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28일 4차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한 미래 담론을 제시해온 민간 싱크탱크 여시재 사이트에 "저출산은 되돌릴 수 없다, 재앙도 아니다"는 글(☞원문보기)이 게재됐다.
여시재의 정책이사이자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인 이원재 LAB2050 대표의 글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도발적인 주장이라는 평을 받으며 주목을 받았다.
필자는 이 글에서 지난 10여년간 출산율을 높이자고 쓰인 120여조 원이 아무 효과가 없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저출산은 처음부터 정책결정자들이 진정한 문제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출산율'을 핑계로 여기 저기 썼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심지어 필자는 저출산이 위험하다면, 그것의 주어는 국가이며 개인에게는 오히려 출산이 위험한 것이 사실이라는 점에서, 주어를 국가로 한 이야기를 개인에게 반복 해봤자 공감을 얻지 못한다고 일축한다.
필자는 "진실은 단 한가지다. 저출산 추세를 되돌려 생산가능인구를 늘리고 이를 통해 경제성장률을 높이겠다는 생각은, 틀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불가능해졌다"고 단언한다.
필자는 저출산이 문제가 아니라 고령화가 축복이 될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들어 놓아야 한다면서 '역동적 고령사회의 비전'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지식노동을 포함한 인간 노동의 상당 부분이 기술로 대체 가능해지는 4차 산업혁명 시대, 인구 절반 가까이가 연금생활자가 되는 초고령화 시대에 맞는 패러다임"이라고 낙관적인 전망까지 곁들였다.
필자는 "출산율 제고 목표는 일단 폐기해야 한다. 출산율을 높이지 않으면 공동체가 소멸한다는 식의 인식을 정책에서 지워야 한다. 대신 고령화가 진행된 상태에서도 사회 역동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야 한다. 그걸 전제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나아가 필자는 "4차 산업혁명 시대다. 기술도 기업 구조도 고용도 인구 구성도 모두 근본적 변화가 진행 중이다. 과거 패러다임으로 정책을 짜면 반드시 실패한다. 국가의 시각이 아니라 개인의 시각에서 정책을 짜야 하고, 기술 변화를 염두에 두고 활용하며 계획을 세워야 하며, 인구 구조가 변화해도 역동성이 유지되도록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면서 이런 비전을 가능하게 할 구체적인 '정책실험'도 제시했다.
바로 '보편적 기본소득제'다. 생계를 고용에만 의존하는 사회는 이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전제 위에 "모든 개인에게 조건 없이 생계가 가능한 소득을 분배하자'는 것이다.
<프레시안>은 그동안 보편적 기본소득제와 관련해 논쟁의 장을 열고 다양한 의견으로 풍성한 논의가 이뤄지기를 바라왔다. 마침 임운택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가 이 글에 대한 반론 성격의 기고문을 보내왔다. 임 교수의 글 또한 이원재 LAB2050대표의 글 못지 않게 상당히 논쟁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임 교수는 기본소득이 자본주의 현실에서 자본과 노동의 권력 관계를 바꾸는 동력이 될 것이라는 전제 자체를 부정한다. 그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보편적 기본소득을 주면 창의적 노동을 위한 종잣돈이 생기고, 자본에 대한 영구파업권을 획득할 수 있기에 새로운 세계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진단이 솔깃하기는 하다"면서도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자본과 노동의 권력 관계가 바뀌지 않는 기본소득은 수당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 글은 기본소득 주창자의 전제 자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반론이라기보다는 기본소득 회의론에 가깝다. 임 교수는 '자본주의 현실'로 볼 때 기본소득의 종잣돈 마련도 어려울 것으로 본다.
특히 4차산업혁명에 따른 생산성의 비약적 향상은 기대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인구변화의 대응전략으로 간주하는 것은 국내산업 현실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라고 비판했다.
