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적 움직임이 있긴 하지만 인간의 많은 행동에는 특별한 동기가 숨어 있다. 동물의 행동은 주로 생존에 대한 욕구로부터 출발한다. 동물의 일종인 이상 인간의 행동도 생존의 욕구를 피할 수 없다. 의식주와 같은 물질 없이 인간은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행동이 단지 생존에 대한 욕구만으로 촉발되지 않는다. 비록 초라하지만 인간은 정신을 보유한 좀 더 고차원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표현했고, 근대철학은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 곧 이성의 위대함을 노래했던 것이다. 물질적 존재인 것에 틀림없지만 물질로 환원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은 복잡한 존재다. 이러한 정신으로부터 관념이 나왔으니 인간은 실로 물질과 관념의 앙상블이다.
유물론자들이 그토록 희화화해 온 관념이 없었더라면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복잡하고 심오한 철학적 논쟁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내가 집에서 키우며 매일 보는 부엽이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녀석은 우리 집에서 아들처럼 키우는 풍산개인데 먹고 노는 것 외 별 생각이 없다. 그러니 예술과 문학은 고사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관념'도 없다. 이러한 관념을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는 대다수 철학자와 달리 진화경제학자 소스틴 베블런(Thorstein B. Veblen)은 그것을 자연과학 곧, 진화생물학으로 설명한다.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어버이본능, 자기고려본능, 한가한 호기심본능, 제작본능, 그리고 모방본능 등 다양한 본능들이 선택되었다. 그러한 인간의 본능들은 식물의 굴성(屈性), 동물의 조건반사나 인간의 무의식적 반응과 달리 지적이며 의식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베블런 진화경제학에서 본능은 자립성향의 뿌리, 곧 인간행동의 일차적 동인이다. 베블런에 의하면 본능은 "본유적이고 영속적인 인간성"이며 인간의 행동에 목적성과 의도를 부여한다. 따라서 인간의 본능적 행위는 목적론적이며 의식적이다. 다양한 본능들과 그 고유한 역할들은 최근 진화심리학이나 인지과학 등을 통해 속속 입증되고 있다.
이러한 본능은 예술, 문학, 기술, 과학과 같은 관념을 창조한다. 이러한 관념의 결과로 우리는 아름다움과 안락함, 그리고 학습의 즐거움을 누린다. 나아가 본능에 따라 인간은 문화와 도덕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관념들의 결과에 따라 판단하고 실행한다. 관념은 경제활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베블런은 인간의 사유습성(habit of thought)과 문화가 경제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 최초의 경제학자에 속한다. 예컨대 많은 소비자들이 경제적으로나 소비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사회적, 문화적으로 소비한다. 곧 '유물론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관념론적으로 소비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많은 이들이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통 넓은 청바지를 장롱에 쳐 박아 두고 값비싼 스키니바지를 사 입는다. 화폐와 같은 물질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원치 않는 사회적 이목을 피하고 싶으며, 집단으로부터 배제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관념은 물리학적 토대보다 더 튼튼한 생물학적이고 심리학적 동기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의 관념의 뿌리는 매우 튼튼하다 못해 본질적이다. 관념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며 자립의 기초일 것이다. 우리의 행동은 바로 이 관념에 의해 촉발되며 그것에 의해 행동의 방향이 지도된다. 나아가 관념에 의해 행동의 목적과 방식도 마련된다. 따라서 관념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행동은 '인간답지' 못할 뿐 아니라 효과적이거나 효율적이지도 못하다. 극단적으로 말해 관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인간은 진정한 의미의 행동을 취할 수 없다.
인간은 물질 그 자체에 따라서만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물질을 조달하고 소비하는 '방식'에 따라서도 행동한다. 이처럼 결과물 그 자체보다 그것을 공급하고 수요하는 방식과 수단을 따진다는 점이 인간과 동물의 변별력적 장치일 것이다. 경제학은 물질의 생산, 분배, 소비를 포함하는 경제활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조달하고 분배하며 소비하는 방식에 대한 관념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것이 이른바 경제학파(school of economics)로 구체화된다. 대부분의 학문이 그렇지만 경제학만큼 학파의 성격이 뚜렷한 분야도 없다. 그것은 경제학이 무엇보다 인간의 좋은 삶은 물론 생존과 과시, 지배관계에서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물질과 관련되기 때문이며, 그것의 학파에 따라 그 물질을 생산하고 분배하며 소비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마르크스경제학은 공동생산과 공동소비의 방식으로 물질을 관리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시장은 궁극적으로 폐절되어야 한다. 반면 애덤 스미스로부터 출발한 후 밀턴 프리드먼으로 진화한 신고전학파경제학은 오히려 순수한 시장메커니즘의 방식을 신봉한다. 현재 주류에 속하는 이들에게 시장에 대한 인위적 개입은 사악하다는 관념이 매우 굳건하게 유지된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 이후 등장한 케인즈경제학은 시장은 필요하나 정부에 의해 적절한 방식으로 통제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겐 시장이 하인으로서는 훌륭하지만 주인으로서는 끔찍하다! 20세기 말 이른바 세계화와 지식기반경제라는 새로운 질적 변화에 즈음하여 일단의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경제활동 방식을 고안해내기 시작하였는데 '진화경제학'이 그것이다. 소스틴 베블런과 조지프 슘페터로부터 출발하는 이들은 전통적인 '생산의 3요소'보다 지식, 그리고 '효율적 배분'보다 혁신적 방식으로 생산을 꾸려나가면서 정부는 물론 다양한 비정부적 방식으로 시장에 개입하고자 한다.
경제학은 기본적으로 먹고사는 것과 그 방식에 관한 문제를 연구한다. 그러니 경제학은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다른 사회과학에 비해 경제학의 실천적 성격은 한층 강하다. 이런 이유로 국가정책에서도 경제정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고, 사람들도 경제와 경제정책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갖는다. 이 경우 노동자와 서민들은 마르크스경제학이나 케인즈경제학 나아가 진화경제학의 관점에 관심을 가질 것으로 기대되지만 기업가나 지배엘리트계층은 신고전학파경제학에 대해 호감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관심들은 '정당'이라는 형태로 집결된다. 각각의 경제학파는 정당의 이런 관심에 대해 고유한 관념, 곧 경제학이론을 제안한다. 공산당은 마르크스경제학으로부터 경제정책의 방향을 얻어내고 보수정당은 신고전학파경제학의 관점에 따라 생산, 분배, 소비 전략을 수립한다. 케인즈경제학은 사회민주당과 같은 진보정당에게 경제학이념을 제공하며 진화경제학은 이른바 '제3의 길'을 추구하는 새로운 진보정당이나 시민사회단체에 아이디어를 공급한다. 이처럼 현대사회의 모든 정당은 고유한 관념, 더 나아가 고유한 경제학파에 따라 자신만의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경제학 족보 없는 정당, 관념 없는 정당, 더 나아가 아무 생각 없는 정당은 현대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학의 족보 없이는 생산, 분배, 소비활동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정해 낼 수 없다.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이 단지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관심자들의 생존과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면 경제학에 대한 정당의 족보는 결코 지적 장식물만은 아니리라.
한국사회에서 보수정당은 신고전학파경제학이라는 명확한 족보를 가지고 있다. 누군 다르게 볼지 모르나, 내가 보기에 적어도 한국사회의 정치지형에서 민주당은 비교적 진보적인 정당에 속한다. 그런데 선대위 등 관계자들과 토론도 해 보고 관련 학자들의 저술도 읽어보지만 이 정당의 경제학 족보를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정치인들이 문제일 수 있지만 어쩌면 한국의 경제학자들이 문제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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