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온 세계가 미국을 주목하고 있다. 상처받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은 곧 정체조차 불분명한 테러리스트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어쩌면 이 글이 발표되기도 전에 아프가니스탄 이곳 저곳에서 미군의 고성능 폭탄들이 터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무고한 목숨들이 희생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공격으로 오사마 빈 라덴이 제거된다 해도 9.11 항공기 테러와 같은 끔찍한 폭력의 악순환이 종식될 것 같지는 않다. 미국의 오만에 분노하는 제2, 제3의 빈 라덴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우리는 세계에서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미국이 제 나라 안에 있는 국민들의 목숨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미국이 외적(外敵)의 침입을 받은 것은 건국 이후 딱 한번, 1812년 영국군의 워싱턴 진주 때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신생 독립국이었다. 50년 이상 세계를 호령해 온 지금의 미국과는 처지가 달랐다.
세계 제일의 경제력,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지닌 미국이 어째서 이런 수모를 당했는가. 날아오는 미사일을 요격미사일로 격추시킬 정도의 능력을 지닌 미국이 제 나라 국민의 목숨도 지켜내지 못한단 말인가.
미국은 분명 세계의 지도적 국가이다. 여기에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다. 문제는 세계 최강의 국가, 미국이 과연 세계를 제대로 이끌어 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번 항공기 테러는 미국의 지도력에 대한 강력하고도 끔찍한 항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미국의 진로, 미국의 세계경영(global governance) 능력을 새삼 되짚어 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사건은 세계경제가 침체의 벼랑 위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순간 발생했다. 그리고 사건의 여파는 곧장 미국경제에 대한 신뢰의 동요로 이어졌다. 사건 직후, 미 달러화의 가치는 유로화 및 엔화에 비해 2.5%나 떨어졌다. 이에 대해 영국의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세계적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달러화로 자금이 몰려들던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지난 한 주간 다우 지수는 14.3%나 폭락했다. 주간 낙폭으로는 지난 1933년 이후 최대치다. 나스닥은 16%, 사상 최대의 폭락을 기록했다.
사실 미국경제에 대한 신뢰는 이미 이번 사건이 있기 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IT기술에 기반한 미국의 ‘신경제’는 투기적 거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또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보장, 탈규제,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적 처방이 세계경제를 번영으로 이끌 것이라는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믿음도 사라지고 있다. 99년말 시애틀 세계무역기구(WTO) 회의를 계기로 시민단체들의 반(反)세계화 운동은 더욱 거세지고 있으며 이제는 반(反)자본주의적 색채마저 띠고 있다.
이번 테러사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블로우백’(blowback)이란 말을 쓰고 있다. 지난 해 같은 이름의 책을 펴낸 미국의 저명한 일본학자 찰머스 존슨에 따르면 블로우백은 미 중앙정보국(CIA) 관리들이 처음 만들어낸 말이다. ‘미국 국민 모르게 은밀하게 시행한 비밀공작이 초래한 예기치 않은 결과’를 뜻한다. 예를 들어 최근 20년간 미국에 마약이 홍수처럼 밀려들고 있는 것은 과거 미국이 양성하고 지원한 남미의 부패한 관리와 군인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번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오사마 빈 라덴도 블로우백의 전형적 사례이다. 지난 1979년 아프간을 침공한 소련을 격퇴하기 위해 미국은 자그마치 30억 달러를 들여 반소(反蘇)전사들을 키워내고 지원했다. 가장 강력한 킬러인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대부분 전사로 선발됐고 빈 라덴도 미국이 키워낸 전사중의 하나이다. 미국이 키운 전사들이 이제 미국에 대해 비수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지난 80년대 회교국가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군사력 증강을 은밀히 도왔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도 블로우백의 한 사례이다. 한마디로 미국에 떨어진 많은 재앙들이 미국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던 셈이다.
그동안 찰머스 존슨을 비롯한 미국의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대규모 블로우백의 도래를 경고했지만-이제까지의 대외정책을 계속 유지했다간 미국은 엄청난 대가와 고통을 치를 것이라고- 메인스트림은 끄덕도 하지 않고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또다시 이같은 경고음이 잇따라 나오고 있지만 미국의 정책 당국자들이 이제까지의 항로를 바꿀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함정의 항법장치에 중대한 이상(異常)이 발생한 것은 아닐까.
아마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할 것이고 또 계속해 나갈 것이다. 세계의 다른 국가들은 마지 못해, 또는 미국의 눈치를 봐가며 이 전쟁에 동참할 것이다. 그러나 대미(對美) 테러의 근본 원인인 미국의 일방적 대외정책을 수정하지 않고 전쟁만으로 테러리즘을 근절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세계적인 폭력의 악순환은 더욱 끔찍해질 것이다. 미국 내부에서는 벌써부터 사회의 병영화와 함께 자유의 심각한 침해가 빈발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개인이든 국가든, 지도력의 원천은 상대방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힘에 있다. 그 힘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설득하는 데서 나온다. 지도자, 또는 지도국가가 무리를 이끌기 위해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면 이는 지도력이 현저히 약화됐음을 뜻한다. 지금 미국이 그러한 상태에 있다. 미국이 스스로의 항법장치를 고치지 않는다면 세계는 더욱 혼돈과 폭력의 세계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세계의 지도자, 미국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세계시스템의 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그 위기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닥쳐올 혼돈을 헤쳐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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