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축적과 동시에, 비참한 현실의 축적도 이루어진다. 한쪽에서 부가 축적되면, 그와 다른 반대쪽에서는 정신적 피폐함을 포함한 빈곤의 축적이 진행되고 마는 것이다." 이 말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한 구절입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자본을 축적해가는 성장의 이면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꿰뚫어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자본주의에서 시장이란 바로 이런 두 가지 모순된 축적의 과정이 벌어지는 현장인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불평등한 거래가 실현됩니다.
시장에 민주주의란 없습니다. 자본의 발언권이 모든 것을 압도해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본의 관심은 노동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지, 노동력을 가진 사람의 행복에 있지 않습니다. 그걸 흔히들 "시장논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모순은 일어납니다. 다른 생산수단과는 달리, 노동의 주체는 인간이고 인간은 기계와는 구별되는 감정과 의지, 그리고 사람으로서의 행복에 대한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꿈을 인정하고 격려하고 도와주는 자본의 출현은 극히 불가능한 것이 현실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자본주의 시장을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그 성격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줄기차게 이어져 왔습니다. 자본의 탐욕을 채우는 시장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저항의 과정에서 발견된 사실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부와 빈곤의 동시적 진행이라는 사회적 양극화는 성장의 결과가 아니라 성장의 전제라는 점이었습니다.
즉, 부의 집중이 성장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상대적 빈곤을 전제로 한 부의 독점이 가능해질 때 자본주의 시장의 성장은 실현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신자유주의 체제란, "승자 독식 논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본에게 최대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만드는 방식은 자본이 없는 이들에게는 절망의 구렁텅이가 되고 맙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승자의 대열에 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회적 양극화는 이러한 현실에서 필연적입니다. 자본의 발언권은 권력화 되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의 발언권은 묵살되고 있으면서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해보겠다면 그런 모순이 따로 없습니다.
이를 제대로 해결하자면 갖지 못한 이들의 입장에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롭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권력이 자본과 동맹 체제를 이루고 있는 한, 민주주의적 양극화 해소는 진정한 답이 나오지 않게 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를 정부의 정책과 자본에게 묻지 않고 노조의 책임으로 돌리거나, 빈곤의 위협에 시달리는 서민들에게 골프에 대한 인식을 바꾸라고 요구하거나 또는 대안이 없으면 비판도 하지 말라는 식의 논리는 우격다짐이 될 뿐입니다. 대안이 없어도 비판은 언제나 가능한 것입니다. 비판 자체가 대안논의의 시작입니다.
정녕 대안 있는 비판 외에는 거부한다면,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문제를 해결할 책임과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 마땅한 도리가 될 것입니다.
사회적 양극화의 요인 가운데 하나가 무분별한 개방인데 특권층의 수요에 부응할 따름인 교육과 의료시장의 개방까지도 주장하게 된다면, 애초의 서민생활의 안정을 위한 사회적 양극화 해소의 입지 자체가 무너지고 맙니다.
또한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 문제를 푸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처방입니다. 정작 어려운 것은 누구의 세금을 더 많이 걷겠는가에 있을 것입니다. 만일 기업의 동력저하를 우려하여 법인세는 낮추고 봉급자들의 유리지갑만 열겠다면, 조세저항만 키우게 될 것입니다.
사회적 양극화 문제를 본원적으로 해결하자면, 시장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사회 철학적 변화가 가장 절박합니다.
이것 없이 내세워지는 정책은 헛발질이 되기 쉬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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