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인권을 위한 개입', 침략을 정당화하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인권을 위한 개입', 침략을 정당화하다

[인문견문록]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유럽적 보편주의>

얼마 전 '예멘 난민'에 대한 지지와 반대로 온 나라가 들끓었다. 심지어 난민 문제를 포함한 중동의 많은 문제가 이슬람의 문제로 환원되어 설명하는 글이 나돌아다녔다. 흥미롭게도 이슬람 비하 글에 달린 댓글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혐오감을 여과 없이 내비치고 있었다. 보수 기독교인은 기독교의 관점에서, 지식대중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중동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내었다. 우리가 중동과 비서구세계를 판단할 때 판단의 근거로 삼는 기준은 우리 자신의 것일까? 아니면 서구가 주입한 것일까?

우리는 유럽을 포함한 서구만을 공부해왔고 서구의 가치만을 추구해왔다. 그런데 정작 서구는 우리의 예상대로 '보편주의'에 충실할까? 유럽이 자랑하는 보편주의가 사실은 보편을 가장한 일종의 지적 장삿술이었음을 주장하는 책이 있다. 세계체제론의 대가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책 <유럽적 보편주의>(김재오 옮김, 창비 펴냄)다. '유럽적 보편주의'는 오리엔탈리즘과 과학주의로 무장하고 단선적 발전사관을 주장하며 근대성을 지고의 가치로 둔다.

▲ <유럽적 보편주의>(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김재오 옮김, 창비 펴냄) ⓒ창비
유럽적 보편주의는 식민 지배 초기부터 생겨났다. 월러스틴의 책은 남미 원주민을 지극히 사랑한 가톨릭 신부 바르똘로메 데 라스 까싸스(Bartoleme de Las Casas)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1510년 남미 최초로 신부 서품을 받은 라스 까싸스 신부는 에스파냐(스페인)와 교황청에 실질적으로 노예제와 다를 바 없던 '엥코미엔다(Encomienda) 제도'를 없앨 것을 요구했다. 그의 주장은 쎄뿔베다(Juan Gines de Sepulveda) 신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다. 쎄뿔베다 신부는 원주민은 사악하고 잔인하기에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우상 숭배와 인신 공양을 막기 위해서는 백인의 처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현재 개념으로 말한다면 우상 숭배는 기독교 전파, 인신 공양 방지는 현지인 보호를 의미한다. 옳은 말인 듯 들리지만, 당시의 맥락에서 결국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쎄뿔베다 신부의 주장을 간단히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데 있다.

쎄뿔베다 신부의 주장에 대해서 월러스틴은 이렇게 평한다.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이 주장은 근대세계의 문명화된 지역이 비문명화 된 지역에 대한 이후의 모든 개입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기본적인 것들이다. 타자의 야만성, 보편적 가치에 위배되는 관습들의 근절, 잔인한 타자 속의 무고한 양민 보호, 그리고 보편적 가치의 순조로운 전파 등이 그것이다." 쎄뿔베다의 논리는 이후 수백 년 동안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유럽중심주의'의 탄생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유럽중심주의는 여러 변주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20세기 중후반 전 세계적 규모의 탈(脫)식민운동을 통해 제3세계 국가들이 대규모로 등장했다. '기독교 복음 전파'라는 명분만으로는 제국주의적 통제를 정당화하기 어려워졌고, 좀 더 중립적인 개념인 식민지 열강의 야만 지역에 대한 '문명화 사명'이라는 명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기독교 전파와 문명화 사명을 대신하는 새로운 수사학적 개념이 등장한다. '인권'이다. 민주주의에 기초한 '개입할 권리'를 주창한 사람은 '국경없는의사회' 창시자 베르나르 꾸시네(Bernard Kouchner)였다. 그는 국제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별 국가의 주권이 제한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권은 탈식민시대에 새로운 의미와 힘을 지니게 되었다. 서구가 내세우는 인권에 대해 강희원 경희대 교수는 논문 '인권과 옥시덴탈리즘'(2009)에서 "인권의 역사적인 실상을 보면, 서유럽에 기원을 두고 있는 인권이 이념적으로는 보편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서유럽 해당 국가 밖에서는 물론이고, 그 국가 내에서조차 과거부터 현재까지도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던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보다 정확히 하면, 서구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인권이란 자신들의 식민지배나 제3세계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인권을 위한 개입이 사실은 강자의 이익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월러스틴은 "개입은 실제로 강자에 의해 전유된 권리"라고 단언한다.

