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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이 추앙받는 이유는

[전쟁국가 미국·1강-⑤] 미국의 세계 지배와 선전 선동

조직적 선전‧선동의 시작

1차 대전이 끝난 지 100년, 나이위원회 활동이 종료된 지 80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 제럴드 나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미국 참전의 주요 원인이 JP모건 구하기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미국의 참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윌슨의 민족 자결'로 기억된다. 윌슨은 민족 자결,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주창한 미국식 이상주의 외교의 선도자로 추앙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조직적인 선전‧선동(propaganda) 덕택이다.

윌슨은 참전을 결정하고 2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1917년 4월 13일 참전을 독려하기 위한 선전기관으로 공보위원회(CPI : 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를 설립한다. 국민들의 전쟁 열기를 북돋우고 반전평화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었다.

대학과 언론의 전폭적인 참여 하에 CPI는 훌륭하게 그 목적을 이뤄낸다. 이후 전쟁과 관련된 정부의 선전선동은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는다. 2차 대전과 한국전쟁, 걸프전쟁과 이라크 침공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비판의식을 마비시키고 국민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윌슨이 내세운 '민족 자결'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기만적이었던가를 살펴보자. 윌슨이 민족 자결을 포함한 14개 평화원칙을 발표한 것은 1918년 1월 8일 의회 연설을 통해서였다. 윌슨은 연설에서 미국 참전의 목적은 국제 사회의 공정한 평화 수립에 있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속내는 사뭇 달랐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독일과 단독 강화를 추진하는 소비에트 러시아를 만류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3월 3일 소련이 독일과 단독 평화협정(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윌슨의 시도는 실패한다. 제정 러시아 영토였던 폴란드와 핀란드, 발트 3국, 우크라이나, 조지아에 대한 주권(면적 77만 7000㎢, 주민 5000만 명)을 포기한 값비싼 평화였다.

윌슨이 내세운 14개 평화 원칙 중 제6항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의 모든 영토로부터 군대를 철수하고 러시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대해 해결함으로써, 러시아가 어떤 제약도 받지 않은 채 자국의 정치 발전과 국가 정책에 대해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자국이 스스로 선택한 제도 하에서 자유로운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진심으로 환영을 받을 수 있도록 세계의 다른 국가들이 최선을 다해 최대한 자유롭게 협력할 것이다."

즉 소비에트 러시아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민족 자결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윌슨은 영국 등 서방 국가들과 함께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기 위해 미군을 러시아에 파견한다. 미군의 러시아 주둔은 윌슨의 민족 자결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중적 행태는 그가 주창한 국제연맹 창설에 결정적 타격을 입힌다. 윌슨의 평화주의 외교에 공감했던 미국의 많은 진보적 정치인, 지식인들이 그에게 등을 돌린 탓이다.

▲ 대통령 재직 시절의 우드로 윌슨 ⓒU.S. National Archives

공보위원회(CPI : 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

공보위원회(CPI)은 윌슨의 친구이자 덴버의 신문기자 출신 조지 크릴이 맡았다. 크릴이 CPI에 합류한 것은 에드워드 버나이스를 통해서였다. 버나이스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귀화 미국인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두뇌 회전이 가장 빠른 선전가로 꼽힌다. 그는 당시 미국에는 아직 생소했던 인간심리학 분야의 전문가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이자 미국 저작권 대리인이었기 때문이다.

크릴과 버나이스는 친영파 저널리스트이자 윌슨의 절친한 조언자인 월터 리프먼의 소개로 CPI에 발을 들여놓았다.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리프먼은 모건을 둘러싼 월가 세력과 영국의 비밀조직 '라운드 테이블'을 이어주는 밀사였다. 라운드 테이블은 1909년 창립된 이래 독일과의 전쟁을 준비하도록 영국을 부추기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CPI는 전시에 사실상 미디어 검열관 노릇을 했다. 뉴스 매체를 검열하는 '자율적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반독일 선전을 통해 의회가 미국 역사상 가장 억압적인 법률인 방첩법(1917년)과 반선동금지법(1918년)을 통과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명한 사회주의자 유진 뎁스는 반전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918년 6월 체포돼 방첩법 위반 등 10개 혐의로 10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전쟁이라는 것들을 보면 정복과 약탈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중략) 그게 바로 전쟁의 본질이에요. 지배계급은 늘 전쟁을 선포만 했습니다. 실제 전투에 나가 싸우는 것은 늘 피지배계급이었습니다"

