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재벌 손자에게 아동수당을 주어야 하나?"
"금수저에게 아동수당을 줄 순 없다. 예산의 낭비다."
"무상복지하면 나라 망한다!"
"보편적 복지는 포퓰리즘이다."
이는 다름 아닌 자유한국당이 1년 전에, 아니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강력하게 주장했던 내용들이다. 이랬던 한국당이 갑자기 입장을 바꿨다. 재산이 많고 적음을 떠나 아동수당을 대상자 모두에게 지급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기존의 연령 기준인 6세 미만을 12세까지 확장하고 액수도 기존의 월 10만 원에서 점차 30만 원으로 늘리자고 했다. 또 출산장려금으로 2000만 원을 제시했다.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꾼 것이다. 가히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유한국당이 복지 공세를 펴는 이유
어째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어떤 관점으로 이번 사안을 지켜봐야 할까? 결론적으로 먼저 나의 견해를 얘기하자면, 이는 역사적 필연이다. 우리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가야하기에 이유가 어찌되었건 나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는 실제로 실현되기만 한다면 대한민국 복지국가 발전사에서 중요하게 기록될만한 의미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번 자유한국당의 제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음 세 가지 포인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자유한국당에서 이런 변심이 일어난 원인을 살펴보자. 직접적 계기는 자신들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해보고자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에 의뢰했던 연구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의 제목은 '보수정당의 위기와 재건'인데, 여기에는 ‘자유한국당이 지난 선거들에서 강경한 대북안보 정책을 고수하고 대부분의 현안에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을 띄우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고, 여성과 복지 이슈에서 불충분하고 매력이 없다’라는 지적이 담겨 있다. 또 과거 선거에서 박근혜를 찍었다가 지난번엔 문재인으로 돌아선 이탈층이 중도 이념 성향인데, 이들에게 다가서려면 '보수적 외교·안보 쟁점보다는 출산, 육아, 교육, 주택, 경제성장 등의 영역에 포용성, 사려 깊음, 진정성을 갖고 임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이번에 표방된 자유한국당의 복지 공세는 서울대 보고서의 이런 충고에 대한 과감한 응답인 셈이다. 그러나 이번 태도 변화의 보다 본질적인 원인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보편적 복지의 발목만 잡으려고 했던 지난 시절에 대한 전략적 반성이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다. 기득권층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시혜적 입장의 잔여주의를 고수하려는 선별적 복지 입장에서 그동안 보편적 복지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나 뒷북을 치곤했던 그들의 과거를 정치적으로 돌아본 것이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기존의 정치 행태를 되풀이 하다가는 완전하게 망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생겼다고 본다.
물론 이런 정책 방향이 아직 한국당의 의원총회를 거친 것이 아니기에 전체 의원들의 뜻으로 볼 수도 없고, 또 이후 내부의 분란이 일어날 수도 있으므로 확정적인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또 일자리 예산이나 남북 경제협력 예산을 깎아서 이들이 요구하는 복지 예산을 만들자는 주장 등을 보면 진정성이 의심되는 꼼수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한국당 내부에 위기의식을 갖고 뭔가 정치적 변화를 시도해 보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 않고는 기존의 입장을 이렇게 파격적으로 뒤집으면서까지 당론이라고 국민들에게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 복지'가 시대정신인 이유
둘째, '보편적 복지와 복지국가' 담론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이고, 이미 이것이 한국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 보편적 복지라는 개념이 학문적으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한 사건은 2010년의 경기도 무상급식 이슈였다. 당시 경기도의회 다수당인 민주당의 대표의원이었던 필자는 무상급식의 한복판에서 모든 과정을 겪었다. 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은 당시에도 아동수당의 보편적 적용을 반대했던 작년 한국당의 논리와 똑같은 이유를 들며 보편적 무상급식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어 보편적 무상급식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보편적 복지'라 함은 적용 대상을 소득이나 재산 등의 조건으로 선별하지 않고 대상이 되는 구성원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첫째, 선별적 복지는 이번 아동수당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수혜 대상을 선별하기 위해 많은 행정비용이 들어간다. 불필요한 비용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의하면, 아동수당 지급에서 소득하위 90%를 가려내기 위해 드는 행정비용이 1626억 원 정도였고, 100% 모두에게 아동수당을 다 지급할 때 추가되는 상위 10%의 예산이 1687억 원이라고 한다. 소득상위 10%를 배제하는 데 드는 해정비용이나 이들 모두에게 아동수당을 지급하는 비용이 같다니, 이건 참 잘못된 짓이다.
