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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근대와 다른 세계에 대한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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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근대와 다른 세계에 대한 사유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32>

(*이 칼럼에는 분석 과정에서 다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편집자>)
I. "괴물"의 근대적 대한민국과 "설국열차"의 근대적 (서구유럽)세계

영화 <괴물>을 통하여 괴물이 된 서울과 괴물이 된 근대의 대한민국을 보여주었던 봉준호 감독이 영화 <설국열차>를 통하여 서울과 대한민국이 괴물이 된 근원이었던 근대 서구유럽 세계의 멸망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 <괴물>에서 괴물이 된 서울과 괴물이 된 근대 대한민국의 근원은 명백히 드러난다. 그것은 근대 서구유럽 중심의 제국주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과 근대 서구유럽 사회가 되고자 열망하는 대한민국이 자발적으로 조국근대화를 이룩한 과정의 산물이다. 그러나 영화 <설국열차>에서 1914년 7월 1일에 멸망하는 근대 서구유럽 세계의 근원은 지구 온난화에 대한 잘못된 대응으로 인한 기상이변으로 밖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영화에 등장하는 "설국열차" 속에 오늘날의 인류를 멸망하게 만든 지난 500년 동안 유지되었던 근대의 세계적 구조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괴물>이 괴물이 된 근대의 서울과 근대의 대한민국을 사유하게 만든다면, 영화 <설국열차>는 마침내 스스로 멸망하게 될 근대 서구유럽 중심의 세계를 사유하도록 만든다.


오늘날의 인류가 멸망한 새로운 빙하의 시대, 그 얼어붙은 지구의 표면 위에 달라붙어 있는 얼음을 관통하면서 17년 동안 끊임없이 달리고 있는 "설국열차"는 근대의 서구유럽 중심이 만든 세계이다. 그 안에는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의 남단 희망봉에 도달한 이후, 그리고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부스가 오늘날의 아메리카 대륙 쿠바 해안에 도달한 이후, 500년 이상 동안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모든 지역과 나라들을 서구 유럽이 만든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서구화하고, 산업화하고, 도시화한 근대의 언어와 근대의 논리와 근대의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새로운 빙하의 시대로 근대의 세계가 멸망했는데, 그 멸망의 터전 위에서 근대의 서구적 언어와 근대의 서구적 논리와 근대의 서구적 사유는 그대로 남아서 열차의 모든 칸들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감시하고 있다. 열차의 마지막 칸에서 혁명을 꿈꾸는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와 그에게 감명을 준 길리엄(존 하트 분), 그리고 열차의 엔진을 책임지고 있는 윌포드(에드 해리스 분)가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II. 다른 언어와 다른 논리

근대의 세계는 "설국열차"가 엔진을 중심으로 서로 차단되어 있는 지역과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근대의 세계를 창시한 서구 유럽을 중심으로 과거에는 문명과 야만이라는 인문학의 지식으로, 그리고 오늘날에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과 후진국, 혹은 제 1세계와 제 2세계와 제 3세계라는 사회과학적 지식으로 지역과 계급을 나누고 있다. 그래서 <설국열차>의 커티스가 등장하기 이전의 혁명들처럼 근대의 세계 속에서 일어난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프랑스혁명, 그리고 러시아의 볼세비키혁명과 같은 대부분의 혁명들은 서구유럽의 중심을 영국에서 미국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프랑스로, 그리고 서부 유럽에서 동부 유럽으로 전환시키고자 한 것이지 결코 노예제도와 식민지화에 토대를 둔 근대의 세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구소련이 멸망하고 동독과 서독이 통일하고 중남미 아메리카와 남아프리카에서 원주민과 이주민이 통합되고 중국이 세계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 <설국열차>에서 커티스와 남궁민수가 만난 것처럼 서로 차단되어 있는 지역과 계급은 서로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내 이웃의 지역과 내 이웃의 계급과 내 이웃의 성과 내 이웃의 생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1990년대 이후의 세계적 변화가 봉준호 감독으로 하여금 괴물이 된 근대의 서울과 근대의 대한민국을 넘어서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근대 서구유럽의 세계를 보여주는 <설국열차>를 만들게 한 예술적 동력이었을 것이다. 1990년대 이후의 세계적 변화에서 동아시아나 중남미 그리고 남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근대적 논리와 근대적 사유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영어나 불어, 혹은 독일어나 일본어와 같은 근대 제국주의 언어에서 벗어나 근대와 다른 논리나 근대와 다른 사유체계를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국열차>의 커티스는 중남미 아메리카 지역의 이주 백인(크레올)이 중남미 아메리카 원주민의 케추아어나 아이마라어를 만나거나 남부 아프리카 지역의 이주 백인(아프리카너)이 줄루어나 코사어를 만나듯이 영어의 세계가 아닌 남궁민수(송강호 분)가 사용하는 한글의 세계와 만난다. 하나의 사회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영어를 사용하거나 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명박이나 말기 근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대학 총장들과 같은 근대적 서구유럽의 식민지적 사유밖에 하지 못하는 속물들 외에 누가 있는가?

