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우리는 그들에게 빚을 진 자들이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우리는 그들에게 빚을 진 자들이다

[기고] 파인텍 408일+395일의 아픔

얼마 전 주 스웨덴 한국대사가 스웨덴 노총(LO)으로부터 망신당한 일이 크게 이슈가 되었다. 한국의 노조들은 매번 거리에서 투쟁하고 파업한다는 이정규 대사의 볼멘소리에 스웨덴 노총 부위원장은 "노조할 권리가 온전히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투쟁하고 파업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꼬집었다. 한국노동인권의 민낯이 드러났달까. 며칠 후 스타플렉스(파인텍) 차광호 지회장은 노사합의 이행을 촉구하며 무기한 단식을 선포했다. 12월 10일 세계인권의 날이었다.

박준호, 홍기탁 두 노동자의 굴뚝 농성이 400여일이 되어간다. 그동안 수차례에 걸친 면담요청에도 회사는 묵묵부답이다. 지난 2014년 차광호 지회장은 무려 408일간의 굴뚝 농성을 통해 사측으로부터 고용, 노동조합, 단체협약승계 등의 약속을 받아냈지만, 합의내용은 지켜지지 않았다. 회사의 일방적인 약속파기로 이들은 다시 굴뚝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현재 395일째 굴뚝농성을 이어가고 있지만 책임 당사자인 사장은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얼마 전, 정부와 정치권이 문제해결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회사와의 교섭을 요구하며 청와대에서 스타플렉스 서울영업부가 있는 목동 CBS까지 4박 5일간 오체투지 행진을 진행했다. 영하 12도의 강추위 속 노동자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백수천번 차디 찬 아스팔트 바닥에 몸을 던지고 또 던져야 했다.

추운 날씨 때문이었을까. 함께 바닥을 기며 가슴 깊은 곳이 서늘했다. 사람만 바뀌었을 뿐 계속되는 굴뚝농성, 합의한 내용을 이행하라는 노동자들의 소박한 요구를 무시하는 회사의 태도, 정부와 정치권의 무관심. 세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약속을 지키라는 것인데, 고작 5명에 대해 제대로 된 고용보장을 하라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던가. 가해자는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피해자는 생명을 걸어야 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눈물이 차올랐다. 여전히 회사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차광호 지회장은 단식에 들어갔다. 아, 우리 사회는 깊이 병들어있다.

▲ 박준호, 홍기탁 씨의 고공농성 굴뚝. ⓒ노순택

혹자는 빈정대며 그럴 시간에 다른데 일하라고 말한다. 그래, 그럴 수도 있었다. 공장에서 내쫒길 때 다른 일을 찾았다면, 억울해도 눈 한번 질끈 감았다면, 아마도 지금쯤 굴뚝 위가 아닌 따뜻한 집에서 가족들과 오순도순 지내고 있을지 모른다. 회사의 권유에 따라 희망퇴직을 했다면 매연 가득한 길거리 한뎃밥 대신 사랑하는 이들과 좋아하는 만둣국을 호호불며 먹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만 아니면 돼'란 생각이 팽배한 세상에서 '누구도 그런 취급을 받지 않는 세상'을 꿈꿨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당할 일이었고, 누군가 말하지 않는다면 반복해서 벌어질 일이었다. 이들은 현재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조금 더 정의로운 내일을 위해 저항을 택했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투쟁은 윤리적이며 이타적이다.

되레 묻고 싶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지금 당신과 내가 누리는 것들은 거저 주어진 게 아니다. 불과 48년 전, 하루 열다섯 시간을 밀폐된 공장에서 먼지마시며 일하다 폐병이라도 생기면 그대로 쫓겨나던 시절, 아니 그 이전부터 누군가는 불의에 맞서 싸웠고, 피 흘렸으며, 옥에 갇혔고, 산화했다. 앞선 이들의 희생으로 인한 열매를 누리고 있음을 기억할일이다. 아직도 촘촘한 자본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는 이들이 있다. 파인텍의 408일+395일의 아픔만큼 노동인권도 전진하고 있다. 우리는 빚을 진 자들이다.

매주 화요일 기도회를 할 때 굴뚝 위 두 개의 불빛을 본다. 박준호의 빛, 홍기탁의 빛. 언젠가 그 작지만 또렷한 불빛을 보며 저들이 촛불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 두 노동자들은 자신을 태워 이 땅의 어두운 노동현실을 조금씩 밝히고 있다고 말이다. 안타깝게도 두 노동자의 건강이 썩 좋지 않다고 한다. 지독했던 2018년의 혹한과 혹서를 맨몸으로 버텨냈으니 그럴밖에. 비록 작을지언정 하나둘씩 보태어진 촛불의 힘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이제 우리가 함께 불을 밝히자. 더 이상 노동자가 굴뚝에 오르지 않아도 되는 세상, 목숨을 걸고 곡기를 끊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위해.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은 굴뚝농성 408일째가 되는 날이다. 부디 예수께서 다섯 명의 노동자들에게 해방으로 찾아오시기를. 부디 파인텍 다섯명의 노동자들이 활짝 웃는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올 성탄에는 두 노동자가 선물 같이 이 땅에 내려오기를.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