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인 지난 15일 밤, 베트남은 축구 열기로 나라 안이 가마솥 끓듯 했다. 저녁 7시 30분(한국 시각 9시 30분)에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하는 스즈키컵 결승 2차전이 시작되기 5시간 남짓 전부터 수도 하노이의 미딘 경기장에는 국기인 '금성홍기'를 흔드는 4만여 관중의 함성이 우레처럼 울려 퍼졌다. 그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머나먼 한국 땅에서도 베트남팀을 응원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지난해 10월 그 나라 대표팀 감독을 맡은 이래 기적 같은 성적을 올려온 박항서 열풍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영웅 또는 선수들의 스승이나 '아빠'로 추앙받고 있는 박항서의 인기가 한국사회에서도 얼마나 폭발적인지는 그날 밤 SBS의 베트남·말레이시아 대전 단독 생중계를 통해 여실히 입증되었다. 시장조사 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그 시간대 TV 시청률은 전국 기준으로 SBS 18.1%, SBS스포츠 3.8%(합산 21.9%)였다. 같은 시간대 다른 방송사들의 시청률(MBC 10.2%, tvN 6.8%, KBS 2TV 2.9%)을 합한 것보다 높은 수치였다.
나도 그날 밤 9시께부터 TV 앞에 앉아 '박항서팀'이 이기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화면을 열심히 지켜보았다. 경기가 시작된 지 6분쯤 지난 9시 36분에 베트남팀의 꽝 하이가 골대 왼쪽에서 가로로 올린 공을 응 유엔 아인 득이 왼발 발리슛으로 시원하게 골인시키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손뼉을 쳤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도 함성이 진동했다. 나는 경기가 계속되는 95분 동안 베트남팀이 1 대 0을 유지하거나 한 골을 추가함으로써 10년 만에 스즈키컵을 다시 안고, 박항서 감독이 A매치 16경기 연속 무패 기록을 세워 베트남과 한국을 최상의 우방으로 만들어주기를 기대했다. 결과는 그렇게 되었다.
나는 그날 밤 잠자리에 들어 박항서가 '하나'로 만든 베트남과 한국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두 나라 국민들이 더할 나위 없이 가까워지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스포츠 지도자로서 뛰어난 자질을 지녔음은 물론이고 인간으로서도 따뜻한 품성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이 베트남에서 일구어낸 영웅적 업적만으로 두 나라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지금 같은 우애를 느끼게 될 수 있을까? 한국의 군대가 1965년 베트남전쟁에 참여한 뒤 그곳에서 저지른 살상과 만행에 대해 역대 정부가 전혀 사과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스포츠만을 매개로 참혹한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이 정당한 명분도 없이 벌이는 '추악한 전쟁'이라는 이유로 유엔 회원국 대다수와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던 베트남전에 한국이 참여하기로 한 것은 1964년 5월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이 '공산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대한민국 정부에 요청하자 대통령 박정희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국내에서 야당과 학생운동권이 격렬히 반대했지만 박 정권은 1964년 9월 11일 1개 의무중대와 태권도 교관단 파견을 시작으로 1973년 3월까지 연인원 32만5천여명의 육군과 해병대 등을 베트남에 보내 베트콩(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싸우게 했다. 동남아시아의 정세에 직접 관련이 없고 유엔 회원국도 아닌 대한민국이 '용병'이라는 비판을 모른 체하면서 '국제적 입지 강화, 미국·남베트남과의 우호 증진, 국군 현대화와 실전 경험 축적을 통한 북괴의 침략 야욕 억제'라는 구실로 미국(병력 55만여 명 파견)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군대를 그 나라에 보낸 것이다.
베트남전에 참여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일부 병력은 잔인하게 양민 학살을 저질렀다. 베트남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80여 건에 피해자는 9000여 명이었다. 사망자들 대부분은 갓난아이와 어린이, 노인, 그리고 여성들이었다.
