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5일 박근혜 정부 출범식에 맞춰 많은 언론이 송원근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작성한 '경제민주화 정책 평가와 전망'의 내용을 요약 보도했다. 송 위원은 "경제민주화가 최종적으로 도달할 곳은 관료주의"라며 "민주화라는 이름의 또 다른 전체주의가 나타날 우려가 있다"고 했다.
한경연은 지난 총·대선 과정에서 국민적 화두였던 경제민주화를 비판하는 데 많은 공을 들여왔다. 송 위원의 논문은 그 종합판이라 불러도 무방해 보인다. 특정 정책이나 제도에 대한 반대와는 별개로, 한경연은 경제민주화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세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집적물이 지난해 9월부터 11월까지 '경제민주화 시리즈'라는 타이틀을 달고서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내놓은 23편의 칼럼이다. 이 칼럼들의 다수는 경제민주화를 사회주의, 노예로 가는 길, 관료독재 등의 용어로 공격하고 있다.
이렇게 격한 용어로 경제민주화를 공격하는 인식의 기초는 무엇일까. 가장 도드라진 것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다. "경제와 기업은 민주화의 대상이 아니다"는 좌승희 서울대 교수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민주주의는 경제 문제에 적용될 수 없다?
필자들은 우리가 익히 아는 '1인 1표'의 민주주의 원리와 '1주 1표'의 시장경제의 원리를 거론하는 것을 넘어 더 멀리 나간다.
"'경제력 집중'과 '정치력 집중'은 범주가 다른 집중이다. 정치력 집중은 시민들의 자유를 위협하지만, '경제력 집중'은 이와 무관하다."(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민주주의는 많은 사람들이 합의를 볼 수 있는 문제들에 적용되어야 하고, 특히 그런 문제들에 국한하여 적용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재산권을 보장하는 문제는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문제다."(황수연 경성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이런 주장은 경제민주화의 개별 정책들과 제도로 칼끝을 겨눈다. 여야 정당과 대선후보들의 당론과 공약에 반영된 경제민주화 정책들은 민주화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정치 또는 국가의 부당한 시장 개입이라는 것이다. 김이석 시장경제제도연구소 부소장은 칼럼의 제목을 <하이에크의 '노예로 가는 길'과 경제민주화>로 잡았다. 경제민주화가 시민들을 '노예'로 만들 수 있다는 암시다.
정치와 경제의 분리라는 주제에는 학문적 역사가 있다. 근대의 산물인 경제학의 수립은 다른 학문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탐구의 영역을 발견함으로써 가능했다. 구체적으로 근대 경제학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정치학 전통과 단절함으로써 성립했는데, 그 때까지 정치학은 국가 통치의 정당성이나 작동 원리의 탐구에 집중했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정치학 전통과 단절하여 (정치)경제학이 발견한 경제의 영역이란 인간 종의 번영과 물질생활에 작용하는 '자연의 법칙'이었다고 말한다. 빈민 구제에 반대하며 요셉 타운센드가 쓴 '구빈법에 관한 논고'나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은 바로 이 자연의 법칙이 작동하는 경제의 왕국을 그리고 있다. 이 왕국에서는 어떤 섬에 풀어 놓은 염소와 개떼가 먹이사슬 관계에 따라 개체수에서 균형을 이루고(타운센드), 인간의 번영은 식량 공급의 제한에 따라 조절된다(맬서스).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 균형과 조정을 이루는 이 세계는 당연히 인간의 의지나 도덕관념으로부터 독립해 있다. 즉 정치로부터 절연된 곳이다.
오늘날 주류 경제학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신고전파 경제학은 더욱 철저히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추구하였다. 데이비드 오렐 교수는 <경제학 혁명>에서 학문적 위상을 과학으로 정립하려 했던 주류 경제학의 기원과 발전의 역사를 잘 설명하고 있다. 수요-공급의 법칙부터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금융공학까지, 주류 경제학은 자신의 학문적 지위를 물리학이나 수학과 같은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정치·민주주의·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시장'을 옹호했다. "인간은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빌프레도 파레토)"는 언명은 주류 경제학의 자의식을 압축하고 있다.
