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올림픽 이후 '코리안 드림'을 꿈꾸던 각국의 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이주노동자 역사는 얼추 25년이 됐다고들 한다. 그러나 착각이다. 한국인들의 형, 누나, 부모는 과거에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중국으로, 독일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일거리를 찾아다니던 한국인들의 역사까지 합하면 한국의 이주노동 역사는 100년을 훌쩍 넘긴다.
그러나 2013년, 한국 내 이주노동자 현실은 처참하다. 2007년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 화재 참사로 이주노동자 10명이 사망하면서 사회적 관심을 끌었지만, 그뿐이었다. 노동 환경은 통제돼 있고, 이를 악용한 '인종·인권 차별'은 전국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다. 언론에 잘 등장하지 않을 뿐이다.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 오히려 '강제 추방'을 실적화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미누'들이 말 못할 통제 속에서 인권 침해에 시달리다 해외로 추방되고 있다.
1993년 산업연수생 제도를 도입한 이후 편법 활용과 인권 침해 문제 등이 야기되면서 고용 허가제가 이를 대체했다. 고용 허가제가 시행된 지, 오는 8월 17일이면 9년이 된다. 연수생 신분으로 각종 불이익을 감내하던 이주노동자들의 신분은 다소 개선됐다는 평이 있긴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파리 목숨이다. 회사를 마음대로 옮길 수도 없고, 회사에서 잘리면 불법 체류자로 전락한다. 심지어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하더라도 회사 상황에 따라 불법 체류자로 전락할 가능성은 상존한다.
현행 고용 허가제의 문제는 무엇이고, 대안은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 '이주노동자 차별 철폐와 인권·노동권 실현을 위한 공동행동(공동행동)'과 <프레시안>은 고용 허가제 시행 9년을 되짚는 기획을 마련했다.
공동행동은 민주노총, 서울경인이주노조, 한국이주인권센터, 사회진보연대, 다함께, 전국학생행진,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민변 노동위원회, 인권단체연석회의, 아시아의창, 아시아의친구들, 지구인의정류장 등 30여 개 이주, 노동, 사회 단체들이 함께하는 연대체다. <편집자>
고용 허가제 9년 ① '일회용 인간'에게 강제 노동시키는 한국…언제까지? |
지난 6월 14일 이주노동자 차별에 대해 ILO 기준적용위원회는 차별과 학대로부터 이주노동자 보호에 관해 정부가 지속적으로 주목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하며, "재입국·재고용 제도를 포함하여 고용 허가제 하에서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변경하는 데 적절한 유연성이 보장되도록 하는 한편, 본 협약에 열거된 차별과 학대에 취약해지는 상황이 관행적으로 발생하지 않도록 정부가 즉각적인 조치를 노사 단체와 협력하여 취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내용은 2009년 ILO총회에서도 다뤄진 바 있으며 그 당시 한국 정부에 권고안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4년이 지나도록 차별이 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금 촉구안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왜 글로벌 정부를 지향한다는 한국 정부는 4년이 지나도록 차별을 시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위에서 ILO가 언급한 바와 같이 노동자라면 누구나 직장 선택의 권리가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2004년 고용허가제법을 실시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의 직장 선택의 권리를 원천적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근무 기간, 사업장 이동 횟수 역시 제한되어 있습니다. 고용 허가제 이주노동자들은 최초 3년 계약 동안 총 3번 사업장을 변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주노동자가 3번 다 사업장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변경하려면 전적으로 사업주들이 동의를 해줘야만 합니다. 사업주가 사업장 변경사유확인서에 서명을 해주지 않는 이상 이주노동자는 아무리 근로 조건이 열악해도 계속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 이주노동자는 자기 마음대로 사업장을 그만둘 수 있는 자유조차 없는 것입니다. 마치 과거에 노예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마음대로 사업장을 그만두거나 바꿀 수 없는 현대판 노예가 바로 한국의 이주노동자입니다.
ⓒ박원종 |
<사례 1>
네팔 노동자 M 씨는 무거운 유리를 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힘든 일이지만 참고 열심히 일을 해보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나면서 좀처럼 알 수 없는 흉통을 느꼈습니다. 꾹 참고 일을 해보려고 했지만 무거운 유리를 들 때마다 자꾸 가슴이 아파오는 증상 때문에 일을 더 할 수가 없었습니다. M 씨가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니 흉광의역좌밀긴장, 늑골연골염이라는 알 수 없는 병명과 함께 무거운 것을 드는 일을 계속 하면 몸에 안 좋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M 씨는 사장님에게 진단서를 보여주면서 '제가 너무 아파서 일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으니 사업장을 바꿔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은 아프면 일단 쉬라는 이야기만 할 뿐 사업장은 절대 바꿔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M씨는 잠시 쉬고 나면 좋아지겠지라는 생각으로 며칠 쉬었다가 일을 다시 했지만 여전히 가슴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일을 못하면 돈을 벌 수가 없고 일을 하면 몸이 너무 아픈 M씨는 사장님이 '사인'을 해주지 않는 이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정부, 이주노동자들에게서 사업장 변경 권리 사실상 박탈
이렇게 열악한 작업 환경에 이주노동자들이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용노동부는 이주노동자들이 사업장을 너무 많이 변경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사업장 변경 과정에서 브로커가 개입해서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사업장 변경 과정에서 브로커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은 단 한 번의 신문 기사뿐이었습니다.
