왜 소방관들이 조심하지 않고 불끄는 과정에 화단을 망쳐놨느냐’고 질책하는 모양새”라며 서운함을 표시했다.
그는 “큰 불을 잡기 위해 소방관들이 동분서주하다 보면 꽃밭을 밟는 등 사소한 피해는 불가피한 게 아니냐”며 “외환.금융위기후 2년간 불철주야 일한 결과 간신히 위기를 딛고 경제를 재생시키자 위기제공자중 하나인 구정권의 야당인사 등이 작은 범실을 찾아내 경제팀을 매도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꽃밭론’에 대해 한 민간경제연구소 관계자는 현 경제팀의 억울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다면서도 ‘바가지론’으로 비유가능한 반론을 펴 주목된다.
“얼마전 강원도 일원에 큰 불이 났을 때 절감했듯 불이 났을 때에는 신속히 물을 쏟아부어 불을 초기에 잡는 게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집에 불이 났을 때 다섯 바가지의 물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다섯 바가지의 물을 한꺼번에 쏟아부어야 불을 잡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최근 투신사에 기왕에 투입했던 3조원의 공적자금외에 5조원을 추가로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볼 수 있듯, 현경제팀은 다섯 바가지 중에 두 바가지만 물을 붓고 세 바가지의 물을 제때 쏟아붓지 않은 까닭에 이제 와서는 열 바가지의 물로도 불을 끄기 힘든 상황이 됐다.
최근 금융시장이 불안하고 주가가 폭락하는 것은 이처럼 제때 필요한만큼 물을 쏟아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최근 정부가 추가공적자금 조성과 관련해 국회동의라는 번잡한 절차와 인책을 피하기 위해 편법적으로 최소한의 자금만 조달하자 주가가 폭락하는 등 시장이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능하다”며 “두 바가지밖에 물을 조달 안해 불길을 키웠던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제팀의 최대실책은 2차 공적자금 조성 지연**
이 기사는 기자와 한 시중은행장, 재경부 고위관계자, 민간경제연구소 관계자, 외국계 펀드 CEO(최고경영자) 등이 기사작성 전날 시내에서 저녁자리를 같이 하는 자리에서 오간 가벼운 논쟁을 정리한 것이었다. 당시 이헌재 경제팀이 4월 국회의원 총선이라는 정치일정을 과도하게 인식했던 탓인지, 그 전해에 발발한 대우사태로 2차 공적자금 추가조성의 불가피성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묵살해 금융시장의 불안을 증폭시켰던 대목에 대한 ‘관(官)과 민(民)사이의 시각차’를 여실히 드러내준 논쟁이었다.
이 기사는 당시 관료계와 금융권 등지에서 상당한 화제가 됐었고, 그 여파인지 모르겠으나 그로부터 몇 달 뒤에는 한 조간종합지의 경제데스크가 기명 컬럼 형식으로 그 내용을 그대로 복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금감위의 이종구 상임위원이 기사의 앞 부문만 그대로 원용해, 재경부와 금감위의 억울함을 해명하는 논리근거로 사용했다. 이위원이 과연 1년반 전의 기자 기사를 보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기자의 기사작성 당시 그는 재경부 금융정책실장이라는 핵심요직을 맡고 있었다.
감사원은 이번에 공적자금 특감 결과를 발표하며 여러 대목에서 정부 관리감독의 소홀함을 지적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실책으로 지적한 대목이 2차 공적자금 추가조성 시기를 늦춘 데 따른 공적자금 추가소요였다.
감사원은 지난해 대우사태 등으로 금융부실 규모가 급증, 추가자금 소요가 30조원으로 추정되는 데도 “과거에 투입한 자금을 회수해 쓰면 된다”며 공적자금을 추가로 조성하지 않았다가 그해 9월에야 50조원을 추가조성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결과 금융부실은 확대재생산됐고 이는 곧 공적자금 소요를 30조원에서 50조원으로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 감사원의 지적이다.
