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예산 정국의 첫발을 협치 공감대로 뗐다. 5일 청와대에선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원내대표들이 첫 번째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를 가동했다. 비슷한 시간, 국회에선 문희상 국회의장과 여야 5당 대표들의 월례회동인 '초월회' 모임이 열렸다.
새해 예산안과 정기국회 법안 처리를 앞두고 대통령과 여야 대표, 국회의장과 원내대표들이 머리를 맞댄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다. 여야정 상설협의체는 당초 예정됐던 100분을 훌쩍 넘어 158분 동안 진행됐다.
문 대통령은 "우리 정치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협치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며 "협치에 대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야정 상설협의체가 "좀 실질적인 협치의 틀로 작용을 해야만 한다"고 했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도 "한 번의 만남으로 모든 게 일거에 이뤄질 수 없겠지만 지금의 민생 상황 등이 급박하다는데 정부와 여야가 인식을 같이한다는 점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성과"라고 평가했다.
여야정 상설협의체는 분기에 1번(3개월에 1번) 열리는 정례 모임이다. 여야 간극이 큰 첨예한 현안들을 논의한다. 제도의 속성 상 청와대 권력이 강하게 작동하는 정치풍토에서 야당이 대통령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여야정 협의체의 상설화, 정례화는 그 자체로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1차 회의에서 보여준 한계 또한 분명했다. 거대 양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어느 쪽도 과반을 점유하지 못한 5당 체제의 갈등선이 다양하게 그어졌다.
회의 후 발표한 12개 항으로 구성된 합의문에는 '~을 위해 노력한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각 당의 요구사항을 망라해 담아냈지만, 이견이 적지 않았다는 뜻이다. '문재인 아젠다'라고 할 수 있는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관한 합의조차 '초당적으로 협력한다', '여건 조성을 위해 노력한다' 등 모호하게 처리했다. 이 합의만 보면 판문점 선언 국회 비준은 기약이 없다.
구속력 있는 합의는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들이 반발하는 탄력근로제 확대 적용, 각종 규제완화법 추진에서 나왔다.
탄력근로제와 관련해 합의문은 '기업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탄력근로제 확대 적용 등 보완 입법 조치를 마무리한다'고 보다 분명한 표현을 담았다. 규제완화 문제도 '규제혁신 관련 법 및 신산업 육성을 지원하는 법(4차 산업혁명 관련법 등) 처리를 적극 추진한다'고 명시했다. 이 두 가지 항목에는 정의당만 '의견을 달리한다'는 소수의견을 달았다.
합의문을 종합해 볼 때, 불법촬영 유포 행위에 대한 처벌 강화 법안, 강서 PC방 대책 후속 입법, 음주운전 처벌 강화 법안, 아동수당법 개정 등 사회적 이견이 크지 않은 내용을 제외하면, 갈등 쟁점인 한반도 현안은 답보했고, 경제노동 분야는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보다 크게 보수화했다.
원전 정책에서도 한국당은 '원전기술력과 원전산업의 국제경쟁력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한 정책을 적극 추진한다'는 내용을 합의문에 담는 성과를 거뒀다.
결과적으로 이날 처음 실질적으로 가동된 여야정 상설협의체는 촛불 정국 이전에 구성된 보수 우위의 국회 지형을 재확인했다. 촛불 지형과 국회 지형의 엇박자는 2020년 총선까지 필연이다. 각종 경제지표가 악화되고 문 대통령도 경제적 난국을 인정한 터라, 시간이 갈수록 여권과 보수야당 사이의 타협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재조정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대통령이 '협치를 통한 국정운영'을 표방하며 가동한 여야정 협의체의 역설이다.
그럼에도 협치의 제도화, 실질적 협치의 바탕이 되는 선거제도 개혁 문제는 원론적 합의에 그쳤다.
합의문을 통해 여야는 '선거연령 18세 인하를 논의하고, 대표성과 비례성을 확대하는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노력한다'고 밝혔다. 민주평화당과 정의당이 강하게 요구했고, 문 대통령도 선거연령 인하를 "합의문에 꼭 넣어달라"고 힘을 실었다고 한다. 이날 초월회 모임에서 여야 5당 대표들도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를 통해 "연말까지 개혁안을 마련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고 합의했다.
선거연령 인하를 포함해 선거제도 개혁에 관해 여야가 공감대를 모아낸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의 바탕이 되는 국회의원 정수 증원 문제에 대해선 반대 여론의 눈치를 보며 정개특위 논의 사항으로 미뤄뒀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연동형 비례제를 도입해 비례성이 발휘되도록 하는 데 동의한다"면서도 "의석수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 판단해야 하는데 정개특위에서 심도 있게 논의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국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의원수 증원에 반대하는 현실에서 민주당마저 정개특위 위원장인 심상정 의원의 '개인기'만 쳐다보고 있는 셈이다.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는 다원적 국회구성이 협치의 근간이다. 거대 양당만 수혜를 보는 현재의 선거제도를 방관하면, 2020년 총선 뒤에도 문재인 정부의 협치는 촛불 민심과 어긋난 보수적 타협의 틀을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전체댓글 0