둘째, 복지 수혜의 대상자와 비대상자를 나누면 낙인찍기와 함께 수치심 문제가 발생한다. 게다가 본인이 대상자임을 입증하기 위해 수십 가지의 재산 관련 증빙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불편함도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형평성 시비가 일어나고 다양한 민원이 발생한다. 셋째, 세금 납세자와 복지 수혜자가 일치하지 않으면 복지 제도 전반에 대해 불만을 갖는 계층이 생겨나고, 이는 세금을 기피하려는 반복지국가적 현상을 야기한다. 복지는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하고, 여기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부자는 세금을 누진적으로 공정하게 더 내면 된다. 결국, 보편적 복지는 시장 소득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을 사회적으로 재분배하는 효과가 발생해서 양극화와 소득불평등을 완화시킨다. 이는 사회안전망을 만들어 각종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효과가 있고, 경제적으로는 수요를 유발하여 경기 활성화에도 기여한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세계적으로 보편적 복지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무상급식 이후 박근혜 정부에서 소득에 관계없이 보육료를 지원하는 정책을 펴서 보편적 복지의 영역을 넓혔다. 그러나 당시에는 보수여당이 보편적 복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정부 정책으로 시행되다 보니, 이후 다른 복지 정책에서는 여전히 보편적 복지의 발목을 잡는 관행이 되풀이되는 한계가 있었다.
보편적 복지가 시행될 수 있는 주요 영역으로 급식, 보육, 아동수당, 교육, 의료, 요양, 기초연금 등을 들 수 있다. 그동안 지난한 여야 간의 정치적 논쟁과 국민의 의식 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 급식, 보육, 아동수당의 영역이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는 제도로 정착돼 가고 있다. 가히 역사적인 진전이다. 대한민국의 복지국가 발전 과정에서 보편적 복지의 기본 틀이 형성돼 가고 있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행복지수를 자랑하는 북유럽 복지국가에 근접하려면 의료와 요양, 그리고 대학 등록금 등 교육 및 노후소득보장인 연금 분야에서도 보편적 복지가 실현돼야 한다. 현재 소득하위 70%에만 적용되는 기초연금은 많은 노인들의 원성을 듣고 있다. 과도한 행정비용과 불공정·불합리로 인해 많은 어르신들이 고통 받고 있기에 우리나라 여야 정치권이 지혜를 모아 하루빨리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세수 문제의 해결도 함께 말이다.
자유한국당은 스웨덴 보수정당의 경험에서 교훈 얻어야
마지막으로 중요한 관점 포인트는 보수정치도 보편적 복지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들고, 장차 그렇게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라는 사실이다. 민주주의적 선출 과정을 통해, 그것도 진보정당이 44년간이나 집권을 한 나라가 있다. 스웨덴 사회민주당 이야기다. 사민당은 '국가가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국민 모두를 가족처럼 돌보아야 한다'는 철학을 펼치면서 1932년 총선에서 승리했고 첫 집권을 하게 된다. 사민당은 집권 초기부터 복지 예산을 점차 확대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노인연금, 의료보장, 교육, 아동수당 등의 강력한 복지 정책 드라이브를 펼쳤다. 여기에 국민들은 열광했다. 정치가 자신의 삶을 안정적이고 행복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복지국가 정치는 사민당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 지지로 이어졌다. 1932년부터 1976년까지 44년 간 연속 집권했던 사민당은 1976년과 1991년 두 차례 보수당에 3년씩 잠시 정권을 내주었지만, 2006년까지 사민당 정권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위기가 찾아왔다. 2006년 보수우파연합에 패배했고, 2010년에 또 다시 패배한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의 보수정당과 보수언론들은 "스웨덴 국민들이 복지보다 효율을 택했다", "북유럽 복지국가의 실패다"라는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분석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거짓이었다.