감사원의 지적은 맞다.
YS정권 말기에 강경식 경제팀이 “우리경제의 펀더맨털(기초경제여건)은 튼튼하다”며 위기관리를 방치한 결과 97년 IMF사태를 겪었듯, 이헌재 경제팀은 2차 공적자금 추가조성 문제를 뒷전으로 미루다가 결국 공적자금 규모를 부풀리는 동시에 지난해와 올해의 극심한 경제침체의 단초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정치논리’가 공적자금 부실증가의 주범이었다**
그러나 감사원의 지적은 정책실패의 표피적 현상분석에서 멈추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기자의 접촉결과, 재경부와 금감위 관계자들은 분명 지난해초부터 2차 공적자금 추가조성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이 문제를 ‘공론화’할 수 없었다. 왜?
답은 역대 경제팀의 어깨를 짓누른 ‘그놈의 정치논리’ 때문이었다.
IMF사태이후 시기는 크게 1기와 2기, 둘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김대중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지난해 7월 대우사태가 발발하기 전까지의 기간이고, 2기는 대우사태 발발 이후이다.
1기에는 완전하진 못했으나 나름대로 일관된 원칙과 추진력으로 과거부실을 청산해나가 국내외의 호평을 받을 수 있었다. 지난 98년 10월에 280대까지 붕괴했던 주가가 힘차게 한때 1000선까지 반등할 수 있었던 데에도 이런 요인이 큰 힘이 됐다.
그러나 대우사태가 터지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대우사태는 DJ정부 초기부터 어차피 예견된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빅딜(사업 맞교환)’ 등의 편법을 통해 대우사태를 막으려다가 도리어 부실만 키우는 잘못을 범했고, 특히 대우사태 발발후 미봉책으로 일관하다가 상황을 치명적으로 악화시켰다.
수술의 적기(適期)를 놓친 까닭에 대우그룹 부실이 단일기업 부도로는 세계자본주의사상 최대규모인 80조원대로 증폭된 데에도 정치의 책임이 컸다. DJ정부 출범직후 김우중 대우그룹회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을 맡으며 무수히 청와대를 들락거리며 빅딜 카드를 제안하는 등 권력 지근거리에서 움직이면서 경제팀에 정치적으로 적잖은 무언의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논리가 경제에 해악을 끼친 보다 노골적 모습은 99년 7월 대우사태 발발이후에 목격됐다.
IMF사태 직후부터 현정부의 금융.기업 구조조정에 깊게 관여했던 한 금융전문가는 당시 이헌재 경제팀이 범한 정책적 오류를 두 가지로 요약정리하고 있다.
“하나는 대우사태가 터지면서 불거진 투신사 부실 문제의 처리를 늦춘 것이다. 정부는 도리어 투신사에게 대우부실을 떠넘겨 부실을 키우는 치명적 악수(惡手)를 두었다.
정부는 대우사태 발발후 대우에 4조원의 신규여신을 지원하기로 일방적으로 결정하면서 각 금융기관의 대우여신 회수비율에 따라 투신사들에게 2조5천억원을 떠넘겼다. 이것이 화근이 됐다. 고유계정이 부실했던 투신사들은 자신의 돈이 아닌 고객들이 맡긴 돈으로 부실화할 게 뻔한 대우에 울며겨자먹기로 지원해야 했고, 이에 투신사들에 돈을 맡긴 고객들의 불안이 증폭되면서 투신사로부터의 환매사태가 촉발됐다. 이런 식으로 1백조원대의 돈이 일제히 투신사로부터 빠져나가니 당연히 그후 금융시장은 계속 출렁일 밖에.
당시 정부 내에도 소수이기는 하나 대우문제와 투신문제를 함께 풀자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금융을 누구보다 잘 안다던 이헌재 경제팀은 ‘한번 금융시장이 망가지면 복구하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경제팀이 기대했던 것은 주가가 계속 올라 투신사 부실이 저절로 줄어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투신사 부실을 해결하지 않고 주가가 계속 오르기를 기대할 수 있었는지, 지금 돌이켜 봐도 도통 이해가 안간다.”