나아가 필자는 인구변화가 거시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기본소득으로 해소하겠다는 논리도 일축했다. 양질의 일자리가 발생하는 여건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를 상수로 전제하면서 기본소득을 논하는 것은 우선 지속 가능하지도 않으며, 나아가서 자본주의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인식이라는 것이다.
<프레시안>은 4차산업혁명 시대의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 '기본소득'에 대해 더 많은 다양한 의견을 기다린다. 편집자
사회경제에 대한 경솔한 진단은 정책의 영혼을 잠식한다 – 인구변화에 대한 진지한 거시정책적 설계가 필요하다!
I. 문제인식
출산율 저하에 따른 인구감소와 사회의 고령화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우려는 세기말부터 지금까지 자본주의 주요국가들의 핵심적 고민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도 지난 2004년 노무현 정부에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출범시킨 후 3차에 걸친 저출산 기본계획(2006-2020년)을 세우고 작년까지 무려 126조 4000억 원에 달하는 비용을 쏟아부었다.
천문학적인 예산을 퍼부었음에도 참담하게도 합계 출산율 1.05명(2017년 기준)이라는 초저출산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자 이 정책에 관여한 전문가들조차 복지확대 중심의 저출산 정책에 대한 회의론을 제기하더니 급기야 최근에는 저출산은'재앙도 아니고' '되돌릴 수 없는' 자연적 상태로 받아들이자는 주장마저 등장하고 있다(이원재 LAB 2050대표의 여시재 기고문).
복지확대 중심의 저출산 정책이 문제였다는 진단은 비록 때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해법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그나마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그러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명작 <칠드런 오브 맨'>에 빅엿을 날리듯 출산이 답이 아니고 ,'4차 산업혁명 정책'과 '기본소득 실험'이 저출산과 고령화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줄 대안이라는 상상력은 '실험'이라는 겸손한 단서에도 불구하고 진단과 현실 간의 커다란 괴리감 때문에 지울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위원이 내놓은 진단으로 듣기에는 참으로 속 편한 소리처럼 들린다. 출산이 절대적 대안이 아니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는 있지만, 기술발전과 기본소득이면 유토피아를 열 수 있다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대해서는 무한대의 의구심이 생겨난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보기에 이러한 진단은 거시경제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안이한 전망처럼 보인다. 미래 경제 패러다임에 대한 추상적 담론은 필요하지만, 진보적(경제패러다임의 엄밀한 구분보다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고 시도한다는 의미에서 종종 이렇게들 쓰는 경우를 본다) 가치를 앞세웠으나 기존의 경제 현실을 무시한 전망은 정책대안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정부와 지자체의 정책을 실험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출산과 고령화라는 인구변화에 따른 거시경제의 대응전략이 어떠해야 하는지 짧은 지면에서나마 짚어보고자 한다.
II. 신성장이론에서 본 거시경제의 전망
국내 학계가 신자유주의자로 도배되고 비판적 경제학자들은 대부분 밀교 집단화되었는지 몰라도 소득주도성장론에 대한 치열한 비판과 비난이 난무하는데도 케인스주의의 한 유형인 이 입장을 앞장서서 옹호하는 경제학자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나마도 노동시장을 중심으로 소득분배율을 개선하고 수요중심의 경제구조, 대기업 중심의 수출주도적 경제구조를 바꾸어나가자는 최소공약수를 빼면 도대체 경제구조를 어떻게 바꾸자고 하는지 조망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이고,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남북경협이 희망의 등대 역할을 하는 믿기 어려운 도박수준의 경제 전망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케인스주의도 이러할 정도인데 마르크스주의를 들먹이는 건 아무래도 위험스러운(?) 일일 듯싶다. 그러나 마르크시즘에 대한 다양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사회를 유지하고 심지어 자본주의를 넘어가기 위해서 발전(이를 설명하는 마르크스의 '자본축적론'과 '재생산이론'은 주류 경제학의'성장론'에 대응하는 개념)이 필수적이라는 최소공배수(마르크스의 혁혁한 공적은 그러한 발전 혹은 경제성장 과정이 전혀 민주적이지 않기 때문에 노동과정부터 거시경제 운용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정치적 개입과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한 점이다)는 다수의 경제이론이 수용하고 있는 것이므로 최근 노벨경제학상을 탄 폴 로머의 신성장이론(New Growth Theory)의 입장에서 인구변화에 따라 거시경제적 전망을 어떻게 바꿔 봐야 할지 설명해보고자 한다.