허구 위에 구축된 경제학
경제학은 출발부터 허구 위에 구축되었다. 시장경제의 태동기에 폭발적으로 넘쳐나는 빈민들은 기독교 가부장 전통의 나라 영국에서 분명 곤혹스러운 존재들이었다. 경제학은 가난과 부가 이토록 선명히 대비되는 세계를 자연의 질서로, 곳곳에 굶주림과 헐벗음이 넘쳐나는 사회 문제를 식량공급이라는 자연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으로 전통의 짐에서 벗어났다. 즉 경제학은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 사회적, 정치적 존재라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요-공급의 법칙이나 한계효용이론이 과학의 상대성이론이나 수학의 미적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경제학이 현실의 경제를 설명하는 대신 불가능한 수많은 가정과 전제 위에 학문적 성과를 쌓아 올렸다는 뜻이다. 경제학은 국가 규제, 관료의 시장 개입, 독과점, 노동조합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장이 최적의 자원 배분을 이룰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합리적 기계로 가정된다.
경제학이 가정하는 것은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확하다. 현실에는 국가와 관료, 독과점, 노동조합이 존재하며, 인간은 경제행위를 할 때조차도 이기적이거나 합리적인 존재만은 아니다. 경제학은 과학이 아니라 "~하다면, 시장이 자원을 최적으로 배분할 것"이라고 말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하다면'이라는 가정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정치와 경제의 분리라는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은 경제학이라는 학문 차원을 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질서 속에서도 충분히 검증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균형과 질서를 찾는 세계는 역사적으로 시장의 자율성이 가장 높았던 두 번의 시기에 결정적으로 파국을 맞았는데, 우리가 잘 아는 1929년의 대공황과 2008년의 세계금융위기가 그것이다. 이 때 위기를 수습한 것은 시장이 아니라 국가였다.
노회찬 전 의원의 의원직 상실을 불러온 삼성 X파일 사건을 보면, 재벌은 국회의원, 관료, 판검사 등을 손아귀에 주무르며 국가기구를 장악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대가를 지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총·대선 과정 역시 정치와 경제의 분리가 현실에서 얼마나 황당한 주문인지 이해할 수 있다.
경제민주화가 국가적 의제가 되어 공론의 장의 형성되고, 다양한 이해집단 사이에 공방이 이뤄지고, 여야 정당과 대선 후보들은 많은 경제민주화 정책들을 당론과 공약의 형태로 반영하여 최종적으로 유권자의 선택을 받았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거쳐 합의된 당론과 공약이 지켜진다면, 즉 민주주의가 실현된다면, 전체주의, 노예제로 간다는 것이다! 스스로 놀란 듯, 한경연의 필자들은 이제 민주주의와 국가의 권능을 공격하는 것으로 나간다.
"민주주의는 demons(군중)이 지배하는(crat) 체제인 것이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숙명일 수 있다, 군중은 '증오와 분노'에 의해 흔들린다."(조동근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정치권력이 무슨 근거로 어떤 도덕적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공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경제 문제에 적용될 수 없는 민주주의는 빈껍데기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라는 독트린이 민주주의를 얼마나 위협하는지 증언하는 생생한 사례다. 저 악랄했던 아파르트헤이트를 끝내면서 ANC(아프리카민족회의)는 백인 정부와의 정권 이양 협상에서 경제 문제와 정치 분야를 분리하는 우를 범했다. 그리하여 새 정부가 건드리지 말아할 경제정책들의 목록이 만들어졌다. 무역정책, 중앙은행의 지위, 토지 개혁, 공장에 대한 보조금 지급, 에이즈 치료제의 무상 공급, 최저임금 인상 등 많은 핵심 경제정책에서 새로운 정부는 손발이 묶여 버리고 말았다. 절대 다수 흑인들의 열망과 민주주의가 사실상 좌절된 것이다.
정치와 경제의 분리라는 문제는 한미FTA 발표 1주년을 맞는 우리 사회에서도 진지한 논의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투자자국가소송(ISD), 렛칫 조항 등 한미FTA의 많은 독소조항들은 민주주의로부터 경제 문제를 분리시키는 장치들이다.
지난 1세기를 돌아보면 인류가 만들어온 경제 질서와 시장제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자유시장체제에서 케인스주의 복지국가 체제로, 다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흘러왔다. 그리고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계기로 또 다른 경제 질서에 대한 모색이 활발하다. 이것은 경제와 시장이이 무슨 신비한 법칙에 따라 스스로 작동하는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가는 질서라는 것을 웅변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그 질서를 다수의 요구와 합의에 따라 만들어가는 체제이고 이념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민주주의는 대다수 구성원의 복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경제 문제에 가장 깊고 넓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경제의 영역에 적용될 수 없는 민주주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