최초의 대규모 학살은 1966년 1월 9일에 일어났다. 그 전해 10월 25일 베트남 중부 뀌년의 항구에 상륙한 맹호부대는 주둔지역인 빈딘성 깜따이촌에서 부대원 1명이 베트콩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는 것을 구실로 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을 공터에 모으고 총과 수류탄으로 43명을 살해했다. 맹호부대는 1966년 음력 1월 23일부터 2월 26일까지 빈안사에서 1004명을, 같은 해 9월 24일 쯔엉탄마을에서 58명을 학살했다. 현장에는 1976년에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졌다.
지난 4월 19일,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양민이 4000여명이나 되는 베트남 꽝남성에 사는 60대 초 여성 두 명이 서울을 찾아왔다. 우연히도 그들은 응우옌 티 탄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퐁니 마을의 응우옌 티 탄은 이렇게 증언했다. "1968년 2월 12일 한국군의 해병 제2여단(별칭 청룡부대) 1대대 1중대 소속 군인들이 퐁니·퐁넛 마들로 진입해 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74명이 살해됐고, 17명이 다쳤습니다. 당시 8살이었던 나는 그 사건으로 어머니, 언니, 남동생, 이모, 사촌동생을 잃었습니다. 나도 배에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서울신문>, 4월 20일자 기사) 하미 마을의 응우옌 티 탄은 같은 달 22일, 청룡부대 예하 5대대 26중대 소속 군인들이 마을에 난입해 주민들을 네 곳에 모으고 총을 쏘거나 수류탄을 터뜨려 135명을 학살했다고 증언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학살과 만행에 관해 박정희 정권은 물론이고 그 이후 어떤 정부도 공식적으로 사죄나 사과를 한 적이 없다. 베트남 유학생 1세대로 베트남과 한국의 참혹한 과거사를 조사해온 구수정(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은 "김대중(2001년), 노무현(2004년) 전 대통령 때 부분적 사과 표명이 있었지만 베트남 언론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고, 한국 언론을 통해 한국인만 알고 있다"며 "한국은 베트남 사람들이 모르는 사과를 반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축사에서 '베트남전 참전 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 경제가 살아났다'고 말한 뒤 (베트남에서)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며 "일본인 학자가 '한국전쟁은 신이 일본에 내린 선물'이라고 한 것과 다름없는 이야기였다"고 말했다.(<한국일보>, 20018년 3월 6일자 기사)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과 베트콩 연합군이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을 함락함으로써 베트남은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이듬해 7월 2일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공식으로 수립되었다.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베트남은 1980년대 후반부터 '도이 머이(쇄신)'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 상당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 인구 9600만여 명(세계 13위)에 비해 국민 1인당 평균소득(GDP)은 2018년 현재 2546달러에 불과하다. 그런데다 극심한 빈부 격차, 당료와 관료의 고질적 부패라는 심각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풍부한 천연자원과 우수한 인력을 가진 베트남은 날이 갈수록 한국의 중요한 교역 상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지난해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무역수지 흑자는 315억7000만 달러로 미국을 뛰어넘었다. 지난 3월 20일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2020년 2대 수출국으로 도약하는 베트남')를 보면, 2020년 한국과 베트남의 예상 교역액은 1200억 달러 이상으로, 수출 965억8000만 달러, 수입 283억6000만 달러가 되리라고 한다. 지난해 한국이 베트남 수입시장에서 차지한 비율은 22.1%로, 1위인 중국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축구의 놀라운 발전을 이룬 덕분에 '한국 외교관 100명'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큰 성과를 올렸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베트남인들의 친한 감정이 절정에 이른 지금,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인들도 그 나라에서 최상의 환대를 받으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대접만 받을 생각을 하기 전에 1960년대 중·후반에 한국군 일부가 베트남에서 저지른 참혹한 사건들에 관해 사죄나 사과를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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