신고전경제학의 대표적 이론인 솔로우(Solow) 성장모델에 의하면 노동과 자본의 증대를 경제성장의 주요 원인으로 간주하고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기술발전은 외생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였다. 단순화하면 인구증가가 1% 멈추면 GDP 성장률도 1% 하락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폴 로머 등의 신성장이론은 기술발전을 외생적이 아니라 내생적 요인으로 간주한다. 이에 의하면 새로운 지식의 발전은 R&D를 위해 투입된 자원(자본과 노동)의 수준에 따라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기술발전을 위한 또 다른 결정 요인은 국민경제에서 도달된 지식수준이다. 인구 감소는 동일한 조건 속에서 R&D인력의 감소로 이어지고, 이는 재차 기술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경제모델에서 모든 노동자가 동등한 생산성을 가지는 것으로 전제되었다면, 신성장이론은 개별적 생산요인으로 인적자본의 도입을 통해서 교육과 직업훈련이 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기술진보와 인적자본을 분리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인적자본은 총체적 학습능력 내지는 습득한 개인의 지식을 포함하고, 이때 기술발전과는 달리 인적자본의 활용과정에서 치열한 경쟁이 존재한다.
국민경제가 현재의 (기술적) 지식을 얼마만큼 활용할 수 있느냐는 인적자본에 의해 정의된다. 높은 수준의 인적자본 구성 혹은 인적자본의 빠른 구성비는 경제성장을 높이는데, 왜냐하면 신기술의 사용을 통해 노동요소의 생산성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 모델을 확장하여 노동요소의 척도로 노동시간 단위로 누적된 연간 노동량을 고려하면 변형된 전체 경제의 생산기능이 도출된다. 앞서 설명한 간략한 내용을 중심으로 경제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인을 조망해보면 <표 1>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도식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인구변화에 따른 경제성장의 재구성을 위해 필요한 정치와 경제의 개입공간을 살펴보고자 한다.
<표> 신성장이론에서 본 경제성장의 주요 요소
* 표는 필자가 재구성
출산율과 고령화라는 인구학적으로 제한된 연간 노동량의 감소를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정책적으로 출산율 증대나 이주민유입을 통한 인구 감소의 제동, 노동력 인구의 증대, 구조적 실업의 축소, 평균 연간노동시간의 효율적 연장 등의 다양한 수단을 통해 효과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모든 이슈가 사회적 갈등이 내장된 것들이다. 이를 지지하는 구체적 정책적 과제로는 첫째, 가족과 직업의 양립가능성을 지원하는 것이다. 다양한 대안가족(남녀 간의 '법적 결합' 이외의 다양한 형태의 가족)의 수용과 함께 '아이 혹은 직업경력'이라는 선택이 아닌 '아이와 직업경력'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도록 국가가 적극적 지원을 하는 것은 물론 중견기업 이상의 기업이 적극적으로 호응을 하도록 정책적 유도가 필요하다.
둘째, OECD국가의 일반적 흐름처럼 은퇴 시기의 연장이다. 중고령 노동자의 암묵지(tacit knowledge) 활용은 4차 산업혁명의 시기에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셋째, 트럼프의 반이민정책, 영국의 브렉시트를 비롯 서유럽 각국에서 반이주정책이 노골화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이주정책은 현실적 선택지이다. 갈등이 표출된 현실을 뒤집어 보면 신자유주의에 의해 몰락한 중간층과 노동자계급의 분노가 쏟아지고 있음에도 어느 나라든 그만큼 인구감소의 현실이 절박하다는 소리가 된다.