서구가 자신들의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독교 선교→문명화 사명→민주주의'로 이름을 바꾸어왔지만, 한 가지 난점은 남는다. 월러스틴은 이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문제는 한쪽이 개입할 때 당연히 전제하는 다른 쪽의 야만성이다. 그(꾸시네-필자주)가 말하는 우선적인 문제는 이러한 논쟁에서 누가 야만인이냐는 결코 전적으로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개입은 타자의 야만성을 전제로 수행된다. 하지만 타자의 야만성을 자명한 것으로 상정하는 서구의 시각이야말로 야만적이다.

야만적 타자가 존재해야만 개입이 정당화될 수 있다. 타자의 야만성을 무엇으로 판단할 것인가? 유럽중심주의는 타자를 야만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역사학자 임상우는 논문 '동아시아에서 유럽중심적 역사관의 극복'(2008)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럽중심적 역사관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유럽의 역사가 세계 역사발전의 보편적인 방향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고이다." 유럽중심주의는 결국 '근대성'으로 수렴된다. 대의제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가 사회가 도달해야 할 최종 목표로 제시된다. 역사가 단선적으로 이해되면서 타자에 대한 평가도 가능해졌다. 유럽적 관점으로 보면 세계의 대부분은 개입해야만 하는 야만의 땅이 되었다.

유럽중심주의는 '근대성'을 신성불가침의 절대적 이념으로 삼았는데, 무슨 의도였을까?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면서 인도나 중국과 같은 고급 문명 세계까지 식민지배체제 안으로 포섭되었다. 이들을 식민지배체제로 묶어두기 위해서는 강제력 이외의 방식이 필요했다. 월러스틴의 말이다. "설명(식민지배 정당화에 대한 설명. 필자 주)의 핵심은 대단히 단순하다. 고대 그리스·로마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유럽'문명'만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흥성한 관습, 규범, 관행의 잡탕에 붙이는 포괄적인 용어인 '근대성(modernity)'을 산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구가 식민지를 착취하는 것은 제국주의가 사악해서가 아니라 발전된 근대성의 결과라는 설명이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유럽의 진보와 비유럽의 정체가 동전의 앞뒷면처럼 따라 나온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이런 주장을 전개한 일군의 학자들을 '오리엔탈리스트'라고 한다. 식민지배의 이데올로그였다. 문명비판론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의 역할에 방점을 찍는다. "오리엔탈리즘을 식민지배의 합리화라고 단순히 말하는 것은 식민주의가 사후보다는 사전에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정당화되는 정도를 무시하는 것이다."

식민지배자들의 보편주의를 가장한 오리엔탈리즘, 근대성을 빙자한 지배 논리에 대한 즉각적 반발이 비서구사회로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먼저 유럽이 성취했다는 보편적 근대성은 유럽만이 아닌 모든 문명의 공통된 열망이었고 어느 정도 수준에서는 우리도 이미 근대성에 도달해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런 방식의 전형은 동양사가 나이토 고난의 '송 이후 근세설'이나 이를 차용한 요나하 준의 주장이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또한 '중층 근대성'을 주장하는 김상준 경희대 교수도 여기에 속할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런 주장을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이라고 불렀고, 월러스틴은 '반유럽중심적 유럽주의'라고 칭한다. 유럽이 도달한 근대성의 특성을 유럽이 아닌 비유럽에 그대로 대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옥시덴탈리즘적 주장의 맹점은 오리엔탈리즘이 발생한 '맥락'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노동분업에 기반한 세계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특정한 인식론이다. 근대성을 탈맥락적으로 해석하는 옥시덴탈리즘은 올바르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대응이라는 것이 월러스틴의 주장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적 맥락인 자본주의체제의 특징에 대한 월러스틴의 설명이다. "그중(자본주의적 세계체제. 필자 주) 가장 중요한 것은 핵심부 생산과정과 주변부 생산과정 사이의 기축적 노동분업이고 그러한 생산과정들은 국가 간 체제 내부에서 작동하는 주권 국가들의 네트워크에 의해 관리된다. 그러나 이 체제는 또한 그것이 잘 작동되도록 하기 위한 문화적-지적 발판을 필요로 한다. 이 발판은 세 가지 주요한 요소를 갖고 있다. 보편주의적 규범과 인종주의/성차별주의적 관행의 역설적인 결합, 중도자유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지구문화, 그리고 거의 주목받은 바 없으나 상당히 중대한, 이른바 두 개의 문화 간의 인식론적 구분에 기반한 지식구조가 그것이다."