영어와 불어, 그리고 독일어와 일본어가 수백 년 동안 근대적 세계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에 근대적 논리와 근대적 사유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과는 달리 그들의 언어와 다른 한글과 같은 근대적 비주류의 언어들은 아직도 근대적 언어에 매몰되지 않는 새로운 논리와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커티스가 열차의 제일 앞 칸에 있는 윌포드를 만나기 위해 열차의 한 칸 한 칸을 연결하고 있는 문턱을 넘어서는 것과는 달리 남궁민수가 열차의 새로운 칸을 열고 또 다른 열차의 칸으로 들어서는 것은 환각제인 산업폐기물로 만든 크로놀을 수집하기 위한 것으로 드러난다. 커티스가 근대적 과거의 기억을 자각하고 깨어있는 기억의 논리라면, 남궁민수는 근대적 과거를 망각하고 꿈을 꾸는 꿈의 논리이다. 근대적 과거의 기억은 대립과 갈등이고 살육과 전쟁뿐이다. 오늘날의 한국과 일본이 근대적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근대적 제국과 식민지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한반도의 남과 북이 근대적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전쟁의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은 근대적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현재적관계의 즐거움을 향유하고 있지 않은가?

근대적 과거의 기억은 서구 유럽이 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지난 500년의 근대적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설국열차>의 곳곳에서 나타난다. 영국의 대처 수상에게 붙여진 "철의 여인"을 연상케 하는 메이슨(틸다 스윈튼 분) 총리, 일본 군국주의를 연상케 하는 일본군 복장의 방위대장은 차치하고라도 <설국열차>에서 윌포드를 찬양하는 교육처럼 미국이나 유럽의 교육현장에서 콜럼부스를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로 찬양하고, 바르톨로뮤 디아스를 아프리카 희망봉의 발견자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교육현장에서 일제 식민지 찬양자였던 이광수와 최남선을 근대한국문학의 창시자로 찬양하고 있고, 만주 지역에 핵폭탄을 투하하자고 주장했던 맥아더를 민족의 구원자로 찬양하고 있다. 물론 이광수와 최남선, 혹은 맥아더를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일어가 아닌 영어가 지배하고 있는 또 다른 근대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이광수요, 최남선이요, 또한 맥아더가 아닌가? 커티스가 궁극적으로 근대적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친일과 반일, 친미와 반미, 혹은 친북과 반북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는가? <설국열차>는 그렇게 근대적인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커티스가 가지고 있는 기억의 논리는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적 과거를 재생산한다. 역사적으로 찬양받고 있는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 그리고 프랑스혁명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로 대체했을 뿐이고, 러시아의 볼세비키혁명과 서구 유럽의 제 2차 세계대전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를 미국과 소련의 식민지로 대체했을 뿐이다. 그러나 커티스와는 달리 남궁민수가 가지고 있는 근대적 과거에 대한 망각의 논리와 화해의 논리는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 그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남궁민수와 요나(고아성 분)가 보여주는 꿈의 논리는 개인적으로 환각에 빠져 있는 <설국열차>에 등장하는 부르주아적 환각의 개인들과는 다르다. 남궁민수나 요나와 마찬가지로 크로놀의 환각에 빠져 있는 부르주아적 환각의 개인들은 근대적 세계의 <설국열차>를 유지시키고 있는 또 다른 피지배 노예들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부르주아적 환각의 개인들이 커티스와 남궁민수 그리고 요나에게 반혁명의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들이 근대의 세계를 유지시키고 있는 자본과 권력의 환각에 빠져 있는 개인들이기 때문이다.