심지어 노동운동의 형성기부터 국제적 수준의 노동자 연대를 표방한 노조가 오늘날 반이주정책의 선봉에 서고 신자유주의자들이 오히려 이주정책의 옹호자가 되는 역설의 시기에 자본의 효율성에 이주정책을 무방비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다. 기본권과 사회권의 보강으로 이주민들과 함께 공존하는 보다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사회를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
넷째, 전반적인 생애노동시간의 확장을 사회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연금수령시기의 연장, 건강을 이유로 직업 생활을 단절하지 않도록 의료정책을 개선해 나가고, 교육 및 직업훈련 기간을 유연하게 조정(형식적 교육기간의 탈피)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급격한 기술의 발전에 따라 직무내용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인적자본의 향상을 위한 교육 및 향상훈련의 필요성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이는 세칭 4차 산업혁명 혹은 디지털 혁명의 시대의 총아라고 하는 데이터 과학자의 양성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평균적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 직업훈련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교육과 직업훈련 장소의 현실은 4차 산업혁명의 그것과 너무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상당수가 교사보다는 학원이나 인강의 스타강사를 신뢰하고, 졸업생 90% 이상이 다시 학력차별을 절감하며 대학으로 진학하는 마이스터교, 자격증 취득과 토익점수에 목을 맨 학생이나 강의실과 연구실에 있기보다는 국회, 각종 정부위원회 참석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교수들이 있는 대학교, 돈만 내면 장롱면허증을 따는 민간 직업훈련기관, 스마트 팩토리 사업의 일환으로 정부로부터 받은 지원금으로 자동화 기계나 들여놓을 생각을 하는 대한민국의 중소기업, 4차 산업혁명의 총아랍시고 정부지원금 받아 VR과 AR 교육을 몇 개월 시키고 대부분 취직도 못시키거나 기껏해야 웨딩촬영 1인 사업을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교육과 직업훈련 현실이라는 것을 미래학자들만 모르고 있는 것일까?
국내에서 수없이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언급되고 있는 독일의 산업 4.0, 즉 산업 디지털화 전략은 자동화가 아닌 인간과 기계의 협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그 핵심은 결국 교육과 직업훈련의 투자에 집중되고 있다. 고용없는 성장의 시대에 출산은 포기할지언정 교육과 직업훈련마저 이 상태로 유지한다면 경제성장은 어떻게 이루어내고, 기본소득의 종잣돈은 어떻게 확보할지 암담할 뿐이다.
노동과 자본이라는 투입요소의 생산성은 기술진보를 통해 배가될 수 있다. 사라져가는 일자리가 경제성장을 통해 부분적으로 보충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기술진보의 범위는 R&D영역의 사람에게 달려있으므로 전반적으로 숙련 노동력(전문 기술직뿐만 아니라 생산영역에서의 숙련 기능인 포함)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혁신성장은 학문의 세계에서 경제영역으로 기술이전을 지원하고 심화하는 과정에서 가능하므로 기술과 과학이론의 상용화와 이를 지원하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할 것이다.
노동요소의 부족(인구변화)은 경향적으로 실질적 총임금의 증가와 자본에 의한 노동의 대체현상(자동화 포함)을 가속화할 것이다. 그러나 생산요소는 시장에서 자신의 한계 생산성에 따라 지불되므로 경활인구의 감소와 자본투입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자본요소라는 한계생산성이 하락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간단히 말해 노동력의 감소가 자동적으로 자본투입으로 보완되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인구변화가 자본금과 투자수익에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정확하게 가늠하기 어려우므로 이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III. 4차산업과 기본소득의 '복락원'에서 포기된 '모두를 위한 노동'을 되살리는 노동의 미래에 대한 치열한 담론이 필요
앞서 신성장이론의 이해방식에 맞춰 인구변화에 따른 거시경제의 대응전략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성장과 분배가 경제의 동형체라고 할 때 오늘날 고용과 분배의 영역은 이전보다 복합적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술진보가 성장의 내생적 요인으로 평가되면서도 인적자원과의 상관성이 높아지면서 단순히 과거 1930-40년대의 가치론에서 파악하듯 '인적자본'을 '가치의 실질적 포섭'(즉, 노동력을 전적으로 자본에 의한 착취의 대상이라고 봄)이라는 범주 속에서만 이해하기는 어려워졌다.