유럽적 보편주의의 초기형태였던 오리엔탈리즘은 1945년 이후 비서구가 국제무대에 전면 등장하자 서서히 힘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이제 오리엔탈리즘은 좀 더 세련되어야 했다. 그리고 과학적 보편주의가 전면에 등장한다. 과학주의는 학문의 영역에서 가치와 윤리를 소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월러스틴은 "힘 있는 사람들이 인문주의 지식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과학자들을 훨씬 상위에 놓이도록 함으로써 과학자들이 그 사회적 싸움에서 이기게 되었다"고 말한다.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은 대부분 과학진영으로 넘어갔다. 이런 과학주의의 승리는 학문의 영역에서 가치평가나 감정이입에 기반한 이해와 통찰의 기능을 저하시켰다. 월러스틴은 "윤리적 비판의 가능성과 객관성을 평가절하함으로써 윤리적 비판으로부터 강자들을 지켜주었다"라고 과학주의를 평한다. 월러스틴은 오리엔탈리즘과 과학주의를 유럽적 보편주의의 핵심요소라고 평한다.

서구의 석학들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철두철미 오리엔탈리스트인 경우가 많다.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희재 옮김, 김영사 펴냄)은 수많은 '과학적' 자료로 채워져 있다. 이슬람과 중국·북한 유교 세력을 두려워하라는 제사장의 계시로 가득 찬 이 책은 '사회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아시아는 유교적 가족주의 때문에 '고신뢰사회'를 형성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주장 역시 '과학'이란 외피 속에 숨어 있다. 후쿠야마는 고신뢰사회로 미국·독일·일본을 저신뢰사회로, 중국·한국·남부 이탈리아를 제시한다. 한국 지도층의 친일문제가 사회적 신뢰 관계를 훼손한 핵심 원인임에도 그는 개의치 않는다. 1960년대 경제학자 월트 로스토우(Walt Rostow)의 '경제발전단계론'은 식민지에서 막 벗어난 저개발국에 장밋빛 미래를 약속했지만, 그런 미래는 오지 않았다. 경제학이 과학이라기보다 사회주의로 기울던 비(非)서구를 낚는 미끼였던 것이다.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의 경우는 아예 노골적으로 근대 제국주의를 옹호한다. 세련된 오리엔탈리즘인 과학주의에 대한 월러스틴의 평가다. "나는 서구보편주의들 중에 최종적이고 가장 강력한 것인, 과학적 보편주의가 그 권위에서 더 이상 명명백백한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지식의 구조는 전체로서의 근대세계체제와 똑같이 무질서와 분기의 시기로 접어들었고 그 결과는 마찬가지로 결코 단정할 수 없다."

