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행정부가 출범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내각 인사에서 드러난 특징은 관료의 약진, 중용이다. 국무총리를 포함해 총 18명의 국무위원 가운데 3분의2에 이르는 12명이 관료 출신 또는 국책연구기관 출신의 넓은 의미의 관료들이다. 이른바'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 내각'이라 부를 만하다. 지금까지의 인선내용으로 보면 데모크라시(democracy)가 아니라 뷰로크라시(bureaucracy)가 지배하고 있다고밖에 할 수 없다.
현대 민주주의는 행정권력과 경제권력의 영향력과 불평등 효과를 제어할 수 있는 시민통치(civilian control)의 원리로 이루어진다. 시민통치를 단순히 군부통치로부터 벗어나는 정도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장관과 같은 행정부의 인선 역시 시민통치의 원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장관의 자리는 관료와 완전히 다른 원리로 기능하는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장관은 행정부처의 수장이지만 철저히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다.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장관이란 정치적 권력관계의 대표자"로서 "그는 이 권력관계에서 나오는 정치적 기준을 대변하고, 그에 따라 자기 휘하 전문 관료들의 제안을 검토해 그들에게 적절한 정치적 성격의 지시를 내리는 일을 업무로 삼고 있(는)"사람으로 정의한다(막스 베버, <막스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폴리테이아), 141쪽).
베버가 논지를 전개하는 데 있어 영국의 의회주의와 미국의 정당정치는 이념형적 모델로서 언제나 독일과 비교된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 독일에서 정치가 작동하는 데 의회의 무력함과 과도한 관료지배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의회주의의 패러다임으로서 영국은, 일찍이 의회 권력의 발전 과정에서 단일하고 통일적인 리더십을 추동해 왔고, 그리하여 의회가 왕권을 압도하면서 최고 권력을 갖게 되었다. 한 사람의 의회 최고 지도자가 내각의 수장이 되고, 직업적인 행정 관료들을 통제 지휘하면서 정책 결정권을 갖는 최고 권력기관이 된 것이다.
그에 비해 제2제국에서 의회주의의 발전은 영국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사실상 카이저에 의해 임명되는 각료와 그들로 구성된 내각은, 선출된 의회 대표가 아니라 직업적인 행정 관료들에 의해 충원되었고, 또한 이들은 의회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었다. 권력의 소재, 즉 정책 결정권은 사실상 의회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독일에서는 선출된 대표, 또는 직업적 정당정치인과 선출되지 않은 행정 관료들 사이의 정치적 힘의 관계가 압도적으로 후자인 행정 관료에게로 기울어 있었다."(최장집, <막스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 1부 강의, 58~60쪽).
막스 베버에 따르면 장관 등 국무위원을 관료의 영향력 하에 두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닌 일종의 비스마르크 체제라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육군장관을 지낸 정치가 클레망소 역시 "전쟁은 너무 중요해서 장군들에게 맡겨 둘 수가 없다"라는 유명한 격언을 남겼다. 그는 전쟁의 업무조차 군사관료가 아니라 시민통제의 원리를 따라야 함을 역설했다.
▲ 취임사를 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프레시안(최형락) |
전문가주의, 기술관료적 경영주의의 문제
전문가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는 인사의 문제도 크다. 결국 그것은 사적 이익집단의 대변자들이 공익 자산을 약탈하는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을 높인다. 정부 내지 정책이라는 공공재를 전적으로 이들에게 맡긴다면 민주주의를 할 이유가 없다.
"민주주의는 시민 참여의 효과에 기초를 둔 체제이지, 통치자의 전문적 자질에 기초를 둔 체제가 아니다. 정치 참여를 통해 소수만이 아니라 다수가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시민으로 행동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희망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했듯이 그것은 소수의 탁월함에 의존하는 공적 결정보다 다수에 의한 결정이 공동체에 더 유익하다는 믿음 위에 서있다. 민주주의에서 전문가의 정치적 역할은 일반 시민의 역할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의 집합적 지혜를 뒷받침하는 데 기여할 때 가치를 갖는다. 전문가가 최선의 정책을 할 수 있다는 가정 역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박상훈, <민주주의의 발견>(후마니타스), 136쪽).
전문가의 결정이 특별히 보통사람들의 결정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은 과연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이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도덕성을 갖추고, 평등의 원칙에 따라 어느 한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공평무사하게 다룰 수 있을까?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 누구도 정부를 운영할 만큼 충분히 많은 지식을 가질 수는 없기에, 무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통령‧상원의원‧주지사‧판사‧교수‧박사‧기자 같은 사람들도 우리 나머지 사람들보다 단지 조금 덜 무지할 뿐이다. 전문가조차도 어느 한 분야에 관해서는 전부를 알고자 하면서도 그 밖의 많은 것들에 대해서는 무지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일 뿐이다."(샤츠슈나이더, <절반의 인민주권>, 219~220쪽).