또한 CPI는 선정적 저널리즘을 표방하는 크릴, 프로이트 심리학과 그것을 통한 인간의 무의식적 동기 분석이라는 무기를 갖춘 버나이스, 이 두 사람을 내세워 미국 대중을 선동했다. 독일 병사들이 벨기에 아기를 총검으로 난도질했다든가, 벨기에 여인의 젖가슴을 도려냈다는 식의 충격적 얘기를 퍼뜨림으로써 독일에 대한 원초적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이런 '정보'들을 보도자료 형태로 언론에 배포했다. 매주 2만 건이 넘는 신문 칼럼이 CPI의 보도자료를 인용한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4분 맨(Four-Minutes Man)이라는 전국 차원의 자원봉사단을 꾸렸다. 그들의 임무는 영화 시작 전에 전쟁 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4분간 하는 것이었다. 7만 5000명이나 되는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었다. 이것은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카이저 : 베를린의 야수> <늑대 같은 독일 문화> 등의 반독일 선전영화를 상영했다. <타도하자 독일 황제>라는 영화는 어찌나 인기가 좋았던지,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입장을 거부당한 데 격분한 군중들이 난동을 부리는 탓에 폭동 진압 경찰이 출동했을 정도였다.

이들의 전략은 인간의 가장 저열한 감정을 충동질 하는 것이었다. 정치학자 해럴드 라스웰은 1927년 <세계 대전에서의 프로파갠다 기술>이라는 저서를 통해 1차 대전 동안 CPI가 행한 선전선동을 분석했다.

라스웰은 이 책에서 크릴과 리프먼, 버나이스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했는데 이들은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들이라고 해서 지성적으로 행동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감성적으로 호소함으로써 어떤 행동인가에 나서도록 의식적으로 그들을 이끌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다. 라스웰 역시 그들의 믿음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반면 독일의 선전선동은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호소함으로써 완전히 실패했다고 한다. 라스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쟁 기간에 병력과 자원의 동원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인식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 여론도 동원해야 했다. 여론에 대한 지배력은 생명과 재산에 대한 지배력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현대국가에서는 전쟁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 강하므로 모든 전쟁을 위협적이고 잔인무도한 침략자에 맞선 방어전으로 보이게끔 몰아가야 한다."

"잔인한 이야기는 늘 인기가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대중이 적에게 품은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느끼게 해주고, 또 어느 정도는 범죄 가해자와 스스로를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에게 강간당한 젊은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피해국의 많은 남성들에게 은밀한 대리만족감을 준다."

이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경제력과 군사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게 됐다. 여론에 대한 지배력, 인간 심리에 대한 조작이 필수적인 요소로 등장하게 됐다. 버나이스는 1928년 저서 <선전>을 통해 자신의 성공을 이렇게 자랑했다.

"전시의 선전이 놀라운 성공을 거두자 일부 지식인들은 선전을 통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1955년 저서 <동의의 조작>(The Engineering of Consent)을 통해 "홍보는 정보와 설득, 조정을 통해 대중이 어떤 행동이나 주의주장, 운동이나 조직을 지지하도록 이끄는 노력"이라고 정의했다.

1차 대전을 기점으로 여론 조작을 통한 '동의 이끌어내기(Manufacturing of Consent)'는 미국이 영구 전쟁 국가로 나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대량살상무기의 등장

1차 대전에서는 대량살상무기가 처음 등장한다. 독가스(화학무기)가 그것이다. 또한 공중폭격이 처음 시도되면서 군사력의 중심이 해군력에서 공군력에서 이동하는 단초가 된다. 특히 1차 대전 당시 미국은 화학무기 분야에서 놀라운 생산력을 과시한다.

화학무기는 1915년 4월 22일 2차 이프르전투에서 독일이 프랑스 군에 대해 처음 사용했다. 그해 9월 영국군은 프랑스 로스에서 독가스로 독일에 보복했다. 1915년 4월-1917년 7월 독가스 전투로 인한 영국군 사망자는 1895명, 부상자는 2만 1908명이었다.

그러나 1917년 7월 12일 독일군은 이프르에서 영국군에게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겨자 가스를 사용했다. 이때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가스로 인한 영국군 사망자는 4167명, 부상자 16만 970명으로 크게 늘어난다. 러시아군의 경우 독가스 사망자는 5만 6000명, 부상자는 42만 5000명에 달한다.