유럽중심주의는 모든 역사가 발전해갈 필연적인 길이 있다는 역사주의(historicism)로 뒷받침된다. 역사주의는 유럽중심주의를 강력하게 만든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이다. "역사주의의 발전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제국주의 사이의 연관 관계에 대해 근본적인 수준에서 인식론적 비판이 수행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영토와 주민을 축적의 대상으로 만들고, 경제를 통제하며, 역사를 합병하고 동질화시키는 제국주의를 비판하기 어려운 것은 서구 제국주의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같은 반(反)명제를 흡수해버릴 만큼 역사주의가 확장되고 발전되었기 때문이다."(김은중 논문 '권력의 식민성과 탈식민성'(2008)에서 재인용)

유럽적 보편주의의 무서운 점은 유럽적 보편주의가 식민지배와 상관없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유럽적 보편주의는 남겨진 장소에서 지식권력으로 작동한다. 남미연구자 김은중은 논문 '권력의 식민성과 탈식민성'에서 지식권력의 식민성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식민주의를 누락시킨 채 근대성을 이해하는 것은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이다. 지식권력의 중심에서 식민주의는 식민성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식민성은 식민주의와 다르다. 식민주의가 특정한 역사적 기간을 지칭한다면, 식민성은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권력 매트릭스이다. 즉 식민성은 근대성의 과거가 아니라 근대성의 '다른 얼굴'이다." 식민지배가 종결되어도 남겨진 식민성은 지식권력의 형태로 그대로 유지된다.

식민성에 대한 진중한 사유는 필요하지만, 식민성에 대한 지나친 경계가 사유 자체를 침윤시킬 위험도 존재한다. 탈식민에 과도하게 몰입하다 보면 반(反)근대성의 유혹에 빠지기 쉬워진다. 자본주의 질서 이전의 제국을 재구축함으로써 유럽적 세계질서를 극복하자는 왕후이, 가라타니 고진, 이병한의 대응 역시 일정 정도 유혹에 미혹된 경우다. 이런 주장은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 이후 형성된 문제의 해결책을 자본주의 이전의 구조로 해결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작아진 우리에 실망하는 사람들은 옛것을 돌아본다.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옛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이민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논문 '세계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유럽중심주의 사관의 극복을 위하여'(2002)에서 이런 전통의 발명에 우려의 눈길을 보낸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환원적 통합을 목표로 한 전통의 발명을 크게 경계한다. 전통의 발명이란 낡은 사회조직이 마모되어 사회적 압력이 증대할 무렵 고색창연한 전통만이 부여할 수 있는 권위와 정당성에 기대어 사회를 유지하려는 전략이다." 전통의 발명은 원래 서구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저항하는 쪽도 이 점에서 닮아간다. 이민호 교수는 이런 방향에 대해 혹독하게 일갈한다. "민족주의(전체 문맥상 민족주의 대신 '의고주의'가 더 정확하다. 필자 주)의 전체화 담론 역시 오리엔탈리즘과 마찬가지로 닫힌 사회로의 길을 예비할 뿐이다."

