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는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지난 10월 3일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경남 합천을 찾아 원자폭탄 (이하 원폭)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 있는 위령각을 참배했다. (☞관련 기사: 하토야마 전 일본 총리, 합천 원폭 피해자 찾아 "사죄")
일본 고위급 인사가 국내 원폭 피해자 위령각을 참배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나 워낙 한국 사회에 뉴스거리가 많다보니, 수많은 소식들에 묻힌 채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는 못한 것 같다.
어떤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 변화가 일어나려면 우선 이것이 이슈가 되고 사회적 혹은 정책적 의제로 올라서야 한다, 그리고 나면 여러 가지 대안이 제시되고 그 중 선택된 대안이 실행에 옮겨진다. 즉, 다수의 시민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공감하고 해결의 필요성을 느껴야만 변화의 추동력이 생겨 정책적 해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피해 당사자들의 목소리만으로는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쉽지 않다. 특히 당사자들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처해있는 경우라면, 이들의 목소리는 더욱 들리지 않는다. 원폭 피해자의 존재, 그리고 그들이 겪는 문제들이 더 많이 알려지고 공론화되어야 할 이유이다.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따르면, 1945년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피폭된 한국인은 약 7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 중 3만 명이 생존했고, 그 중 2만3000명이 한국으로 귀환했다고 한다. 그러나 2018년 3월 현재 대한적십자사에 등록된 국내 원폭피해자는 2344명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자 1세대의 규모는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그동안 사회적 무관심 속에서도 원폭 피해자들, 이들과 연대한 시민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이 2016년 5월 가결되어 2017년 7월부터 시행되기 시작했다. 이 법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실질적 지원을 통해 이들의 생존권과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국내 원폭 피해자들을 위한 공적 지원 체계가 처음으로 마련된 것이다.
지난 8월 일본비평 저널에 실린 오은정 박사의 논문은 이러한 지원 체계를 보완하고 제대로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성찰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바로 가기 : "'전재민'에서 '피폭자로': 일본 원폭피폭자원호의 제도화와 새로운 자격의 범주로서 '피폭자'의 의미 구성")
연구자는 일본에서 원폭 피해자를 명명하는 방식과 이들에게 피해를 보상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하며 이러한 접근의 정치사회적 의미를 해석하고자 했다. 또한 이들에 대한 구호 운동이 어떻게 '원폭 피폭자 의료에 관한 법'으로 제도화되었는지 그 과정을 분석했다.
연구자는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에도 정치가 작동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를테면 피해를 강조하는 '원폭피해자', 살아남은 사람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원폭 생존자', 원폭 피해자라는 의미보다는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이라는 의미가 더 강한 '피폭자'라는 용어가 가진 의미에 차이가 있으며, 이러한 용어들이 가리키는 정치적 책임의 소재가 다르다고 했다. 특히 일본에서 법률 상 '피폭자'라는 용어는 원폭의 방사선과 건강 측면의 영향을 한정하는데 쓰이고 있으며, 행정 조치를 통해 원호 대상을 일본 국내로 한정하려는 정치적 의미가 있는 단어라고 설명한다.
연구자는 원폭 경험이 한 사람의 인생 경로 어느 한 부분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경험을 단일한 특정 방식으로 기술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들이 살아온 삶의 과정에서 중첩된 관계와 상호작용 속에서 다층적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자폭탄은 개인의 신체 뿐 아니라 심리적 건강, 사회적 관계, 공동체 등 매우 다양한 측면과 수준에서 피해를 초래한다. 또한 피해 자체도 방사능만이 아니라 폭발과 열기, 바람, 화재 등 다양하며, 피폭을 직접 당한 사람뿐 아니라 가족들의 삶에도 복잡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피해자의 범위에는 피폭자뿐이 아니라, 자신은 피폭당하지 않았지만 가족을 원폭으로 잃은 유족 등이 모두 포함되어야 함이 당연하다.
일본에서는 원폭 피해자 구호가 빠르게 법적, 행정적 제도화 과정에 들어서면서 피폭자의 범위를 일본국 영토 내로 한정하고, 영토 경계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에게 '피폭자'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았다. 또한 자국의 원폭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원폭 피해는 전쟁으로 인한 일반적 피해와 구분되는 특수한 피해인 경우에 한정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결국 이 문제는 과거 일본제국이 수행한 전쟁이나 식민 지배에 대한 책임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 되었고, 그 피해를 초래한 원인, 주체도 명시하지 않은 채 원자폭탄으로 인한 생물학적 손상에 대한 보상에 한정하고 있다.
이 논문에는 타케후미 세이치의 저서에 실린 발언이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
"어떤 대표도 아닌 피해자로부터 직접 듣는 실상이 의사나 학자로부터 듣는 것보다 훨씬 원폭의 무시무시함을 느낄 수 있고,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원자병기를 금지해야만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원폭 피해자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치는 것이라 생각한다."
원폭 피해를 입고 고통스러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피해자들이 우리 곁에 있다. 이 논문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원폭 피해는 단순히 방사능에 노출된 신체적 건강문제, 즉 '원자폭탄의 특수한 피해로서의 신체적 상해'에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향후 국내에서의 피해자 지원도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의미들을 충분히 고려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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