남궁민수와 요나의 환각은 부르주아적 개인들의 환각과 다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과거의 망각은 현실적 화해를 위한 것이고, 그들의 꿈의 논리는 현실적 향유의 개인적 꿈이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꿈이고 현재의 세계를 넘어 미래를 투시하는 논리이다. 집단의 꿈이라는 점에서 남궁민수와 커티스의 논리는 서로 만날 수 있고, 현재의 세계를 넘어 미래의 세계를 투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남궁민수의 꿈은 요나의 미래적 투시력과 만날 수 있다. 영화 <설국열차>처럼 1990년대 이후에야 마침내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중국과 몽골, 혹은 베트남과 필리핀, 그리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우리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은 1990년대 이전의 대한민국이 서구화와 산업화와 도시화라는 근대적 "설국열차"의 마지막 칸에 탑승했던 것처럼 그렇게 근대 서구유럽 중심 세계 열차의 마지막 칸에 탑승할 마지막 나라들이 아니다. 중남미의 브라질과 에콰도르 그리고 볼리비아가 근대적 "설국열차"의 마지막 칸에 있는 나라들이 아니라 중남미 지역을 구성하는 서로서로 열려진 나라들인 것처럼 남과 북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서로서로 열려져서 아시아의 한 지역을 구성하는 나라들이다. 문제는 다른 언어와 다른 논리를 통하여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이다.


III. 열차의 바깥에 대한 사유

1990년대 이전의 그 어떤 지역의 혁명들도 지난 500년 동안 지속된 근대 서구유럽 중심의 세계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설국열차>의 맨 앞 칸에서 엔진을 가동하고 있는 윌포드와 그 열차의 맨 마지막 칸에서 민중의 추앙을 받고 있는 길리엄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서구화와 산업화와 도시화라는 서구 유럽 중심의 근대적 명제에 길들여진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중남미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해방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과거 식민지 종주국과 주종관계를 맺고 있었다. 과거 일본 제국주의에서 해방된 대한민국이 제 2의 일본이 되고자 열망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혁명을 겪으면서 그것을 자각한 길리엄은 <설국열차>의 마지막 칸 혁명의 지도자인 커티스에게 "윌포드를 만나면 무조건 죽이라"고 주문을 한다. 열차를 멈추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리엄의 주문을 망각한 커티스가 윌포드를 만나고, 어떤 희생을 겪더라도 "설국열차"를 유지시켜야 한다는 그의 논리에 망연자실한다. 그리고 "이제 네가 지도자가 되라"는 윌포드의 말에 그는 또 다른 사유를 할 수 없다. 그것이 오늘날의 서구유럽이고, 그것이 오늘날 서구유럽의 지식과 논리이다.

마침내 멸망할 것이 분명한 근대 서구유럽 중심의 발전이니 진보니 하는 현재의 천년왕국을 구성하고 있는 "설국열차"의 바깥을 사유할 수 있는 사람은 근대적 서구유럽이 가지고 있는 문명의 언어가 아니라 한글과 같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중남미 지역의 대지와 함께 자라난 대지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고, 커티스처럼 과거의 기억을 통한 현재의 발전이나 진보의 논리가 아니라 남궁민수처럼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미래의 삶을 향유하고자 하는 생명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침내 남궁민수는 대지의 언어인 한글과 자신을 희생시켜서라도 떨 요나의 미래적 삶을 열어주고자 하는 생명의 논리를 통하여 서구유럽 중심의 근대가 만든 인위적이고 과학적이고 문명적인 것으로 가득 찬 열차가 아니라 그 바깥, 지연적이고 예술적이며 생성적인 탈근대의 세계를 사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근대적인 것이 지배하고 있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내가 살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를 망각하고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과 아메리카인이 서구유럽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대지와 더불어 사는 자연인이 되는 것이다. 그 세계의 중심에 아시아인 소녀 요나와 아프리카인 소년과 북극곰이 마주하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는 우리가 서구유럽 중심의 근대적 지식과 권력에서 벗어나 어떻게 자연적이며 예술적이고 생성적인 지역과 대지와 생명에 토대를 둔 새로운 지식과 권력을 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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