사실상 전문가들이란 오히려 잘못된 신념의 노예가 되기 쉽다. 미국의 수학자 J. C. 케메니는 원자력 문제에 관한 대통령 자문위원장 직을 마친 후"나는 계속해서 종교적 믿음 내지 때로 광신적인 믿음을 가진 과학자들과 싸웠다. 그들은 단지 약간의 가능성밖에 없음에도 틀림없다고 말함으로써 편견 없는 조언자가 아니라 편견의 옹호자가 됐다."고 토로한 바 있다.
박근혜 행정부가 관료나 전문가를 우대함으로써 정부운영에 있어서 기술관료적 경영주의(technocratic managerialism)의 가치를 강화하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기술관료적 경영주의란 관료주의의 목적합리성에 현대 기업조직의 이윤 극대화를 위한 경영 원리를 결합한 개념이다. 이는 수단적 가치와 효율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조직운영의 원리다. 문제는 이러한 기술관료적 경영주의가 권위주의 정치체제와 친화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성장, 효율성, 기술관료적 경영주의는 '박정희 모델'의 핵심이었다. 이는 사회의 다양한 이익 갈등에 기초해 이를 조정하고 타협해야 할 뿐 아니라, 효율성보다는 갈등의 조정과 통합을 중심원리로 하는 민주정치의 특성과는 조응하기 어렵다.
선거, 그리고 정치적 책임성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란 주권자로서의 인민이 스스로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선출한 대표를 통해 통치되는 체제다. 주권자와 통치자가 분리됨으로써 현대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가 어떻게 유권자의 이익과 요구를 위해 복무하도록 만드느냐는 것이다.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서 책임성의 의미가 부각된다.
민주주의에서 책임성은 선거 때만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선거가 끝난 후에도 지켜져야 하는 원칙이다. 책임성의 문제는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다. 2007년 프랑스의 사르코지는 압도적인 득표로 대통령에 선출된 직후 총선에서도 승리했지만 야당인 사회당이 예상보다 덜 패배하자 그 결과에 반응했다. 사회당 출신을 내각에 기용한 것이다. 2005년 독일선거에서도 예상과 달리 기민당과 사민당의 득표나 의석 차이가 크지 않아 대연정을 둘러싼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드레스덴에서의 지역선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거 결과 기민당이 이기자 그 직후 사민당의 슈뢰더는 이를 유권자의 평결로 받아들여 기민당 중심의 정부를 구성했다. 선거에 반응하는 것이야말로 대의제 하에서 민주주의의 작동방식이다.
지난 대선에서 야당은 근소한 차이로 졌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각료 임명에서 야당을 지지한 시민들의 선호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각료 인선뿐만이 아니다. 선거공약은 임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폐기될 처지에 놓였다. 선거공약이 정책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여러 반대에 부딪혀 수정되거나 폐기 될 수는 있다. 하지만 핵심 공약들이 임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국정과제에서 사라지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당선만 될 수 있다면 무슨 행동, 무슨 공약이든 다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의 선거는 책임으로부터 방면된 권력자를 뽑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그때 선출된 권력자는 막스 베버의 말대로, 특정 후보자 개인이 정당이라는 매개 없이 유권자에게 직접 호소하는 데마고그(demagogue) 이상일 수가 없고, 사실상 군주를 민주적으로 선출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된다. 그렇게 해서 데마고그가 정부가 된다면, 사적으로 가까운 측근과 전문가집단, 나아가 관료에게 의존하는 통치는 필연적이다."(최장집, <경향신문> 칼럼 "정당정부의 길", 2012/09/25).
'정당 정부'가 답이다
▲ 최재천 민주통합당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
민주주의 원리에서 말한다면'정당 정부의 원리'가 실현되어야 한다. '정당 정부'란 정당이 정부가 되고 책임 정치의 토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대통령은 새로이 정부를 구성할 때부터 정당의 적극적인 역할을 수용해 책임 내각을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국무총리와 내각 인사를 결정할 때도 대통령 개인의 비밀스런 결정이 아니라 집권당과의 협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의 구성과 운영에 있어서 당이 중심이 되는 것이다. 집권당이 정부 운영의 책임 있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때 당을 대표하는 내각은 선거 공약을 이행해야 할 정책 실행의 책임을 지게 된다.
'정당 정부'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집권당은 시민 대표로서의 책임 있는 기능을 하지 못하고 권력자 개인에 의해 선별적으로 동원되는 인사풀 집단에 불과하게 된다. 결국 각료는 대통령의 선택을 받은 정치인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정당의 대표로서의 정치가가 국무위원으로 참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대통령이 집권당을 배제하고 개인적으로 각료를 결정한다면 정당은 왜 있어야 하는가? 이런 조건에서 새누리당은 집권당이라 할 수 있는가? '정당 정부'의 길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길이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가 아니라 '새누리당 행정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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