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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 닉네임 호칭

[‘바이크 보헤미안’ 최광철의 수상한 여행 3] ②의기투합

9월 10일 이른 아침,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앙선 반곡역사는 시골 마을 회관처럼 정겹다. 대합실엔 원주 지역 작가들의 풍경 스케치가 벽면을 가득 채웠고, 낡은 건물은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늙은 벚꽃 나무에 묻혔다.

무궁화 열차는 간현 관광지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물놀이하는 애들과 텐트촌을 영화처럼 빠르게 스치며 서울로 달렸다.

“오늘 몇 명 참석해요?” 추니가 대뜸 물었다.
“확실히 잘 모르겠어. 대여섯 명쯤 될 걸. 암튼 가봐야 알겠어.”

청량리역 대합실 지역 특산품 코너에서 엿강정을 한 봉지 사들고 지하철 1호선 용산행으로 갈아탔다.

“안녕하세요. 저 광주에서 올라왔어요. 여기 용산역 2층 여행 장병 휴게소에 와있어요. 이리로 오세요.” 메시지가 떴다. 광주에서 오신 분이 먼저 용산역에 도착해 미팅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최광철 여행작가

“안녕하세요. 먼 길 오셨어요. 힘드셨죠?” 첫 인사를 나눴다.
“아녜요. 광주에서 KTX 타고 편하게 왔어요.”

“인천에서 왔어요. 시간 늦을까 봐 걱정했네요.” 뒤이어 인천에서 직장에 다닌다는 분이 뒤 따라 들어왔다.
“오늘 근무하시는 날 아닌가요?” 손을 잡으며 물었다.
“아녜요. 비번이에요.”

“반갑습니다. 저희는 춘천에서 왔어요.”
“아하, 내외분이 함께 오셨군요. 오시느라 힘드셨죠.”
“ITX 열차 타고 편히 왔어요.” 훤칠한 체구에 싱글벙글 부부가 들어오자 분위기가 더욱 환해졌다.

“그리고 저쪽에 두 분도 반가워요. 어디서”
“네, 저는 의왕 살고요, 이 여성분은 자전거 동호회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늘 모임 제가 같이 한 번 가보자고 했어요.”
“그렇군요. 잘 오셨어요.”

휴게소 자판기 커피 한 잔씩을 채 비우기도 전에 이미 오래 전 친구처럼 대화가 편하게 오갔다.

“저는 작년에 퇴직했어요. 외국 여행은 스페인 산티에고를 걸어서 트레킹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자전거 타고 가본 적은 없고요. 언론을 통해 이번 뉴질랜드 여행 정보를 얻었습니다. 취지가 좋아서 함께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꼭 같이 가고 싶습니다. 요즘 들어 시간이 좀 나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데 오히려 제가 많은 걸 배웁니다.” 광주에서 오신 분이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소탈하고 적극적인 인상을 받았다.

“저는 무역업을 하다가 몇 년 전에 접고 요즘은 춘천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 아내는 사회 복지 시설을 운영하고 있고요. 매일 집과 학원만 정신없이 오가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아내가 더 늦기 전에 뭔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보자는 제안을 해서 이렇게 무모한 도전장을 냈습니다. 걱정이 태산 같아요.” 덩치 큰 남편의 점잖은 모습에 호감이 넘쳤다. 부인은 지고지순하면서도 예리한 눈빛이 번뜩였다.

“저는 자전거 해외여행 경험이 많아요. 시베리아 횡단도 하고 유럽도 갔다 왔습니다. 험난한 여정이었지요. 그때 같이 간 동료들과 마음이 맞지 않아 좀 힘들었어요. 저기 함께 온 여성분도 자전거로 미국 횡단을 했답니다.” 의왕에서 오신 분이 자전거 해외여행 경험담을 길게 늘어놨다.

“저는 올 연말에 퇴직합니다. 그래서 요즘 심정이 좀 착잡해요. 하지만 곧바로 뉴질랜드로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힘이 솟습니다.” 인천에서 오신 분은 젊어 보였다. 모자를 푹 눌러 쓴 모습이 마치 청년 같았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함께해주셔서요.” 나는 고마움을 표했다. “먼저 죄송한 말씀을 좀 드려야겠어요. 의왕에서 오신 두 분은 자전거 해외여행 경험이 풍부하셔서 이번 뉴질랜드 동행 취지에 맞지 않아 함께할 수 없어요. 공개 모집 내용에도 나와있듯이 첫 해외여행 도전자로 한정했거든요.” 나는 억지로 말을 꺼냈다.

“그냥 아무 간섭 않고 뒤따라가기만 할게요. 같이 가요.”
“저도 아쉽습니다만.”
“아뇨, 잘 알았어요.” 두 분의 표정에서 아쉬움과 원망이 진하게 느껴졌다.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의왕에서 오신 두 분은 선약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해 뉘엿뉘엿, 나머지 여섯 명은 첫 만남의 헤어짐이 아쉬워 용산역 뒷골목 포장마차로 자연스레 발길을 옮겼다. 소주 딱 한 잔씩만 하자던 약속은 금방 깨졌다.

“난 술을 못 해요. 술 마시면 온몸에 반점이 생기거든요. 우리 가문이 다 그래요.” 인천에서 오신 분이 미안한 듯 되풀이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로 주량이 매우 적어요. 소주 두세 잔이면 족해요.” 내가 말을 이었다.
“술을 안 마시는 게 아니고 못 마시는 거예요.” 인천에서 오신 분이 애써 강조했다.
“제가 철학에 관심이 좀 많아요. 사는 게 뭐 별 게 있습니까. 술도 좀 마십니다. 젊었을 때 무역하느라 정신없이 살았어요. 이젠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말 사는 게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춘천 학원장의 말이 점점 길어졌다.