스웨덴의 우파연합은 한때 사민당의 복지국가 노선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각을 세우는 선거 전술을 구사했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항상 패배였다. 그래서 스웨덴의 보수정치는 노선과 전술을 아예 바꾸었다. 자신들이 집권해도 복지국가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더 효과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공약으로 선회했던 것이다. 사민당과의 차이라면 "법인세나 소득세를 약간 내리겠다"라든가 "병가수당의 조건을 좀 더 엄격히 하겠다"라는 것 정도였다.
2006년 선거에서 스웨덴의 우파연합이 승리할 당시 국내총생산 대비 세금 부담률은 48.8%였다. 그리고 이들이 집권 후 정책을 수정한 2008년도의 세금 부담률은 47.2%였다.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효율적인 복지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재정을 크게 손댈 수 없었고, 만약 우파 정부의 정책이 복지국가의 축소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스웨덴 국민들의 동의를 얻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세금 부담률은 그다지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스웨덴의 보수정당들도 복지국가를 지지한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지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복지국가 제도에 근본적 메스를 가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정당에 대한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과 다름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지금도 북유럽에서는 복지국가 정책이 견결하게 유지되고 있다.
여야 정치권의 복지국가 정책 경쟁을 기대하며
자유한국당도 시대정신인 복지국가와 보편적 복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잘 인식하길 바란다. 이번에 내놓은 아동수당에 대한 파격적 제안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정책 선점을 위한 정책의 남발만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진정성을 보여주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윤소하 정의당 원내대표도 지적했듯이 자신들이 낸 법인세, 소득세, 유류세, 담뱃세 인하법안이 26조 원의 감세를 야기할 텐데, 이에 대한 답변을 제대로 해야 한다. 김성태 원내대표가 발표한 복지 정책의 강화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은 진정성을 가지고 아동수당 확대 등의 정책 제안에 따르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민주당 및 다른 야당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미 지난 며칠 동안을, 복지 확대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써야할 황금 같은 시간을 정치투쟁을 하느라 낭비하고 말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얼마 전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포용국가론을 주창했다. "국가가 국민의 삶을 전 생애에 걸쳐 책임지고,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개인이 일 속에서 행복을 찾을 때 우리는 함께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바꿔야 합니다. 사회안전망과 복지 안에서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공정한 기회와 정의로운 결과가 보장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국민 단 한명도 차별받지 않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함께 잘 사는 포용국가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며, 우리 정부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입니다." 이는 보편적 복지를 기본으로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한국형 복지국가의 길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적폐 청산과 새로운 나라를 염원했던 촛불혁명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정책의 도입이 가능한 시기이다. 정부와 여야 정치권이 저출산 극복을 위한 복지 정책의 중요성을 공감한 특수한 시기이기도 하다. 야당이 아동수당과 저출산 문제의 긴급한 해결을 위해 자존심을 꺾고 정부와 여당의 입장에 동의한 이때가 바로 복지 정책을 힘차게 강화할 적기이다. 민주당과 진보진영도 '복지 정책의 강화'라는 방향성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을 정책적으로 채워내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국민행복의 한국형 복지국가를 위한 중장기적 방향 설정, 설득력 있는 현실적 재원 마련 계획, 그리고 우리 사회의 희망찬 미래상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복지국가를 위한 여야 정치권의 정책 경쟁이 항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복지국가 정치 시대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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