서구의 세계지배를 위한 도구인 유럽적 보편주의를 넘어서는 이념적 대안은 없을까? 월러스틴은 '보편적 보편주의'를 대안으로 주장한다. 보편적 보편주의에 대한 월러스틴의 설명이다. "보편적 보편주의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본질주의적 성격 부여를 거부하고,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모두를 역사화하며, 이른바 과학적인 것과 인문학적인 것을 단일한 인식론으로 재통합하고 약자에 대한 강자의 개입을 위한 모든 정당화 근거들을 고도로 객관적이고 지극히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준다." 보편적 보편주의에 대한 설명이 좀 어렵다. 풀이하자면 동양은 본질적으로 이러하고 서양은 본질적으로 그러하다는 본질주의적 관점을 벗어나자는 이야기다. 또한 어떤 사회에서 본질적 요소로 보이는 보편적 요소조차 그 사회의 누적된 경험의 결과로 역사화시켜 보자는 말이다. 쉽지 않다. 모든 존재는 존재의 근거인 리(理)를 분유하고 있다는 성리학의 이일분수(理一分殊)적 세계관과 유사하지만 성리학의 국가 조선은 모든 인간은 동일한 본성을 가졌다는 믿음과 신분은 나뉘어야 한다는 믿음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모든 국가나 사회가 그 나름의 역사적 정당성이 있다는 주장은 외부로부터의 개입을 제한시킬 수는 있지만 내부로부터의 개혁동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보편적 보편주의의 두루뭉술함을 의식해서인지 월러스틴은 새로운 인식론적 틀인 '배제되지 않는 중도(unexcluded middle)'를 제시한다. 보편과 특수 모두를 놓치지 않는 균형 잡힌 관점을 가지자는 이야기다. 쉽지 않을 것이다. 중도란 늘 말하기는 쉬우나 구체적 현장에 적용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중도란 현장에서 즉시 사용할 수 있는 구체물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깨달음이다. 월러스틴의 배제되지 않는 중도는 사상가 백낙청의 '변혁적 중도주의'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책 <유럽적 보편주의>에는 '배제되지 않는 중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거의 없다. '배제되지 않는 중도'라는 개념의 소개에 거치고 있다. 왜 그럴까? 월러스틴의 중도는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제시되었지만, 사실 인식론적 대전환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식론적 전환은 거대한 작업이다. 전환은 몇 사람에 의해 완수될 수는 없지만 그 몇 사람이 나서지 않으면 시작도 되지 않는다. 주광순 부산대 교수는 논문 '유럽중심주의 비판을 위해'(2009)에서 서양적 인식론과 동양적 인식론을 대조 분석하고 있다. 주광순은 이렇게 설명한다. "플라톤과 이데아론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은 서구형이상학의 기원이 되었다. 이들은 동일성과 통일성을 중심으로 존재자들 각각의 정체성을 밝히고, 전체를 하나의 계층으로 일정한 체계로 엮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동일성과 통일성의 철학은 또한 근대에서 유럽중심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기반이 되기도 했다." 주광순에 따르면, 사유체계로서의 유럽중심주의는 플라톤 이래의 본질주의에 기반해 있다. 레비나스는 이런 서양 철학을 '동일성 철학'이고 타자를 배제하는 전체주의라고 비판했다. 주광순은 유럽중심주의 극복을 위한 대안적 사유로 용수의 '상의성 철학'을 소개한다. 모든 존재가 서로에 의존해 존재한다는 용수의 사유야말로 사물의 실체성에 기초한 서양적 사유를 넘어설 수 있다고 판단한다. 유럽중심주의는 서양적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주광순은 말하고 있다.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려는 또 다른 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운동에 대해 깊게 천착해온 김은중은 논문 '권력의 식민성과 탈식민성'(2008)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부딪히고 있는 난제는 자본주의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유의 위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시장 사회의 작동을 정지시키거나 전체주의적 경제 체제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에 대한 대안적 사유이다. 즉 대안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연구자 김은중은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가?

김은중은 대안적 사유로서 철학자 김영민의 '일리 철학'을 소개한다. 김영민은 이치의 절대성을 강변하는 진리, 이치의 철저한 지역성과 특수성을 외치는 무리(無理)에 대해 일리(一理)의 철학을 말한다. 김영민은 일리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일리란 다양한 이치의 망 속에서 주변 자리를 밝힘으로써 자신의 자리(입장)를 분명히 하겠다는 뜻이며, 그 자리들의 위계를 따지기 이전에 자기 자리가 짚어지고 역사를 얻어가는 과정에 유의한다는 취지며, 마침내 인식을 넘어서는 성숙의 경지를 얻겠다는 결의인 것이다."(김은중의 논문 '권력의 식민성과 탈식민성'에서 재인용)

유럽중심주의 극복과 관련한 월러스틴, 주광순, 김은중, 김영민 등의 생각에 대해서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유럽중심주의를 문제라고 인식하는 지식인조차 많지 않다, 게다가 극복 방법을 생각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제시하는 극복 방식에 대해서 필자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유럽중심주의를 새로운 사유방식으로 돌파한다는 생각 자체가 너무 순진한 태도가 아닐까? 관계성의 철학에 매몰되어 이들이 놓치는 사실이 있다. 관계성의 철학을 자신의 습(習)으로 체화해야 할 당사자는 우리가 아니라 서구다. 서구가 해야 할 몫까지 우리가 떠안아야 한다는 의무감이야말로 전도된 생각이 아닐까?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