“여기 소주 두 병만 더요”
“아니, 그만해요. 그만 가져오세요. 다음에 또.” 학원장의 추가 주문을 부인이 가로막았다.
“그럼 딱 한 병만 더.” 협상이 성사됐다.

“저는 어쩌다 소방 분야 고위직까지 올랐습니다. 퇴직하고 요즘은 시간적인 여유도 있고 해서 집수리 봉사를 하고 있는데 사실 처음엔 망치질도 제대로 못했어요. 이젠 만능 박사가 됐지요. 허허” 광주에서 오신 분은 자신감이 넘쳤고, 든든함이 엿보였다.

술자리에서 각자 닉네임이 붙여졌다.

광주에서 오신 분은 “만능 키”로 부르기로 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해결 능력이 뛰어나신 분 같았다.
춘천에서 오신 분은 “춘천댁”, 그의 남편은 “뭔지”로 지었다. 남편의 성품이 소탈하고 철학에 깊이가 있어 보였다. 대화 도중에 ‘사는 게 뭔지’라는 말을 되풀이하다가 그만 닉네임이 돼버렸다.
인천에서 오신 분은 “인천 총각”으로 정했다. 나이에 불구하고 젊어 보였기 때문이다.
나와 아내의 닉네임 ‘삐삐’와 ‘추니’는 이미 알려져 그대로 부르기로 했다. 삐삐는 바이크 보헤미안(Bike Bohemian)의 머리글자를 딴 거고, 추니는 ‘춘희’란 이름을 소리 나는 대로 부른 것이다.

모두들 닉네임이 마음에 든다며 기분 좋아했다. 얼마 전까지 불러지던 사회적 직함 대신 닉네임을 부르기가 처음엔 조금 어색했지만 술잔 부딪히며 금방 자연스러워졌다.

“넉 달 뒤 뉴질랜드로 출국하기 전에 몇 번 더 모이자고요.” 인천 총각의 제의에 모두들 화답했다. 생면부지 처음 만났지만 의기투합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네, 민숙영 씨 안녕하세요. 엊그제 운전 중이라 길게 얘기를 나누지 못했어요.” 뒤늦게 동행 희망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말씀드린 대로 은행에 갔다가 자전거 여행 기사를 ‘한경 머니 MONEY’를 통해 읽고 나서 곧바로 옆자리 젊은이에게 부탁해 겨우 최 선생님의 블로그를 찾아 이렇게 전화 연결이 됐어요. 기사를 읽고 너무 감명받았습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보아 젊은 여성인 듯했다.

“네. 감사합니다.”
“내년 1월 초 뉴질랜드로 자전거 여행에 저희도 같이 갈 수 있을까 해서 문의드리는 겁니다.” 다소 흥분된 목소리였다.

“마침 어제 동행 희망자 첫 모임을 용산에서 가졌습니다만.” 여지가 있다는 뜻으로 말을 이었다.
“실은 저희 남편이 제2의 장년기를 맞이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저와 같이 배낭여행도 몇 번 갔다 왔지만 다툼이 심했고, 만족스런 여행이 되질 못했어요. 최 선생님의 글을 보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답니다.” 얘기의 시작이 범상치 않았다.

“네, 남편분과 함께 가시려고 하는군요.”
“뉴질랜드에 자전거를 갖고 가는 겁니까?”
“네, 텐트도요.”
“이번에도 캠핑을 합니까?”
“네, 민숙영 씨는 캠핑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아뇨. 아직 한 번도.”
“그럼 자전거는 자주 타시나요?"
“네. 어릴 적에 배워서 탈 줄 알고요, 집에서 실내 싸이클을 종종 탑니다. 잘 타요. 방향 감각 문제없습니다.” 자전거 탈 줄 안다는 걸 애써 강조했다.

“민숙영 씨 말씀을 들어보니 공개 모집 취지에는 맞아요.”
“그럼 같이 갈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47일간 야영하며 2,000킬로미터 횡단한다는 걸 알고 계시죠. 중간에 높은 산악 지대도 통과해야 하고요." 다시 한 번 험난한 여정임을 얘기했다.
“알고 있어요. 저는 갈 수 있어요. 그런데 저희 남편이 이런저런 생각이 깊어 아직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럼 아직 최종 결정을 못 하셨군요.”
“네. 그렇습니다. 만약에 남편이 도저히 못 가겠다고 하면 저 혼자라도 갈 수 있을까요?”
“혼자서 가신다고요?”
“꼭 가고 싶어요. 꼭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 여성의 불끈 쥔 주먹이 보이는 듯했다.

“자전거 얼마짜리 사야 돼요? 텐트는요, 버너는요, 코펠은요, 이부자리는요, 가다가 캠핑장이 없으면 어떡해요, 영어는 제가 조금 할 줄 알아요. 하루에 경비는 어느 정도 들어요, 혹시 달리다가 뒤쳐지면 저를 놔두고 그냥 가시지는 않겠죠?”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민숙영 씨, 일단 남편분과 충분히 상의하시고요,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그 결과를 알려주세요. 동행자들과 같이 얘기를 나눠봐야 하니까요.”

그분의 용기와 자신감, 새로운 변화에 대한 간절함이 엿보여 그냥 안 된다고 딱 자르지를 못했다.

“곧 전화드릴게요. 꼭 가겠습니다.”
“네, 함께 가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크리스천이고, 성악가라며 이번에 함께 갈 수 있도록 기도를 해달라고 해서 난 교회에 다니지는 않지만 잘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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