사실관계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브로커를 막기 위해서 고용노동부는 그동안 사업장을 변경한 이주노동자들에게 제공해왔던 구인 업체의 명단을 2012년 8월 1일부터 아예 제공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 사업주에게 이주노동자 명단을 제공해서 사업주가 이주노동자를 고르는 방식으로 사업장을 변경하게끔 제도를 바꾸었습니다. 마치 과거 노예시장에서 지주들이 노예를 고르듯이 말 잘 듣고 불만 없는 이주노동자들을 골라 채용하는 꼴입니다.
더군다나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업장 변경을 할 수 있게 한다면 브로커가 개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브로커는 일자리을 알선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사람인데 고용 허가제에서 새로운 사업장 알선 업무는 오직 고용센터에서만 해오던 일입니다. 고용노동부의 주장대로 한다면 고용센터가 브로커와 함께 손을 잡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한편 고용노동부는 마치 기존에 구인 업체의 명단을 받는 이주노동자가 한국말을 잘 몰라서 직접 사업장을 찾아가는 것이 힘들어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브로커가 개입할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고용센터에서 'EPS 송출국(베트남, 필리핀 등 고용 허가제에 따라 인력을 한국으로 보내는 국가)' 16개 국가에 대한 자체적인 통역 시스템만 제대로 갖추더라도 이런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주 단체들에서는 고용노동부에 이주노동자들이 사업장 변경 과정에서 브로커로부터 얼마나 피해를 봤는지 구체적인 정보를 공개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고용노동부는 신문 기사 한 건을 제외하고 해당 자료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브로커 개입 여부에 대해 실태 파악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브로커 개입 방지를 이야기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주노동자들을 브로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사업장 변경을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주노동자들로부터 사업자을 변경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입니다.
사업장 변경 지침이 주는 스트레스가 많아도 너~무 많아
<사례 2>
방글라데시 노동자 A 씨는 처음에 일하던 공장에서 일감이 별로 없어 공장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용센터에 가서 사업장 변경 신청을 하고 새로운 공장에서 연락이 오기를 계속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사업장 변경 기간인 3개월이 다 되어 가는데도 새로운 공장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문자는 하루에 몇 통 오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온 문자를 보고 어렵사리 공장을 찾아가더라도 이미 사람을 구한 공장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3개월이 지나면 자동으로 미등록 체류자가 되기 때문에 사업장 변경 기간이 끝나기 일주일 전에 일단 아무 공장이나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열악해 보이는 작업 환경이지만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에 쫓겨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일하게 된 사업장에서는 냄새도 심하고 작업 환경도 너무 위험해서 A 씨는 버티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사업장을 바꾸더라도 악몽 같던 예전의 사업장 변경 기간이 떠올라서 좀처럼 바꾸고 싶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사업장 변경 내부 지침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변경된 지침으로 인해 사업장을 변경하고자 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주가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일하러 오라는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구직 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사업주로부터 연락이 와서 일하러 오라고 해도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주가 제시하는 근로 조건, 작업 환경 등이 자신에게 맞는지 안 맞는지 실질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사업주가 제시하는 근로 조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주노동자들은 이를 거절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주노동자에게는 이번 사업장을 거절한다고 해도 다음 사업장 추천이 정확히 언제 올 지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바뀐 사업장 변경 내부지침으로 인하여, 사업장을 변경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는 구인 업체의 연락처 외에는 어떠한 정보도 제공되지 않습니다.
사업장을 변경하는 이주노동자는 3개월 안에 근무처 변경 허가를 받지 못하면 체류 자격을 잃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볼 때 이 지침은 사업장 변경을 신청하는 이주노동자에게 강제로 근로 계약 체결을 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고용노동부가 원하는 건 이주노동자들의 강제 노동인 셈입니다.
적지 않은 이주노동자들이 이 지침 때문에 임금 체불, 폭언, 폭행, 장시간 노동 등 열악한 근무 조건에 처하더라도 사업장 변경 자체를 포기하고 계속해서 그 사업장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고용센터에서는 사업장 변경을 희망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사업장을 변경하기가 더 힘들어지니까 그냥 잘 이야기해서 현재 일하고 있는 사업장에 가서 다시 일하라'고 안내하고 있다는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변경된 사업장 변경 내부 지침이 이주노동자들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변경된 사업장 변경 내부 지침은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있습니다. 고용 허가제를 통해 들어오는 이주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 최저임금법, 산업안전보건법 등 노동 관계법이 한국인 노동자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근로기준법 제4조는 "근로 조건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업장 변경 내부 지침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는 구인 사업장에 대한 정보를 전혀 제공 받지 못하고 사용자의 연락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또한 사업주의 채용 의사를 이주노동자 스스로 거절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근로 계약을 체결해야 하는 이주노동자로서는 사용자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근로 조건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참을 수만은 없다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숨죽여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고용 허가제가 8년이 지나가면서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며 거리로 뛰쳐나오는 이주노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사업장 변경 지침이 발표된 작년 8월 그 뜨거운 여름에도 더 뜨거운 열기로 이주노동자들은 스스로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다"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구호를 외치는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는 2013년 한국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곧 다가올 8월 고용 허가제 9주년을 맞아 이주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일할 수 있고 인간답게 대우받을 수 있는 그날을 위해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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