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할리우드가 내년초 제작에 들어가는 첩보영화 007시리즈 20탄에 북한을 ‘주적(主敵)’으로 설정한 뒤, 우리나라에서 북한 킬러 등의 악역을 맡을 배우를 뽑기 위한 사전 오디션과 캐스팅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물의를 빚고 있다.
이같은 ‘북한 두들기기’는 9.11테러 발발후 미국 할리우드 빅메이저들이 미국정부의 주문과 지원 아래 경쟁적으로 ‘람보 4’ 등 쇼비니즘(맹목적 애국주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가운데 추진되는 것이어서, 요즘 가뜩이나 살얼음위를 걷는 듯 불안한 한반도의 평화무드를 깨는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특히 이같은 냉전회귀적 상업주의 영화에 우리 영화인들이 출연하는 것은 남북한 화해라는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반(反)시대적 행위’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어, 캐스팅 후보로 오른 국내영화인들의 대응이 주목된다.
***북한은 할리우드의 새로운 주적?**
26일 영화계에 따르면, 007 시리즈의 제작사인 미국 할리우드의 MGM사는 내년 1월에 제목 미정의 ‘007 시리즈 20탄’을 크랭크인(촬영개시)할 예정이다.
20탄의 스토리는 냉혈의 북한군 특수요원이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바라는 북한의 장군을 제거하려 하자 007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특수요원과 목숨을 건 한판싸움을 벌인다는 것. 이 과정에 북한 킬러는 영국의 밀레니엄 돔을 파괴하려는 등 9.11테러에 버금가는 악질적 테러행위를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MGM은 이같은 스토리를 확정지은 뒤 북한 장군과 그의 아들, 북한군 특수요원 등의 역할을 맡을 3명의 한국인 배우를 캐스팅하는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화계에 따르면 최민수, 유오성, 송강호씨 등 1급 영화배우와 ‘궁예’ 역으로 스타덤에 오른 탤런트 김영철씨 등이 현재 물망에 오르고 있다.
후보로 오른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작품 속에서 북한군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최민수씨는 ‘인샬라’에서 고독한 북한 용병 역할을, 유오성씨는 ‘간첩 리철진’에서 순진한 간첩역을, 송강호씨는 ‘JSA'에서 북한군 휴머니스트 역할을 소화해냈다. 탤런트 김영철씨도 그동안 드라마에서 북한군 역할을 자주 맡아왔다.
캐스팅사는 이같은 전력을 중시해 이들을 후보대열로 올려놓고, 이들에게 출연했던 작품 비디오 제출 등을 통한 오디션을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007시리즈는 본래 냉전시대의 산물이었다. 주로 구소련과 그 사주를 받은 악한들을 적으로 삼고 영국 대외정보국(MI-6) 요원 제임스 본드가 이들을 일망타진하는 식이다. 그러던 중 80년대말 냉전이 끝나자 한동안 007은 ‘마땅한 적(敵)’을 찾지 못해 방황했다. 냉전 이후 007은 주로 마약상이나 무기상, 사악한 언론재벌, 이라크 등을 새로운 ‘세계의 적’으로 만들어왔다. 그러다가 이번에 북한을 주적으로 설정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북한은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깡패국가**
007이 북한을 포함한 한국인(할리웃은 남한과 북한을 구분 못한다)을 적으로 삼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007 시리즈 가운데 역대 최대흥행작으로 꼽히는 3탄 ‘골드핑거’에서 이미 한국인으로 설정 된 ‘오드잡’(해롤드 사카다 분)이라는 강철모자를 쓴 살인마와, 악당의 시중을 드는 한국여성을 등장시킨 바 있다. 이 영화에서 오드잡은 아무 감정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괴물 같은 인물로 아무리 죽이려 해도 죽지 않자 결국 제임스 본드가 전기로 감전시켜 제거한다.
이밖에도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액션영화들에서는 북한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예가 많았다. 스티브 시걸 주연의 ‘언더씨즈(UNDERSIEGE)’에서는 북한 잠수함이 테러범들의 해상기지로 제공되었고, 만화를 영화화한 SF물 ‘스폰(SPAWN)’에서는 북한의 생화학공장이 주인공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한반도는 세균으로 초토화돼 죽음의 땅이 되는 것으로 묘사한 바 있다.
이런 부정적 묘사가 많은 이유는 북한에 대한 할리우드의 몰이해외에, 북한이 미국정부에 의해 국가라기보다는 범죄집단처럼 취급되는 ‘깡패국가(Rogue States)' 리스트에 이라크, 쿠바와 함께 올라있는 영향도 적잖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할리우드의 한국계 배우들은 모국의 이미지를 해치는 영화 출연을 거부해 왔다**
최근 미국 부시정부는 생각보다 빨리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날 조짐을 보이자, 북한의 생물학 무기를 문제삼기 시작하는 등 미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반(反)테러 전쟁을 아프간 이외의 타지역으로까지 확전시키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낳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뉴욕타임스지는 25일(현지시간) "미국의 2단계 테러응징 목표가 북한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 신문은 "이번 아프간전쟁 초기단계부터 공격대상 리스트의 가장 윗부분에 이라크가 있었지만, 이라크외에도 핵무기 및 세균무기 개발 역사를 갖고 있는 북한이 테러응징 대상으로 거론될 수 있다는 암시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그 증거로 미정부가 최근 제네바에서 열린 생물무기협약(BWC)회의에서 이라크와 함께 북한을 거명하며 세균전 무기를 계속 개발.생산하고 있다고 비난한 점을 들었다.
이같이 복잡한 와중에 북한을 주적으로 삼는 007영화가 나온다는 것은 할리우드의 단세포적 흥행 전술외에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깔린 게 아니냐는 의혹마저 일각에서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영화계 일각에는 이같은 문제의식 없이 007 제작사의 한국배우 캐스팅을 단지 '한국배우의 할리우드 진출 기회'라는 점에서만 주목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한 영화담당기자는 “홍콩의 액션스타 이연걸도 할리우드에 처음 가서는 악당역으로 시작했다”며 “맡는 역할은 큰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작진에 한국배우들의 오디션을 주선해준 영화기획자 모씨는 “어차피 007같은 영화는 악당과 주인공이 나오는 단순한 구조”라며 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제까지 할리우드에서 부정적인 한국인 역은 일본계나 중국계 미국배우들이 도맡아 연기했다. 할리우드에서 활동중인 한국계 배우들이 “모국의 이미지와 한국인의 자존심까지 해치면서까지 연기할 수는 없다”고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국내 배우들이 동일한 상황을 맞고 있다.
007 시리즈라는 세계적 흥행물에 출연한다는 것은 분명 세계스타가 될 수 있는 기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JSA에서 관객들의 눈가를 적시게 했던 휴머니스트 송강호씨가 만약 북한군 테러리스트로 나오면 관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마찬가지로 분단의 아픔을 깨물며 쓸쓸히 죽어간 간첩 리철진의 유오성씨나, 북한의 굶주린 주민들을 위해 용병노릇을 했던 최민수씨가 극악한 북한 테러분자로 변신한다면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
우리나라 영화의 국내영화시장 점유율 50%라는 세계적 기록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자랑스런 국내 영화인들이 반드시 곱씹어보아야 할 대목일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