▲ 1차 세계대전 당시 방독면을 쓰고 있는 독일 군사들 ⓒ위키피디아

전쟁 기간 중 교전국들은 39종의 독극물 총 12만 4000톤을 사용했다. 독가스는 대부분 66만 발의 포탄으로 쏴서 살포했다. 미국은 뒤늦게 화학무기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생산력에 있어서는 단연 발군이었다. 미국의 화학무기 프로그램은 1917년 9월 각 대학에 분산돼 있던 연구 프로그램을 수도 워싱턴 D.C.의 아메리칸대학에 일원화함으로써 본격화됐다.

1918년 6월 28일에는 육군 산하에 화학전국을 신설했다. 1700여 명의 화학자가 60여 동의 건물에서 작업을 했다. 종전 무렵에는 화학자 수가 5400명으로 늘어났다. 그래서 '화학자의 전쟁'이란 말까지 나왔다. 원자탄이 개발된 2차 대전은 '물리학자의 전쟁'이었다.

미국이 생산한 화학무기는 영국, 프랑스, 독일을 다 합친 것보다 3-4배나 많았다. 아메리카 대륙의 모든 인간을 말살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전쟁이 끝나던 날, 미국은 겨자 가스 2천 톤을 유럽 전장에 보내기 위해 항구 부두에 쌓아놓은 상태였다.

1920년의 한 청문회에서 전쟁부 차관보 베네딕트 크로웰은 1919년으로 계획된 대공세에서 화학무기가 핵심적 역할을 할 예정이었다고 분명히 말했다.

"1919년 대공세가 시행됐다면 아마도 베를린 입성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겁니다. 화학무기 덕분에 말입니다. 물론 그 계획은 극비였지요."

우드로 윌슨과 민족 자결

우드로 윌슨은 '민족 자결'이라는 미국의 세계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은 아직도 미국 외교의 대원칙으로 통용된다. 미국에서 윌슨은 미국이라는 나라와 대통령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놓은 지도자로 평가된다. 윌슨을 떠받드는 미국인들의 세계관은 과연 어떤 것일까?

남부 버지니아 주 출신의 윌슨은 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장로교 목사로 도덕주의적 성향이 매우 강했고 대단히 고집이 세며 독단적이었다. 그는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세계를 위한 고귀한 사명을 띠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1차 대전 종전 직후 "마침내 세계는 미국이 세상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프린스턴대 총장 시절인 1907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닫혀 있는 나라들의 문을 때려 부숴야 한다. (중략) 외국에서 금융가들이 따낸 이권은 각료들이 안전하게 지켜줘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고분고분하지 않는 나라들의 주권이 침해돼도 할 수 없다."

그는 혁명을 혐오하고 무역과 투자 확대를 열렬히 옹호했다. 대통령이 된 후 전미외국무역협회 발언에서 "내가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이 나라의 무역을 최대한 발전시키고 외국 시장을 정당하게 확보하는 일"이라고 공언했다. 파업은 "문명에 도전하는 범죄"라고도 말했다.

또한 남부인의 후예답게 백인이 인종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이 강했고 대통령 재임 기간에 연방정부 공무원들에 대한 흑백차별을 노골화했다. 심지어 1915년에는 인종주의 영화로 악명 높은 <국가의 탄생>을(영웅적인 KKK 단원이 야만적이고 음탕한 노예 출신 흑인들로부터 힘없는 백인 여성을 구해낸다는 내용) 백악관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는 "촌철살인으로 역사를 썼구먼. 딱 하나 유감인 건 저게 다 진실이라는 거야"라고 말했다.

참전을 통해 '민주주의에 안전한 세계'를 만들겠다는 윌슨의 원대한 구상은 실패로 끝났다. 이에 대해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은 "윌슨의 실패는 이상주의와 군사주의, 탐욕과 현실정치가 독특하게 혼합돼 있던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계의 강대국으로 급속히 탈바꿈하던 시기의 상징"이라면서 "1920년대 초가 되면 제퍼슨과 링컨, 시인 휘트먼과 청년 제닝스 브라이언이 꿈꿨던 미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J. 에드거 후버, 우드로 윌슨의 손때가 묻은 미국이 등장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윌슨의 이중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사회정의를 외쳤지만 재산권은 신성불가침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모든 인간은 형제라고 하면서도 백인이 아닌 인간은 열등하다고 믿었다.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를 찬미하면서도 시민적 자유를 유린했다. 제국주의를 규탄하면서도 제국의 질서가 존속되도록 용인했다."

그것은 어쩌면 "영토와 시장, 안전에 대한 욕망을 번영, 자유, 안보 같은 그럴 듯한 명분으로 정당화"해온(역사학자 윌리엄 애플먼 윌리엄스) 미국적 전통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미국인의 윌슨적 세계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1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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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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