첫 번째 실책은 정치논리라기보다는 정책실패에 가깝다. 그러나 그는 경제팀으로 하여금 정책실패를 하게 만든 보다 근원적 동인을 '정치논리‘에서 찾았다.
“그 다음 실책은 공적자금 추가조성 기피였다. IMF사태후 1차 공적자금을 64조원만 조성키로 한 것 자체가 실수였다. 당시 외국계 금융전문기관들은 한국이 과거의 금융부실을 터는 데에만 최소한 1백20조원이상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었다. 더욱 이같은 64조원의 1차 공적자금에는 대우 부실이 포함돼 있지 않았다. 따라서 대우사태가 터진 다음이라도 정부는 신속히 추가 공적자금 조성에 나섰어야 했다.
그러나 2000년 2월 김대중대통령에게 금융감독위원회가 연두 업무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윤원배 부위원장이 ‘공적자금 추가조성은 필요없다’고 단언한 이래 경제팀은 공적자금 추가 조성문제를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식으로 서로 기피했다. 또한 4월 총선이라는 예민한 정치일정을 앞두고 김대통령이 지난 99년 11월 ‘이제 IMF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선언한 대목도 공적자금 추가조성을 막는 악재로 작용했다. 더욱이 한나라당의 이한구 정책위의장이 ‘6백조원대 국채’ 논쟁을 제기하고 정부여권이 이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경제문제가 선거최대 쟁점이 되자 공적자금 추가조성 문제는 더욱 꺼내기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경제팀은 시장논리에 기초해 공적자금 추가조성을 추진해야 했다. 하지만 4월 총선후 8월 개각때 교체될 때까지 이헌재 경제팀의 일관된 주장은 ‘공적자금 추가조성 문제를 꺼내면 금융기관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심화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공적자금 투입 금융기관의 모럴 해저드가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금융감독의 문제지, 공적자금 추가조성과는 별개 문제였다. 요컨대 당시 경제팀의 주장은 궤변이었다.”
***정책실패 여부는 시간이 흐른 후에나 판단가능한 것인가?**
김대중대통령은 공적자금 관리부실 문제가 문제화되자 지난 1일 MBC 창사40주년 기념회견에서 “철저하게 관리하지 못한 정부도 책임이 있다”며 “관리를 잘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거기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진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은 다음날인 2일 KBS에 출연해 “대우를 98년에 정리하거나 공적자금 투입은행들을 파산시켰을 경우 그 효과에 대한 비판은 사후적인 것”이라며 “공적자금 조성이나 집행 등의 문제에 있어 다른 대안이 있었는지는 향후 몇 년 정도가 지나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의 책임 시인이나 진부총리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김대통령의 정부책임 시인은 ‘꽃밭론’ 등을 주장하는 경제부처 관료들보다는 일진보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관리를 잘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책임을 묻겠다”고 한 대목은 책임을 관료들에게만 돌리고 있다는 점에서 잘못이다. 더 큰 원인제공자이자 책임자는 ‘정치권’에 있기 때문이다.
진부총리 주장 역시 잘못이기는 마찬가지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정책실패는 ‘예방불가능한 존재’이자 ‘비판금지 성역’이 된다. 관료의 지독한 오만이자, 무책임성의 극치이다.
이같은 무책임과 오만은 DJ정부에게서만 목격되는 게 아니다. 과거 역대정권에서도 숱한 시행착오를 되풀이했고, 과거집권세력이었던 현재의 거대야당 역시 공적자금 문제 등을 다루면서 자신의 책임을 덮고 남의 책임은 증폭시키는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길은 단 하나다. 경제는 경제논리로 운영하라는 것이다. ‘그 놈의 정치논리’가 계속해 개입한다면 앞으로도 계속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것이며, 그 모든 정책실패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으로 돌아올 게 너무나도 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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