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은 3년째 동결 상태다. 회사에 노조가 있지만 '단체협상' 개념이 정립되지 않아 이를테면 명절 상여금도 '윗사람들' 기분에 따라 나오는 수준이다. 김 씨의 동료인 A씨는 지난해 6월 육아휴직을 신청했다가 '퇴짜'를 맞았다. '남녀 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육아휴직을 신청할 경우 사업주가 1년까지 허용해야 하고 신청자에게 불리한 처우를 하지 못하게 돼 있지만, A씨는 "무급 휴직을 하라"는 권유를 받아야 했다. 김 씨는 당시 노조에서 회사 1층에 대자보까지 붙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A씨는 '유급' 육아휴직을 받긴 했지만, 그 사건 이후 누구도 육아휴직을 신청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아빠 육아휴직은? 언감생심이다. 사정이 이러니 야근과 주말 근무를 밥 먹듯이 해도 통상임금의 150% 수준으로 받아야 하는 '시간외 수당'을 신청할 엄두도 못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심지어 '시간외 수당'을 어떻게 신청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회사에 관련 '시스템'이 없다. 이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김 씨는 '저녁이 있는 삶'이 간절하다. 김 씨가 다니는 회사는 새누리당이다.
새누리당 사무처에도 노조가 있다. "우리 사회는 노·사 간의 불균형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자살이 잇따르고 있으며, 서민들의 고통이 가중되는 것 또한 현실이다. 우리 새누리당 사무처 노조는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피땀 흘려 일하는 평범한 노동자들의 인식과 가치를 공유하며, 우리 일터에서부터 민주적이고 정당한 약자의 목소리가 소외되지 않는 상식적인 노사관계를 이뤄내고자 한다"고 현 상황을 인식하는 노조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노동자들을 두고 "그게 박근혜 당선인과 무슨 상관이냐"고 한 당 고위 관계자들에게 새누리당 직원들의 이런 작은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을 정도다.
▲ 새누리당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이 지난해 10월 15일 오전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대선필승결의 사무처 월례조회'에 참석, "이런 분위기로 필승할 수 있습니까"라며 당직자들을 호통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당직자 직원들은 열악한 처우를 감내하고 있다. ⓒ연합뉴스 |
집안이 엉망인데 밖에서 큰소리치면 누가 믿을까?
'박근혜 정권'을 만들어낸 새누리당의 사무처 노조가 지난 17일 성명을 냈다. 노조가 요구하는 교섭을 당이 회피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 경우에 사측 교섭 대표는 새누리당 사무총장이 된다. 친박계 '실세'로 통하는 서병수 사무총장이다.
"새누리당 사무처 당직자들은 그동안 18대 대통령 선거의 승리를 위해 아무런 조건 없이 헌신해왔다. 지난 3년간 우리는 임금을 동결해왔고, 비대위 시절에는 일체의 휴가조차 반납하며 당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19대 총선, 18대 대선을 달려오며 우리는 오로지 당과 국민을 위한 일념으로 노조 차원의 요구를 접고, 대의에 충실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도 사무총장은 선거가 끝나자 사무처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서병수 총장은 "성명이 나온 다음 날(18일) 노조를 만났다. 실무적인 일들이 있어서 실무자들과 노조 간부들이 논의한 뒤 2월 중순쯤 다시 얘기해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당시 노조 측과 서 총장의 '테이블'이 마련된 후 나흘이 지난 22일 몇몇 조합원에게 경과를 물었다. "아직 아무런 상황 변화가 없다. 답답하다"는 말이 돌아왔다.
박근혜 당선인은 대선 과정에서 경찰 기본급을 공안직 수준으로 인상하고, 휴일·야간 근무 수당 인상도 공약했다. 군인들의 월급도 대폭 올라간다. 그런데 정작 새누리당 사무처 직원들의 급여는 3년째 동결이다. 야간 근무 수당은 "어떻게 신청하는지 모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신청하는 시스템이 통째로 없는 게 문제"라는 말이 나오는 수준이다.
육아휴직 제도 공약은 더 거창하다. 육아휴직을 초등학교 3학년 자녀까지 확대하겠다고 공약했다. '아빠의 달'을 도입해 남성 육아휴직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새누리당 사무처 직원들은? 육아휴직에 대한 단체협약 자체가 없어 누구도 육아휴직을 사용하겠다고 말을 꺼내지 못하는 시스템이다. 박근혜 당선인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차별을 없애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공약했지만, 사무처 당직자 중 20%에 가까운 인원이 현재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박 당선인의 공약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법을 새로 만들어야 할 경우도 생긴다. 그때 새누리당 사무처 직원들은 법안 기안에 동원되거나, 만들어진 법안을 두고 "이렇게 좋은 법안이 나왔다"고 홍보해야 한다. 연봉 몇 년치를 모아야 살 수 있는 고급 세단을 매일 수백 대 씩 만드는 하청 노동자의 심정처럼, 사무처 직원들은 자신이 다루는 '정치적 언어'들, 법률적 언어'들이 어느 순간 "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박 당선인 본인이 약속한 수많은 '행복' 공약들이, 정작 '박근혜 당선'을 위해 휴가까지 반납하고 뛰었던 '식구들'에게 언감생심이라면, 전국의 유권자들이 박 당선인의 공약을 믿을 수 있을까? 집안이 엉망인데, '다 잘살게 하겠다'고 밖에서 큰소리치는 가장의 모습이 겹친다. 사무처 직원들의 처우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박 당선인의 공약 이행에 대한 믿음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만약 노조의 요구가 받아들여진다면 답답하고 보수적이던 새누리당의 '당풍'에도 건전한 바람이 일 수 있지 않을까?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했다. 박근혜의 '제가'를 보면 '치국'을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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