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어(Essure)'는 바이엘(Bayer)사가 개발한 영구 피임기기다. 4cm 정도의 코일을 나팔관에 삽입해 염증과 흉터를 만들어 막는 것이 원리다. 미국의 많은 여성들이 산부인과 의사에게 이슈어 시술을 추천받았다. 간단한 시술이라 45분 만에 병원을 나올 수 있고, 수술 흉터가 남지 않고, 성공률은 99%라고 했다.
하지만 결과는 끔찍했다. 이슈어를 삽입한 여성들은 만성 통증, 과다 출혈, 고열, 두통, 심지어 자가면역질환을 겪게 됐다. 많은 여성들이 자살을 시도했다. 시술을 받고 임신한 사람도 많았다. (기존의 수술보다 피임 실패율이 7배나 높았다.) 이렇게 임신한 아기에게도 문제가 생겼다. 삽입된 철제 코일이 양막낭(amniotic sac)을 찢어 조산아가 발생했고 아기들이 죽었다.
의료기기 규제가 붕괴된 미국
다큐멘터리 <칼날 위에 서다: 첨단 의학의 덫>은 이슈어와 같은 비극을 만든 미국의 의료기기 허가 제도를 파헤친다. 사람들은 흔히 미국의 FDA라고 하면 깐깐한 허가 절차를 갖추고 있을 거라 믿고 있지만 실상은 달랐다. 의료기기 기업들은 로비를 통해 자신의 입맛에 맞는 규제완화 법을 만들었고, 기업의 관계자를 규제 기관인 FDA 임원으로 앉혔다. 또 의료기기 연구에 자금을 대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내도록 했다. 그 결과 이슈어는 짧은 기간에 엉성한 임상시험을 수행해 제출했음에도 FDA에서 승인을 받았다.
비단 이슈어 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코발트가 포함된 인공관절로 고관절 치환 수술을 받은 환자가 경련, 발작, 정신장애 등의 증상을 겪은 사례도 있었다. 한 의사가 이들의 혈중 코발트 농도가 정상인의 100배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고관절을 다른 재료로 교체하고 나서야 증상은 사라졌다. 인공관절에 사용된 코발트가 중금속 중독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재료는 미국에서 여전히 1000만 명 넘는 사람들에게 사용되고 있다.
코발트 인공관절은 이른바 '510(k) 방식'으로 FDA를 통과했다. 새 의료기기가 시중에 이미 나온 기기와 '상당히 유사'하다면 무조건 허가받는, 기업 로비로 만들어진 제도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98%의 의료기기가 510(k) 방식으로 통과된다. 기존에 나온 의료기기에 문제가 발생해 리콜되어도, 이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허가된 기기들은 쉽게 퇴출되지 않았다.
다빈치 수술로봇도 510(k) 제도를 이용해 FDA 허가를 받은 경우다. 미국에서 다빈치 로봇을 이용해 자궁절제술을 받은 여성들 중 수술 후 내장탈출(evisceration) 등 심각한 부작용을 겪은 사례들이 속출했다. 여성들은 '물 소리가 나더니 창자가 무릎 쪽으로 빠져나왔다', '화장실에 갔더니 대장이 90cm나 밖으로 나왔다'고 했다. 수술 부위가 터지는 이런 합병증 발생은 로봇으로 수술할 경우 3~9배나 더 많다. 엄격한 결과 검증 없이 '신기술'을 도입한 결과다.
검증 안 된 '혁신' 의료기기?
우려스러운 점은 한국 정부도 최근 의료기기 규제완화에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의료기기 허가 절차를 대폭 줄여 신기술 의료기기를 도입하는 것이 중요한 '혁신성장' 과제라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신의료기술평가'를 무력화하려 한다.
신의료기술평가란 의료기기를 사용한 의료행위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평가하는 절차다. 2007년에 제도가 도입된 이후 2016년까지 총 1800건의 의료행위가 평가됐는데, 연구결과가 부족하거나 안전성·유효성 미달로 퇴출된 것이 700건(약 40%)에 이른다. 만약 이러한 절차가 없었다면 국민들은 안전하지 않거나 효과가 없는 수많은 의료기기에 노출되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정부는 앞으로 정보통신·생명공학·로봇기술을 활용한 '혁신 의료기기'의 경우엔 연구 결과가 부족해도 혁신성 같은 '잠재가치'를 반영해 신의료기술평가를 통과시키겠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의료에서 '혁신'이란 무엇일까? 정부가 말하는 것은 기업의 시장 선점과 이윤창출을 위한 경제성이다. 하지만 의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는 첫째가 환자의 '안전'이고 둘째가 '효과'다. 그리고 이것은 충분한 연구를 통해 검증된 것이어야 한다.
ROSA SPINE(로사) 척추 로봇수술은 신의료기술평가의 역할을 보여준 분명한 예다. 로사는 미국에서 510(k)로 도입돼 한국에 건너왔다. 하지만 2016년에 한국의 신의료기술평가 위원회는 로사를 퇴출시켰다. 기존 척추수술과 비교해 방사선 노출량이 많고 수술 소요시간이 길다는 이유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듬해인 2017년 로사 제조사는 로봇 팔이 오작동을 일으켜 수술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긴급 리콜을 결정했다. 또 같은 기술을 이용한 로사 뇌수술의 경우엔 오작동이 사망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발표했다. 로사는 미국에서 허가됐다는 이유로 한국에 들어왔으나 신의료기술평가 제도가 제대로 걸러냈던 것이다. 만약 신의료기술평가가 없었다면 환자들은 비싼 가격에 긴 수술 시간 때문에 합병증 위험이 높은 치료를 받게 됐을 것이다.
반대로 다빈치 수술로봇의 경우에는 한국에 이 제도가 생기기 전에 도입되어 평가를 피할 수 있었던 사례다. 이 기기가 들어온 이후 병원들은 의사에게 인센티브까지 주면서 사용을 독려했고, 아시아 전체에 48대가 보급돼 있을 때 한국에 20대가 있을 만큼 경쟁적으로 도입되었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이 2010년 다빈치 로봇수술이 비용부담은 크지만 치료효과가 입증되지 않았고 환자 건강상의 위해도 끼칠 수 있다고 보고했지만 이미 도입된 로봇수술은 규제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신의료기술평가를 축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에 평가를 면제받은 의료기기까지 확대할 필요가 있다.
"기업들이 좋아하는 단어가 혁신, 혁신, 혁신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혁신이란, 새로운 무언가가 나왔을 때 그것의 장단점을 검증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이 혁신이에요. 검증이 안 된 거라면 그건 혁신이나 개발이 아니라 그냥 모르는 거에요." ('첨단 의학의 덫', 데버라 코헨 박사, 영국 의학 학술지 부편집장)
* (下)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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