<표 1>에서 보듯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로 압축되는 인구변화와 그로부터 초래될 결과가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아니다. 정치와 경제는 실제로 다양한 조치와 대책을 강구하고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나사 몇 개를 돌리는 방식으로는 곤란하다. 일례로 AI로 극대화된 4차 산업혁명의 생산성이 우리를 조만간 '멋진 신세계'로 안내하고 기본소득의 '복락원'을 실현시킬 일은 없어 보인다.
4차 산업혁명 혹은 좀 더 현실적인 개념으로 표현해서 '산업과 노동의 디지털화' 내지는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이 향후 생산성의 비약적 향상에 기여할 가능성은 크지만 이를 현재 수준에서 국내에서 상수로 전제하고 인구변화의 대응전략으로 간주하는 것은 국내 산업 현실에 너무 무지한 결과로 보인다.
'3정(정위치, 정품, 정량) 5S(정리, 정돈, 청소, 청결, 습관화)운동'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를 내고 RFID 바코드 하나 없이 물류창고를 운영하는 그나마 괜찮다고 하는 국내 중소기업 현장을 방문해보면 이런 생각이 얼마나 착각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산성 요인이 이런데 인구변화가 거시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기본소득으로 해소하겠다는 논리는 더더욱 해괴하게 들린다.
거시경제적 차원에서 보면 기본소득은 기본적으로 확보된 유효수요이므로 크게 보아 넓은 의미의 케인스주의라고 할 수 있다. 양질의 일자리가 발생하는 여건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를 상수로 전제하면서 기본소득을 논하는 것은 우선 지속 가능하지도 않으며, 나아가서 자본주의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인식처럼 들린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자본주의는 오늘날까지 끊임없는 수요부족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잘 알려진 바처럼 이에 대한 자본주의의 대응방식은 국가채무, 시장의 세계화, 가계부채 증대로 대응해왔고, 국내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본소득의 주창자들은 기술진보가 20세기의 완전고용 상황이 오늘날 '실낙원'에 불과할 만큼 회의적인 세계의 전망에서 출발하는 듯하다. 기술발전이 모두를 위한 노동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회의론이다.
실제로 영미식 디지털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그러한 측면이 있기도 하다. 적지 않은 미국의 억만장자들은 기본소득을 지지하면서 이러한 방식이 자본주의의 평화와 유지에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오바마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냈던 라이시 교수는 향후 1/3의 상징분석가의 엄청난 생산성이 2/3의 노동자(불안정 고용자와 실업자)를 먹여 살리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처럼 디지털 전환으로 새로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내려는 프로젝트가 가동되는 곳도 있는 만큼 기술혁명이 자본주의에 미치는 효과와 결과는 아직 열린 상태이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을 논하기 전에 노동의 미래에 대해 더욱더 적극적으로 고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공평한 보편적 기본소득을 주면 창의적 노동을 위한 종잣돈이 생기고, 자본에 대한 영구파업권을 획득할 수 있기에 새로운 세계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진단이 솔깃하기는 하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자본과 노동의 권력 관계가 바뀌지 않는 기본소득은 수당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조련된 고릴라'(그람시)에게 주는 쌈짓돈에 불과하다. 여전히 누군가는 경제를 계획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설계를 할 텐데, 실질적인 교육과 훈련을 통해 경제의 각 단위로 개입하지 않는 한 기본소득의 희망하는 세계는 정말 소설처럼 '멋진 신세계'로 우리 앞에 다가오지 않을까 우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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