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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 주도 성장'으로 퇴행할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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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 주도 성장'으로 퇴행할건가?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착취와 지속가능성 중 무엇에 힘을 실을 것인가

착취를 영어로 'exploitation'이라 한다. 동사인 'exploit'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개발하다(develop)'와 '이용하다(use)'는 뜻이 나온다. 예를 들어, 광산을 개발하고 자원을 이용한다고 할 때 exploit를 쓴다. 이렇듯 주체가 객체, 즉 상대를 개발하고 이용할 때 이를 '착취한다'고 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인간은 착취를 하는 주체가 되고, 자연은 착취를 당하는 객체가 된다. 착취, 즉 개발과 이용에서 이익을 보는 쪽은 주체인 인간이고, 손해를 보는 쪽은 객체인 자연이다.

'지속가능성'의 반대 개념인 '착취'

자연을 개발하고 이용하여 광산을 개발할 때 인간은 광물을 얻어 이득을 취하지만, 이러한 개발 행위 때문에 자연은 결과적으로 파괴되고 만다. 개발과 이용의 혜택이 주체에만 일방적으로 주어지고, 객체에는 재생 불능의 파괴 상태만 남게 되는 상태를 착취로 규정할 수 있다.

일방적 파괴로 재생이 불가능해진 상태를 두고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 사라진다'는 표현을 쓴다. 주체가 객체를 개발하고 이용한 결과, 주체의 지속가능성은 커지는 데 반해 객체의 지속가능성은 사라지는 상황을 착취라고 하는 것이다.

노동시장에서 자본가는 노동자를 사용한다. 노동자의 힘과 에너지, 즉 노동력을 개발하고 이용한다. 이를 통해 물건과 용역이 창출되고, 이를 시장에서 교환하고 판매함으로써 이윤이 만들어진다. 이윤은 자본가의 보수, 노동자의 임금, 기업의 투자금, 정부의 세금 등으로 분배되어 경제와 사회를 움직인다.

착취를 측정하는 방법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노동력 재생산의 지속가능성이란 관점에서 노동자의 일과 삶을 살펴보면, 착취의 수준과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육체적 건강이 지속가능한가. 정신적 건강이 지속가능한가. 육체적 안전이 지속가능한가. 정신적 안전이 지속가능한가. 도덕적 윤리적 생활이 지속가능한가. 가족 관계를 비롯한 사회관계가 지속가능한가. 정치적 권리의 행사가 지속가능한가. 문화적 향유가 지속가능한가. 사회적 안전과 복지가 지속가능한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지속가능한가.

노동의 과정과 결과로부터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고 개선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지속적으로 보장받고 있다면, 착취는 사라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자기의 노동으로부터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누릴 수 없다면, 이러한 노동자는 착취를 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경제적 지속가능성의 고갈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이 나빠지고, 육체적 안전과 정신적 안전이 위협받고,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생활에 노출되고, 가족 관계와 사회관계가 무너지고, 정치적 권리의 행사가 어렵게 되고, 문화생활의 향유는 엄두를 못 내고, 사회안전망은 작동하지 않고, 이런 것들을 가능케 하는 경제적 자원이 부족하거나 부재할 때, 우리는 이런 사회경제 제도를 착취 체제라 부를 수 있다.

착취 체제에서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사용할 때, 그 혜택은 주로 자본가에게만 돌아가고 노동자에겐 돌아가지 않는다. 착취 체제에서는 국민경제의 성과가 대기업에만 돌아가고 중소기업엔 돌아가지 않는다. 착취 체제에서는 글로벌 경제의 성과가 선진국에만 돌아가고 후진국에는 나뉘지 않는다.

개발과 이용의 혜택이 착취를 가하는 주체에만 일방적으로 주어지고, 착취를 당하는 객체는 손해만 보는 체제는 단기적으로는 번영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중장기적으로는 지속가능할 수 없다.

자본가에 의한 이윤 독점은 노동자의 파멸을 낳으면서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갉아먹는다. 대기업에 의한 이윤 독점은 중소기업의 몰락을 초래하면서 국민경제의 지속가능성을 갉아먹는다. 선진국에 의한 이윤 독점은 후진국의 저발전을 초래하면서 글로벌 경제의 지속가능성을 갉아먹는다.

착취의 궁극적 종착점은 전쟁과 혁명

20세기에 세계적 차원에서 전개되었던 두 차례의 전쟁과 한 차례의 혁명은 글로벌 체제의 지속가능성이 무너졌을 때, 현실에 등장할 파국이 무엇인지를 인류 사회에 분명히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회 정의가 없이 평화는 불가능하며, 그 전제 조건은 하루 8시간 노동과 주 48시간 노동 보장, 야간노동과 아동노동 규제, 여성노동 보호를 비롯한 인간적 노동조건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1차 대전의 교훈(1919년 국제노동기구(ILO) 창립 헌장)과 "노동은 상품이 아니며, 그 전제 조건은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완전고용, 보편적 사회복지를 보장하는 것"이라는 2차 대전의 교훈(1944년 ILO 필라델피아선언)은 인류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히고 있다.

그 결과 착취에 기반한 자본주의 체제가 또다시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이러한 사정은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다.

'소득 주도 성장' 노선은 '지속가능' 성장의 일부

'촛불' 항쟁의 시대적 과제는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 공정 과세 확립, 사회복지 확대를 통해 '착취 주도 성장(exploitation-led growth)을 '지속가능 성장(sustainable growth)'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소득 주도는 지속가능 성장을 가능케 하는 방법론 중 하나다. 여기에 노동시간단축 주도, 임금 주도, 세금 주도, 복지 주도, 토지공개념 주도를 결합시킬 때 착취가 주도하는 성장을 넘어서는 지속가능한 성장이 가능해질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실패 원인 중 하나는 '착취가 지속가능성과 공존할 수 있다'고 우기면서 이른바 '좌파 신자유주의' 정책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사법부에 의한 삼성으로 대표되는 불법을 저지른 독점자본에 대한 지속적인 면죄부, 행정부에 의한 유동성(flexibility)과 탈규제에 기댄 낡은 노동시장 정책, 입법부에 의한 자본 편향 사회경제 법령의 추진 등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한물간 '착취 주도 성장' 노선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세월인 ILO기본협약 비준

착취와 지속가능성은 공존할 수 없다는 공약, 즉 노동 존중을 내세운 문재인 정권이 내년이면 집권 3년차를 맞는다. 문재인 정권은 착취와 지속가능성 중에서 무엇에 힘을 실을 것인가.

질문에 대한 해답의 일단은 건국 100주년과 ILO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내년 초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 강제노동 금지를 규정한 ILO기본협약 비준 여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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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원

택시노련 기획교선 간사,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사무국장, 민주노동당 국제담당, 천영세 의원 보좌관으로 일했다. 근로기준법을 일터에 실현하고 노동자가 기업 경영과 정치에 공평하게 참여하는 사회를 만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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